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실용을 중시한 관료학자 - 이산해

히메스타 2016. 11. 14. 10:56

 

 

이산해 이미지 1

한산 이씨 명문가 출신으로 목은 이색()의 후손, 토정 이지함()의 조카. 북인의 영수라는 학문적ㆍ정치적 위상을 가졌던 관료. 그러나 이산해(, 1539~1609)는 조선시대 인물사 연구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관료학자에 대한 관심이 적었고, 정치적으로 패배한 당파인 북인의 영수였다는 점 또한 그에 대한 관심이 적은 원인이었다.

명문가의 후예

이산해의 본관은 한산(), 자는 여수(), 호는 아계() 이외에도 죽피옹(), 종남수옹(), 시촌거사() 등이 있다. 1539년(중종 34) 한양 황화방에서 이지번(, ?~1575)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산해 학문의 뿌리는 고려 말과 조선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산 이씨 집안은 고려말 신흥사대부를 대표하는 이곡()과 이색() 부자를 배출하면서 단숨에 최고의 명문이 되었다. 토정 이지함()은 그의 숙부가 된다.

이산해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서울과 세거지()인 충청도 보령을 자주 왕래하였다. 6세에는 이산해가 글씨를 잘 써서 ‘서소문자대필’(西)이라는 명성을 얻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는 서소문 근처에서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7세 되던 해인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이지번은 친지와 사류들이 사화로 희생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아들을 데리고 고향인 보령으로 돌아왔다. 이산해는 11세까지 보령에 있었으며, 본격적인 서울 생활이 다시 시작된 것은 17세 때 조언수()의 딸과 혼인하면서부터이다. 1558년에는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60년 명종이 시행한 알성시에서 장원급제하였다. 명종은 이산해가 수년 동안 연달아 세 차례나 장원을 했기 때문에 전시(殿: 조선시대에 복시()에서 선발된 사람에게 임금이 친히 치르게 하던 과거)에 직부()하도록 하였고, 1561년 드디어 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직 생활은 순탄하였다. 1562년 홍문관 정자에 제수되었고, 명종의 명으로 경복궁 편액을 썼다. 글씨의 자질을 인정받은 것이다. 1563년 사가독서()를 하였으며, 홍문관 저작으로 당대의 권신()인 윤원형을 탄핵하는 차자()를 직접 지어 올렸다. 이어 정언, 병조정랑, 이조좌랑 등 젊은 관리가 거칠 수 있는 청요직을 두루 지냈다. 1567년 이산해를 이조좌랑으로 임명한 기록에는 “이산해는 이색의 후예로, 여섯 살에 능히 대문자()를 짓고 여러 차례 향시에 장원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천선()처럼 바라보았으니, 참으로 기사(: 기이한 재주를 가진 선비)이다”라고 적고 있다. 1569년과 1570년에는 이조정랑, 동부승지, 이조참의, 대사간, 부제학 등 요직을 거치면서 승진을 거듭하였다. 1571년 승지로 있을 때 부친의 병세가 악화되자 서울로 모시고 와서 종남산(: 남산) 기슭에 작은 집 한 채를 짓고 요양처로 삼았다. 이산해가 부친의 병을 치료하고자 남산 기슭에서도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1575년 이산해는 부친의 간병을 위해 계속 노력했으나, 이지번은 4월 세상을 떠났다. 이산해는 충청도 보령 고만산 기슭의 할아버지 묘소 아래에다가 부친을 귀장()하였다.

관료생활의 빛과 그늘

아계 이산해 영정. 북인의 영수로 학문적, 정치적 위상을 가졌던 이산해는 당대의 많은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현실 정치에 도움이 되는 실용을 중시한 관료학자였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97호. 한산이씨 아계공파 종중 소유.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1575년은 동인과 서인의 동서분당이 시작된 해였으나, 이산해는 1577년 6월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관직에 참여하지 않았다. 삼년상을 치른 뒤 정치권에서 요청이 계속 이어져 이산해는 대사간, 대사성, 예조참의, 도승지,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이 해 겨울에는 이덕형()을 둘째 사위로 맞이하였다. 처음 이산해는 정철 ()과 사이가 좋았는데, 정철이 이덕형을 사위로 맞이한 이산해에게 자신의 사위 추천을 청하자, 이산해는 오윤겸()을 추천하였다. 이에 대해 정철은 “저는 이덕형과 같은 사위를 얻고 자신에게는 병약하고 쇠약한 서생을 추천하다니, 절교를 하겠다”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러나 오윤겸 역시 훗날 영의정에 올랐으니, 인재를 알아보는 이산해의 안목을 엿볼 수 있다.

