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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사형 사림의 대표적 인물 성운의 학풍과 처세 - 성운

히메스타 2016. 10. 31. 15:18

 

성운 이미지 1

성운(, 1497~1579)은 16세기에 속리산 일대를 학문의 무대로 삼으면서 처사형 사림()의 입지를 지킨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성운에 대한 역사적 평가나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원인으로는 성운이 관직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점, 그의 문집인 [대곡집()]의 분량이 매우 적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성운은 16세기에 활약한 전형적인 처사로서, 남명 조식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그의 학풍과 사상에 대해서는 당대에도 높은 평가가 있었으며, 허목, 윤휴 등 17세기 중ㆍ후반 근기남인(: 서울, 경기 지역의 남인) 학자들에게도 일정한 영향력을 주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사화()의 충격, 처사()의 삶을 지향하다

성운의 자는 건숙(), 호는 대곡(), 본관은 창녕이다. 증조부 득식()은 한성부우윤, 조부 충달()은 현령, 부친 세준()은 부정()을 지냈으며, 어머니 박씨는 사간 박효원의 딸이었다. 조광조의 문인으로 백악산 자락에서 은거하던 성수침()은 그의 종형으로, 기호학파의 원류가 된 성혼(, 1535~1598)은 성운의 당질()이 된다. 성씨()는 본래 서울에서 살았지만 성운은 젊을 적에 세상을 피해 살 뜻이 있어 잠시 성균관에 들어갔다가 곧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처향()인 충청도 보은에 가서 살았다.

성운이 살아간 시대는 4번의 사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16세기 초반 50여 년간 연속된 사화는 사림파들의 학문적ㆍ정치적 성장에 대한 기존의 집권세력인 파구파들의 정치적 반격이었다. 훈구파들의 반격은 성리학의 이념을 정치현실에서 실천하려고 했던 사림파 학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사화라는 부정적인 정치상황을 목도한 사림들은 출사()를 단념하는 대신에 처사()의 삶을 선택하면서 현실비판자의 입지를 지켜 나가는 경향이 커졌다. 성운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탄생한 처사형 사림이었다. 성운은 30여세 때 과거에 응시하여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에 응시하지는 않았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유일(: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를 천거하는 인재 등용책)로 천거를 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성운이 은거를 굳힌 것은 무엇보다 1545년의 을사사화 로 형 성우()가 희생된 일이 강하게 작용했다. 조헌()은 상소문에서 ‘성운이 보은에 몸을 감춘 것은 성우에 대한 충격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성운이 은거한 보은의 종곡()은 성운의 처가가 있던 곳으로, 처사형 사림들은 사화의 시기에 경제적 기반이 있는 처향이나 외가에서 학문 활동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성운은 일생의 대부분을 속리산에 은거하면서 학문 활동을 했고, 조식, 성제원(), 서경덕() 등 당대의 처사들과 깊은 교분을 가졌다.

성운의 절친한 벗, 남명 조식

성운과 가장 친밀했던 벗은 남명 조식(, 1501~1572)이었다. 조식과 성운은 젊은 시절 서울에서 인근에 함께 살았으며, 백악산에 은거했던 종형 성수침으로 인하여 조식과 보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대곡집]과 [남명집]의 시 부분에는 각각 조식, 성운이 주고받은 시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양인이 교환한 편지가 다수 발견된다. 이황() 또한 ‘성운이 조식과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으니 조식은 드높고 뛰어났는데, 성운은 순박과 화평으로써 조절하였다’고 평하여 두 사람의 각별한 친분을 언급하였다.

