병자호란의 치욕과 청년 윤휴의 다짐
1637년 1월 30일, 조선의 인조 임금이 항복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로 향했다. 인조는 청 태종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의 사부 송시열(宋時烈, 1607~1689). 그는 남한산성에 있다가 인조가 항복하고 전쟁이 끝나자 보은 속리산 근처로 친척을 만나러 갔다. 보은 삼산(三山)으로 피난 가 있던 윤휴(尹鑴, 1617~1680)는 복천사(福泉寺) 앞에서 송시열과 만났다.
송시열로부터 굴욕적인 항복에 관한 전말을 들은 윤휴는 통곡하며 다짐을 말했다. “지금 이후로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을 것이며, 좋은 때를 만나 벼슬길에 나가더라도 결코 오늘의 치욕을 잊지 않을 것이오.” 송시열은 송준길에게 보낸 편지에서 ‘윤휴와 만나 3일간 토론하고 나니, 내가 30년 독서한 것이 참으로 가소롭게 느껴졌다’고 말할 정도로 윤휴를 높이 평가했다.
윤휴는 그날의 다짐대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공주와 여주 등에서 독서에만 전념했다. 송시열은 물론, 송준길, 이유태, 유계, 윤문거, 윤선거 등 주로 서인 계열 명유(名儒)들과 교유했지만 특정 당파에 치우치지는 않았다. 1655년 시강원 자의에 임명됐고, 1658년에는 시강원 진선에 임명되었지만 사의를 표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윤휴의 본관은 남원, 호는 백호(白湖), 하헌(夏軒), 자는 희중(希仲)이다. 부친 윤효전(尹孝全, 1563~1619)은 광해군 때 벼슬을 지낸 인물로 학맥상 서경덕 계열에 속한다. 윤휴는 1617년 부친 윤효전이 경주 부윤으로 있을 때 태어났으나, 3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 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윤효전은 광해군 시절 임해군 제거에 공을 세운 점이 문제가 되어 인조반정 이후 관작을 박탈당했다. 13살 때 윤휴가 억울함을 호소하여 비록 사후지만 관작을 회복할 수 있었다.
예송논쟁에서 송시열과 대립하다
북벌을 염원하던 효종이 1659년 세상을 떠났다. 효종의 아버지 인조의 계비로 형식상 효종의 어머니인 자의대비는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할까?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부모는 장자상은 3년, 둘째 아들부터는 1년복을 입어야 했다. 송시열과 서인 세력은 소현세자가 적장자이고 효종은 차자이기 때문에 기년복(1년 입는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윤휴와 남인 세력은 왕통을 이은 효종이 장자가 된 것이기 때문에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인 세력은 국왕과 왕실도 보편적 예법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천하동례(天下同禮)의 원리를, 남인 세력은 국왕과 왕실은 사대부나 일반 백성들과는 다른 예법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왕자예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 원리를 강조한 것이다. 그것은 신권(臣權) 강화로 집권 지배층 중심의 질서를 다지려는 서인 세력과, 왕권(王權)을 강화하며 새로운 권력 기반을 다져나가려는 남인 세력의 정치적 충돌이기도 했다. 논쟁의 결과는 장자와 차자 구분 없이 1년복으로 명시되어 있는 [경국대전]을 내세운 송시열과 서인의 승리였다.