1581년 봄에는 대사헌에 제수되고 여름에는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1581년에는 모친상이 일어나 여묘살이를 하면서 보령에 거처하였다. 1584년 이산해는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제수되었고, 1585년에도 계속해서 전형()과 문형()의 직임을 맡았다. 당시 이산해가 오래도록 전병(: 전랑의 선발권이나 추천권)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 올라오자, 선조는 이산해에 대해 “이조판서는 순후한 덕을 가졌고 굉장한 재주를 가졌으며, 대단한 기국(: 기량)에다 넓은 아량도 있으며 남다른 충절도 있다”고 하여 반대파의 주장을 일축하였다. 1588년에 우의정, 1589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1589년 10월에는 정여립()의 역모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기축옥사의 주모자 정여립이 동인이었고, 동인의 연루자가 많았던 까닭으로 이산해 또한 곤욕을 겪었다. 옥사에 연루된 김면과 정개청이 이산해가 전형을 맡을 때 임명된 인물이라는 비난서가 올라왔고, 수사 책임을 맡았던 정철은 정암수의 상소가 올라오자, “대감은 오늘 이 자리가 불안하겠습니다”라면서 노골적으로 이산해를 압박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선조는 여전히 이산해에 대한 신임을 밝혔다. 선조는 “두 사람(유성룡과 이산해)이야말로 국가의 주석()이 되고, 사림의 영수가 될 줄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내가 평소에 의지하고 존중하던 사람들이다”라고까지 하였다.

1591년 이산해는 종남산 부근에 거처하고 있었다. 정언신이 이곳을 방문하자, 이산해는 기축옥사로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실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특히 최영경의 억울한 죽음과 정철이 역옥(: 반역 사건에 대한 옥사)을 빙자하여 무고한 선비들을 죽인 것에 대해서는 극히 분개하였다. 이즈음 이산해는 동인의 수장이 되어 서인의 중심 정철과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1592년 4월, 조선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영의정 이산해는 선조를 모시고 피난길에 올랐다. 이때 서인의 중심 정철의 측근들이 서울을 떠난 죄를 이산해에게 물었다. 대간의 탄핵이 더욱 격렬해지자 선조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산해는 결국 강원도 평해군으로 유배되어, 1593년, 1594년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평해는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번이 김안로()에게 미움을 받아 1536년 1년간 유배생활을 한 곳으로 부친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유배지에서 이산해는 곽진사, 황응청, 황여일 등 지역의 명망가들과 격의 없이 사귀며 그들과의 친분을 유지해 갔다. [사동기 ()], [해월헌기()] 등의 문학 작품은 이곳에서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3년의 유배 생활 동안 이산해는 딸과 며느리, 막내아들을 잃는 큰 아픔을 겪었다. 개인적인 아픔이 커서인지 평해에서 이산해는 승려들과도 두터운 교분을 유지했다. 옥보상인, 수인, 보인, 지월 등은 이산해와 교유한 대표적인 승려였다. 1595년 유배에서 풀려난 이산해는 정개청, 유몽정 등 기축옥사에 연루된 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호소했다. 기축옥사는 그에게 여전히 정치적 부담으로 남았던 것이다. 그해 말 휴가를 청해 이산해는 고향인 보령으로 돌아왔으나, 선조의 거듭된 요청으로 조정에 돌아왔다.

실용을 중시한 관료학자

이산해의 학문과 사상은 가까이에는 숙부인 이지함, 넓은 범주로 보면 조선 중기 서경덕과 북인의 영향력 아래 형성되었다. 이산해의 저술인 [아계유고 (稿)]를 보면, 840수의 시문과 상소문이 주종을 이룬다. 조선 중기의 학자인데도 일반적으로 문집에 담는 성리 철학이나 이론에 관한 내용은 거의 찾을 수 없는 점이 두드러진다. 이산해가 이처럼 이론 문제에 깊이 매달리지 않은 까닭은 주로 국사를 운영하는 입장에 서서 현실 정치를 실용적으로 운영해 나가는 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이산해는 시폐차()를 통해 당시 경제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둔전(: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설치해 군량에 충당한 토지)과 자염(: 바닷물로 소금을 만드는 것)의 활용을 강조하였다. 그의 상소문을 보자.