성운과 조식은 생전에 자주 편지를 교환하였다. 두 사람은 김해ㆍ지리산과 속리산이라는 서로 떨어진 지역에 거주했지만 인편을 통해 안부를 묻고 서로의 건강을 걱정해 주었다. 조식과 성운의 편지 교환은 승려나 수령, 문인 등 인편을 통해 전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중에는 조식이 제자들을 성운에게 추천해 주는 사례도 발견된다. 즉 ‘이번에 찾아가는 두세 사람은 일찍이 나를 따라 공부하던 자들입니다. 항상 공을 찾아뵙고자 하였는데 이제서야 길을 떠나 속리산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늙은 얼굴을 대신하여 보내니 학문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말씀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쓴 편지가 대표적이다. 조식 이외에 성운과 친밀한 교분을 유지한 인물로는 서경덕, 이지함, 성제원 등 당대의 처사형 사림들이 있다. 송시열은 성운의 묘갈명에서, ‘선생의 벗은 조남명, 서화담, 이토정 같은 이들로서 다 세상에 드문 명현()들이었고, 남명과는 더욱 막역한 사이였다. 대체로 남명은 누구도 범할 수 없는 의연한 기상이 있었는데, 선생은 온후한 기상으로 대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성운이 보은에 은거하고 있었던 16세기 중반의 속리산 지역은 당대의 처사형 사림들이 모여드는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조식은 경상우도에서 이곳 속리산까지 찾아와 성운을 만났으며, 성제원은 보은현감으로 있으면서 성운과 친밀함을 유지하였다. 조식, 서경덕, 이지함이 속리산에 와서 성운과 성제원을 만나고 수일간 즐긴 사실은 [연려실기술()]의 ‘성운이 속리산에 은거하면서 거문고와 책으로 스스로 즐겼다. 조식이 일찍이 찾아왔는데 (성제원)이 마침 자리에 있었다. 조식과 공은 비록 초면이었으나 친함이 옛 친구와 같았고 서경덕, 이지함이 또한 동행해 와서 함께 수일을 즐겼다.’는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역적으로 먼 거리에 있었던 서경덕과 조식이 성운과 성제원을 매개로 하여 보은에서 만남의 자리를 갖고 수일간을 즐겼던 사실을 통하여, 16세기 학자들의 적극적인 교유 관계를 확인할 수가 있다. 이 소식을 듣고 이준경은 ‘당시에 응당 덕성()이 하늘에서 움직였다’고 하면서 당대 처사들의 속리산 회동을 높이 평가하였다.

성운의 학풍과 처세

성운이 추구했던 학풍적 특징은 마음의 수양을 중시하여 실천의 밑바탕으로 삼은 것과 은둔적인 처세를 하면서 성리학 이외에 노장사상에 관심을 기울인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성운이 수양을 중시한 것은 무엇보다 사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화로 대표되는 비리와 모순에 가득찬 정치현실을 경험한 성운은 선비가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수양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송시열이 ‘선생은 온순한 품성과 호매한(: 성격이 호탕하고 인품이 뛰어남) 기질의 소유자였으며, 그의 학문은 오로지 존양정색(: 본심을 잃지 않도록 착한 성품을 기름)만을 힘썼으므로 그의 말은 사실의 뒷받침이 있었고 그의 행실은 일정한 법도가 있었다’고 지적한 것이나, 그 스스로가 ‘성현의 책은 반드시 마음과 안목에 정착시킨 다음에야 뜻을 구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구두의 학문일 따름이어서 상달()하는 것을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에서 성운은 수양을 바탕으로, 마음을 통해 직접 체득하는 실천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성운의 학풍에서는 성리학자로서 수양과 실천을 중시한 점이 두드러지만, 은일적()ㆍ노장적()인 경향이 있다는 점 또한 이황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에 의해 지적되었다. 17세기의 학자 이식()은 성운이 저술한 <허부찬()>이나 <취향기()>와 같은 글은 노장적 경향이 짙은 방외어()임을 지적하였다. <허부찬>은 자신이 나이가 들어 귀와 마음이 어두워져서 짚과 나무로 엮어 만든 허수아비와 같으므로 호를 ‘허부()’로 삼는다고 한 후에 허수아비를 통해 세태를 풍자한 글로서, 성운이 자신의 시대를 말세로 인식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성운은 불교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재주가 뛰어났던 어떤 승려가 불교에 빠져 심지()를 허비하자 불교에 빠진 마음을 유학으로 옮기라고 권유한 사례에서도 일정하게 나타난다. 조선 중기에 성리학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불교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지만 불교는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일정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성운은 성리학의 실천을 위한 심신의 수양에 필요한 것이라면 불교나 노장사상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노장 사상과 불교에 일정한 관심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성운은 속리산에 은거하는 처사의 삶으로 일관했지만 현실정치에 완전히 인연을 끊은 현실 은둔자는 아니었다. 그가 저술한 몇 편의 단문에는 그의 정치관, 사회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1553년에 가뭄이 크게 들자 그 대책을 제시한 글인 <대한부()>와 인사 비리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인 <답우()>가 대표적이다. <대한부>는 가뭄이 크게 들어 농토를 버리고 유랑하는 백성들이 속출하는 현실을 목격하고 이에 대해 애통한 심정을 피력한 글이며, <답우>는 벗과의 대화라는 형식을 통하여 당시 수령들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이다. 수령의 탐학에서 초래되는 민간의 고통은 결국 조정의 처사에 달려있음을 지적하고, 성운은 이러한 폐단의 해결책으로 무엇보다 군주가 궁리()와 지인()의 학문에 힘쓸 것을 건의하였다. 성운은 향촌에 은거한 지식인 학자로서 백성들의 안정된 삶을 위해서 무엇보다 수령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러한 수령의 모델로 보은현감을 역임했던 성제원을 제시하였다. 성운은 성제원이 인()으로써 백성을 다스린 점과 서원을 건립하여 선비들을 학문에 나아가게 한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성운의 이러한 평가에는 자신과 같이 처사형 사림인 성제원을 부각시켜 처사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판단된다. 성운은 또한 산림에 은거한 인재들을 제대로 등용해야만 나라가 다스려지고 백성이 안정되며, 어질지 못한 자를 등용하여 조정의 반열에 포진시키는 것은 헛된 이름을 도둑질하고 세상을 속이는 행위라고 인식하였다. 올바른 도리가 실현되지 않는 현실에서 출사하여 어용화되기 보다는 현실비판자로서의 소임을 다해야 한다는 그의 입장은 현재의 세태에도 결코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성운의 학풍이 후대에 미친 영향