“열흘이 못 되어 심양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예로운 병력과 강한 활 솜씨는 천하에 소문이 난데다가 화포와 조총을 곁들이면 넉넉히 진격할 수 있습니다. 병사 1만 대(隊)로 북경을 향해 나아가는 한편, 바닷길을 터서 정성공 (鄭成功: 청나라에 저항하여 명나라 부흥 운동을 전개한 인물) 세력과 힘을 합쳐야 합니다. 그러고는 연주, 계주, 요하 이북의 모든 지역과 여러 섬과 청, 제, 회, 절 등에 격서를 전하고 서촉까지 알려서 함께 미워하고 같이 떨쳐 일어나게 한다면 천하의 충의로운 기운을 격동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1674년 7월에 올린 상소문 중에서
1674년 3월 청나라에 파견된 사신 김수항 일행은 오삼계(吳三桂)가 일으킨 반란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했다. 산해관 일대를 지키는 명나라 사령관이었던 오삼계는 청군에게 산해관 문을 열어주고 북경의 이자성을 함께 공격하여 청나라에 협조한 인물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평서왕에 봉해져서 운남 지역에서 독자적인 번(藩) 세력을 이루고 있다가 청나라가 철번령을 내리자 반발하여 군사를 일으켰고 오삼계, 상가희, 경정충 세력을 아울러서 ‘삼번의 난’이라 한다.
북벌의 꿈을 꾸던 윤휴는 청나라의 정세 변화를 천재일우의 기회로 판단했을 것이다. 윤휴가 현종에게 올린 위와 같은 상소는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가에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는 주장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사실 송시열은 북벌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효종은 신하들이 수치를 씻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에게 수신(修身)만 권한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가장 적극적인 북벌론자는 재야에 있던 윤휴였던 것이다.
마침 조선의 정세도 급변했다. 1674년 현종의 어머니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한번 자의대비 의 복상(服喪)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제2차 예송논쟁이다. 이번에는 남인이 주장하는 기년복설이 채택되고 서인은 실각했지만, 현종이 곧 세상을 떠나고 숙종이 즉위했다. 윤휴는 그해 말 상소를 올려 다시 북벌을 주장했지만 숙종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1675년 윤휴는 정4품 성균관 사업(司業)으로 조정에 진출하여 경연에서 숙종에게 말했다. “우리나라에는 10만 정병이 있고 식량도 쉽게 장만할 수 있으므로 열흘이 못 되어 심양을 차지할 수 있고, 심양을 빼앗고 나면 관내(關內)가 진동할 것이니,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염려가 없습니다.”
좌절된 북벌의 꿈
숙종은 물론이거니와 윤휴가 조정에 진출할 수 있게 한 남인 세력도 윤휴의 강경한 북벌론에 반대했다. 윤휴는 말로만 북벌을 외친 것이 아니라 군비 확충을 위해 세금 면제 토지를 없애고 호포제를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호포제는 양반과 상민을 불문하고 모든 호(戶)에 군포를 부과하는 제도여서 양반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비록 집권했다고는 하지만 서인을 압도하지 못하고 있던 남인 세력으로서도 호포제 시행으로 양반층 전체의 반발을 살 이유가 없었다. 호포제는 단순한 세금제도 차원을 넘어서 당시 조선 사회 질서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개혁안이었다.
“죽은 사람이나 어린아이의 살가죽을 벗기고 골수를 부수는 가혹한 정치에 얼굴 찡그리고 가슴 치는 괴로움과, 놀고먹는 선비나 운 좋은 백성들이 부역을 피하여 편하게 지내는 자의 원망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크겠습니까? 어느 쪽이 명분있는 것입니까? 어느 쪽이 진정 백성의 원망이 되는 것입니까?”-[숙종실록] 3년 12월19일
윤휴는 일종의 전차라고 할 수 있는 병거(兵車) 제작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산악이 많은 우리 지형에 맞지 않는다는 반대에 부딪혔고, 일부 지역에서 제작 사업이 시작되었다가 곧 중단되고 말았다. 대만에서 반청(反淸) 운동을 벌이던 정(鄭)씨 세력과 연합할 것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윤휴의 북벌론은 왕으로부터 집권 세력에 이르기까지 조정 내에서 비현실적이고 모험적인 주장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윤휴는 현실을 살피지 않고 함부로 큰소리만 쳐서 자기 명성만 높이고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주자(朱子)와 다른 학문적 입장을 취해 이단으로 지목 당하다