“신이 청컨대, 소금을 굽는 대책을 진달()하겠습니다. 소금을 굽는 일은 공력이 그다지 많이 들지 않으나 효과는 가장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1천 이랑의 둔전()이 수백 개의 염조(: 소금을 만드는 솥)만 못합니다. ... 이것이 진실로 재물을 모으는 상책()입니다. 우리나라 해변이 모두 소금 굽는 장소였는데, 태평한 시절에 곡식이 남아서 썩어 나던 시절을 살아온 나머지 다시는 이런 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은 바닥이 나버린 나머지 조그만 재리()를 추구하려고 해도 이렇다 할 대책이 없는데 유독 이 일만을 그냥 두고 거행하지 않은 채 간혹 관원을 파견하여 일을 감독하게 하나 얻는 바는 으레 사소한 정도이니, 소신이 이 점에 대하여 삼가 의혹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반적인 사물은 가격이 비싸더라도 판매하기가 어려우면 이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소금은 산만큼 쌓여 있더라도 팔지 못할까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또 역사()를 할 즈음에 인부를 소집하기 어려운 점, 식량을 잇대기 어려운 점, 수해와 가뭄에 유지하기 어려운 점이 크게 둔전과 같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호서(西)나 해서(西)의 도서()와 정록() 사이에 소금기가 많아서 경작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 비어 있고 땔감이 무성한 곳을 찾아서 곳곳에다 염정()과 염조()를 설치해 두고 또 떠돌면서 빌어먹는 백성들을 모집해다가 둔전()을 경작하게 하고 대오()를 짓게 해서 일시에 일을 추진하게 한다면, 처음 일을 시작한 날에 식량이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니, 어느 누가 기꺼이 따르면서 참여하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아계유고] 권5, <진폐차()>

이산해는 1천 이랑의 둔전이 수백 개의 염조만 못하다고 보면서, 염업이야말로 진실로 재물을 모을 상책이라고 파악하였다. 그가 소금에 대해 적극적으로 인식한 것은 해안적인 기반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산해는 “소금을 굽는 일에 대해서만은 신이 바닷가에서 생장한 탓에 대충 그 요점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 농포()의 지식을 믿고 감히 지리한 말씀을 올린 것입니다”라고 표현할 만큼 자신이 바닷가 출신임을 강조하였다. 그만큼 어릴 때부터 해안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소금의 중요성과 활용에 대해 상당한 식견이 있음을 자부하고 있다. 이어서 “신에게 호서 지방의 소금을 감독하는 칭호를 하사하신다면, 비록 제대로 걷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말을 타고 내려가서 부축을 받고 해도()의 염정()이 있는 사이를 왕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명령만 내리면 염정 개발을 주도할 수 있음을 밝혔다. 이산해의 자염에 의한 국부 증진책은 실용적인 사상에서 기인한 것으로, 다수의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의()와 리()를 대립적인 것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상호보완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말년의 삶

1599년 이산해는 다시 영의정에 복귀하였다가 1600년에 중책에서 벗어났다. 당시 이산해는 권력의 중심에 섰던 홍여순()과 정치적으로 크게 대립했는데, 당쟁사에서는 대북() 내의 이산해와 홍여순의 대립을 북인 내에서 골북()과 육북()의 분당으로 파악하고 있다. 선조 후반 이산해는 정치권의 중심에 있으면서 당쟁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동인과 서인의 분당, 남인과 북인의 분당, 북인 내의 대북과 소북, 골북과 육북의 분당에서, 그의 이름은 늘 동인, 북인, 대북, 골북의 중심에 자리했다.

1600년 이산해는 남양의 구포()에 우거하였다가 잠시 뒤에 신창()의 시전()으로 이사하였다. 이후에는 주로 보령, 남양, 신창, 노량 등지에서 만년의 삶을 즐겼다. 1607년의 연보에서, “공이 경자년(1600)부터 7년 사이에 출세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어서 기교()에 거처하기도 하고 강호에 거처하기도 하였는데, 심부름하는 아이와 말 한 필로 행색이 조촐하였다. 때로 시흥이 일어나 언어로 표현하여, [구포록], [시전록], [노량록]이 문집에 실려 있다”는 기록은 당시의 처세와 생활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까지 지냈지만, 검소한 삶을 지향한 그의 모습은 평생을 가난한 자와 함께 한 숙부 이지함의 모습을 연상하게도 한다. 이 무렵 이산해는 노량에 작은 정자를 세웠다. 조정의 하례 참석 등 서울에 왔을 때 거처할 곳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1608년 2월 선조가 사망하였다. 이산해는 선조 왕릉의 지문(: 죽은 사람의 행적 따위를 적은 글)을 지어 올리는 것으로서 선조와 함께 했던 인연을 마지막까지 이어갔다. 1609년 3월 이후 이산해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8월 23일 장통방() 집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72세 때였다. 충청도 예산현 동쪽 대지동에 그의 무덤이 조성되었으며, 이미 사망한 부인 양주 조씨의 무덤을 보령 관두산에서 옮겨와 부장()하였다. 사위 이덕형은 영의정으로 호상(: 상가 안팎의 일을 지휘하고 관장함)을 맡았다. 막내 사위 안응형은 한산군수로, 외손 이여규는 아산현감으로 장례에 참여한 것에서도 보이듯 한산과 아산 일대를 기반으로 한 이산해 가문의 위상은 후대까지도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