성운은 당대 및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온화하고 엄정하게 처사의 입지를 지킨 전형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 [실록()]의 ‘대체로 조용하고 담담하게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인물평이나, 16세기 당대의 인물평가서인 [해동문헌총록()]에서 ‘사람됨이 단중()하고 온아(), 평담(), 간이()하다’고 한 것 등은 성운의 인품을 보편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성운이 중앙 정계에서 보다 부각된 것은 광해군대에 조식의 문인인 정인홍(, 1535~1625)이 집권하면서였다. 정인홍은 스승인 조식을 높이면서 조식의 절친이었던 성운에 대해서도 높은 평가를 내렸다. 정인홍은 1611년(광해군 3) 3월에 올린 상소문에서, 이황과 이언적의 출처를 비판하고 조식과 성운의 행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정인홍은 조식과 성운이 도()와 뜻을 같이한 인물임을 지적하고, 이들이 비록 세상을 피해 은거하였지만 조정의 부름을 받아 국왕을 뵙고 때때로 상소문을 올려 시무()에 대해 의견을 개진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정인홍은 이들의 행적이 이황에 비해 훨씬 떳떳하며 처사의 입지에서 현실비판자의 소임을 다한 것을 높이 평가하였다. 결국 성운 스스로는 어느 당색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정인홍이 스승인 조식과 함께 성운을 ‘사문(: 스승)’으로 존숭하면서 그는 북인학파와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되었다.

성운의 학풍과 처세는 임제(, 1549~1587)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임제는 일찍이 속리산에 들어가 그 곳에서 은거하고 있던 성운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호방하고 쾌활한 시풍으로 이름을 날렸다. 임제의 문집인 [임백호집] 곳곳에는 임제가 성운에게 학문을 배우고 그를 흠모한 흔적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도주운암()>이라는 시에는 임제가 약관의 나이에 속리산으로 들어와 성운에게 학문을 배운 사실을 기술하고 있으며, [임백호집] 발문에는 ‘공은 대곡선생(성운)이 작고한 이후로 세상에 지기()가 없어서 벼슬길에 뜻이 없이 스스로 산야를 방랑하는가 하면 시주()에 빠졌다’고 하여 성운이 임제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기록하였다. 임제의 학문이 역사적으로 의미가 큰 것은, 그의 외손자인 허목(, 1595~1682)의 학풍 형성에 큰 영향을 준 점이다.

성운은 허목 뿐만 아니라 윤휴(, 1617~1680)의 학문 형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윤휴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 외가인 보은으로 피난을 갔으며, 그곳에서 외조부 김덕민으로부터 성운의 학풍을 접할 수 있었다. 윤휴는 보은에 있을 때 학문을 하는 중에 의문이 생기면 성운이 공부를 하였던 죽헌()에 들어앉아 홀로 그것을 연구했다. 윤휴는 또한 성운의 언행록을 읽은 후에 그 감회를 기록하면서 ‘성운이야말로 독신호학(: 믿음을 돈독히 하고 배우기를 좋아함)하고 수사선도(: 죽음을 당하더라도 도를 참되게 함)한 인물이다’라고 칭송하였다. 허목의 학문적 연원에 성운에서 임제로 이어지는 흐름이 있다는 점과, 윤휴의 학풍 형성에 보은을 기반으로 한 성운의 영향력이 있었다는 점은 성운의 학풍과 처세가 근기남인 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6세기 보은의 속리산 일대에서 살아간 처사 성운은 조용하지만 강한 학자였다. 그의 학풍과 처세는 당대 처사형 사림의 학풍과 처세를 압축적으로 반영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학문의 무대였던 속리산은 당대의 사림들을 결집시켜주는 공간이 되었다. 또한 그의 학풍과 처세는 허목, 윤휴로 대표되는 근기남인 학자들의 학문과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면서 후대에까지 계승되는 면모가 확인되었다. 산림에 묻혀 살았기 때문인지 역사 속에서도 그 이름이 거의 묻혀있었던 인물 성운. 이제 우리의 시대에 그의 이름을 발굴해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