백호 윤휴의 초상. 그는 정치적으로 남인이었고, 북벌론을 주장했으며 학문적으로는 주자와 다른 입장을 취하는 등 사상적으로 자유롭고 혁신적인 면모를 보였다. |
윤휴와 대립했던 우암 송시열. 한때 서로를 인정하며 친구로 지내던 이들은 예송논쟁을 거치면서 앙숙관계가 되었다. 송시열은 주자의 학설을 비판한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규정하였다. 국보 제 239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
“나의 저술 의도는 주자의 해석과 다른 이설(異說)을 내놓으려는 데 있다기보다는 몇 가지 의문점을 기록하려는 데 있다. 내가 주자 당시에 태어나 그의 제자가 되었더라도 전혀 의문점을 해소하려 하지 않고 앉아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전혀 의심하지 않고 애매한 점을 놓아둔 채 뇌동(雷同: 줏대 없이 남의 의견에 따라 움직임)한다면 허위가 될 뿐이니, 주자 자신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근래에 송시열이 나의 학문을 이단이라고 배척했다. 송시열의 학문은 주자의 가르침이라면 덮어놓고 논의를 용납하지 않으니, 주자를 존경하여 따른다 하더라도 이 어찌 진실로 체득했다 할 수 있겠는가? ”-[도학원류속] 중에서
윤휴는 성리학의 이기론보다는 경학과 예학에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특히 [중용]과 [대학]의 주해에 각별한 공을 들였고 [중용]에 대해서는 주자의 주석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장(章)을 나누어 주해함으로써 송시열에게 이단으로 지목 당했다. [대학]에 대해서도 주자가 격물치지(格物致知)에 관한 부분이 빠진 것 같다하여 보충한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윤휴는 하늘을 섬기고 하늘을 두려워하며 하늘을 경의하는 자세를 강조함으로써 주자의 성리학보다는 고대(古代) 유학의 정신을 추구하고자 했다. 송시열은 ‘주자가 모든 학문의 이치를 이미 밝혀놓았는데 윤휴가 감히 자기 의견을 내세워 억지를 부리니 진실로 사문난적(斯文亂賊: 교리에 어긋나는 언동으로 유교를 어지럽히는 사람)이다’라며 비판했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스러진 운명
숙종은 남인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1680년 3월,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 허적의 집에서 열린 잔치에 숙종은 궁중에서 쓰는 방수 천막을 보내려 했지만 허적이 이미 가져간 뒤였다. 이 사건을 빌미로 숙종은 조정 요직을 모두 서인 인물로 바꾸었다. 4월에는 인조의 손자이자 숙종의 친척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등이 허적의 서자 허견과 결탁하여 역모했다는 고변이 있었다. 결국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이 다시 득세했다. 이른바 경신환국(庚申換局)이다.
윤휴는 폐지됐던 도체찰사부를 다시 설립해 허적이 당연직으로 도체찰사를 맡고 자신이 부체찰사를 맡으려 했으나, 숙종은 김석주를 부체찰사에 임명했다. 윤휴는 이에 대해 항의의 뜻을 나타내며 어전에서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일종의 전시사령부로 모든 군사력을 통제하는 기구인 도체찰사부의 인사를 둘러 싼 윤휴의 태도가 경신환국 정국에서 다시 문제가 되었다. 더구나 숙종에게 숙종의 어머니를 잘 단속하라 얘기했던 것, 복선군 형제와 친했다는 혐의 등도 문제가 되었다.
서인 민정중이 송시열에게 편지를 보내 윤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물었다. 송시열은 ‘풀을 제거하려면 반드시 뿌리를 제거해야 한다’고 답했다. 2차 예송논쟁 당시 윤휴도 송시열을 엄벌에 처할 것을 주장한 적이 있었다. 40여 년 전 속리산에서 의기투합하며 비분강개했던 두 사람은 이제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는 사이였다. 1680년 5월 20일 윤휴는 사약을 받았다. 9년 뒤 1689년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한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도 사약을 받았다. 18세기 이후 서인 노론 세력이 계속 집권하면서 윤휴는 이단시됐고, 그의 문집이 처음 나온 것은 1927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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