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은 1622년(광해군 14)에서 1673년(현종 14)까지 살았던 조선후기 실학파의 비조(鼻祖: 시조)이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임진왜란에 이어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란이 발발하고 조선 건국 이래 누적되어 오던 여러 가지 모순이 극대화되어 가는 시점이었다. 게다가 삼정1)(三政)의 문란은 농민들의 삶을 파괴하여 노비나 도적으로 전락시키고 있었다. 유형원은 이러한 조선 사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그 폐단을 바로잡고자 노력한 개혁가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국가개혁안의 교과서라 평가받는 [반계수록(磻溪隧錄)]으로 대표되는 그의 개혁사상은 이미 영조대에 인정을 받아 국정 개혁의 지표가 되기도 했으며, 조선 후기 유학자 매천 황현(黃玹, 1855~1910)은 반계 유형원을 가리켜 ‘천하의 재상감’이라 칭송하기도 했다.
- 삼정(三政)
- 조선 후기 국가재정의 근간을 이루었던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을 통칭하는 말. 토지세와 군역의 부과 및 양곡 대여와 환수를 이른다.
역적으로 몰린 부친의 죽음
유형원은 1622년에 아버지 유흠(柳欽, 1596~1623), 어머니 여주 이씨 사이에서 서울 소정릉동(현재의 정릉) 외가에서 태어났다.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이다. 정치적으로는 북인 계열의 남인(南人)이며 서울에 거주하는 정통 양반 가문 출신이다. 그의 집안은 문화 유씨 양반의 정통 구성원으로, 세종대 청백리의 표상인 유관(柳灌, 1484~1545)이 그의 선조이다. [하멜표류기]에 언급되는 제주 목사 이원진(李元鎭, 1594~1665)이 그의 외삼촌인데, 이원진은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당숙이기도 하다. 스승이자 외삼촌인 이원진은 이익이 유형원의 사상을 계승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는 인물이다. 유형원은 18세에 풍산 심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심씨는 대사헌을 지낸 심수경의 증손녀이다.
경화사족(京華士族: 한양에 기거하는 문사권력층) 출신의 유형원이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관직에 나가는 것을 거부한 데는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부친의 참화(慘禍: 비참하고 끔찍한 변고)가 큰 영향을 끼쳤다. 유형원이 두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 유흠은 광해군을 복위하려 한다는 무고를 입어 감옥에서 자결하였다. 유흠은 과거 급제 후 성균관 검열이라는 청요로운 관직을 지낸 인물이었는데 소위 ‘유몽인의 역옥’이라는 사건에 연루되어 역적의 누명을 쓰게 되었다.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은 인조반정 후 은둔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의 복위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발을 받아 처형되었고, 이 사건에 부친인 유흠도 무고하게 연루된 것이었다. 부친의 참화는 유형원이 훗날 과거나 정치에서 멀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아울러 가정사와 함께 14살에 겪은 병자호란은 유형원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유형원은 조부모와 어머니를 모시고 원주로 피난을 갔는데, 어린 나이지만 나라가 약하면 치욕을 당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훗날 국방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청에 대한 복수심으로 하루에 300리를 달리는 기마연습을 하고, 주변 사람들과 활과 조총 연습을 하며 [중흥위략(中興偉略)]이라는 책을 저술하게 된 것도 병자호란을 겪은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부친을 잃은 유형원은 조부 밑에서 성장하며 5살부터 당대 일류의 학자이자 외숙인 이원진과 고모부인 김세렴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그는 어릴 적부터 사물을 탐구하는 데 남달랐다고 하며, 다산 정약용에 따르면, 여덟살에 이미 [서경(書經)]과 [역경(易經)]을 읽는 천재라고 했다(연보에는 6세에 [서경]을 읽었다고 함). 이십대에는 과거 공부를 하는 대신 고모부인 김세렴이 함경감사로 임명되자 그를 따라 함경도, 평안도 등지를 여행하며 백성들의 고통받는 실상을 피부로 느끼고 현실과 실제적인 학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금강산을 비롯하여 금천, 안양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이러한 전국 유람은 향후 학문의 방향성을 잡는데 밑바탕이 되었다. 유형원은 일찍부터 과거 응시에는 뜻이 없어서인지 과거와는 인연이 멀었다. 조부의 염원으로 소과 시험에 응시하여 진사에 합격함으로써 최소한 선비로서 갖춰야 할 기본 자격만 얻었을 뿐이었다. 이후로 벼슬길에 나가는 관문인 문과시험에 한 번 낙방한 뒤로는 과거의 뜻을 완전히 접었다.
부안 우반동의 은둔개혁자
유형원이 학문 연구에 몰두하며 [반계수록]을 집필한 반계서당. 대대로 한양에 터를 잡고 지낸 경화사족이었던 그는 정쟁을 피해 이곳으로 내려와 새로운 세상을 위한 개혁안을 마련했다.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소재. <출처: 실학박물관>
유형원이 서울을 떠나 9대조인 유관의 사패지(賜牌地: 왕이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내린 땅)가 있는 부안현 우반동에 들어온 것은 그가 32세 되던 때였다. 명나라가 멸망한 뒤로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차운하여 세상을 멀리 뜰 생각을 하던 차에 조부가 돌아가시고 상기를 마치자 이를 실천에 옮겼던 것이었다.
정쟁으로 혼란스러운 서울 생활을 접고 바다와 가까우면서 산천이 아름다운 부안군 우반동으로 낙향한 유형원은 초야에 묻혀 만권에 달하는 장서와 함께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우반동에 들어오자 그는 평소 꿈꾸어온 자신의 구상을 실현할 기대에 부풀었다. 그는 곧 우반동 산자락에 ‘반계서당’을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 생활에 몰두했는데, 서재는 수많은 책들로 담장을 이루었고 소나무와 대나무 사이에 위치한 그의 집 사립문은 항상 닫혀있어 낮에도 사슴 무리가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유형원은 이를 낙으로 삼으며 “옛 사람이 이르기를 고요한 후에야 능히 안정이 되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이 참으로 맞는구나”했다 한다.
유형원은 우반동에서 살면서 성리학을 비롯하여 정치ㆍ경제ㆍ역사ㆍ지리ㆍ병법ㆍ문학 등 어느 것 하나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35세에 [여지지(輿地志)]라는 지리서를 저술했고, 이듬해에는 그가 머무는 호남지역을 살피면서 지역마다의 풍토와 물산 등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잠시 우반동을 벗어나 외가가 있는 서울에 가끔 들리면서 39세에는 딸을 시집 보냈고, 40세에는 영남 지역을 답사하며 시간을 보냈다.
유형원이 생각했던 개혁안의 핵심은 토지 문제였다. 소수의 양반들이 전국의 토지를 차지해가는 현실을 보면서 그는 균등한 토지의 소유야말로 국가와 백성이 안정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라 판단했다. 때문에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토지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토지는 골고루 정당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그러면 나라는 저절로 부강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균전론(均田論)과 경자유전(耕者有田)은 토지개혁의 핵심 원칙이었다. 아울러 유형원은 경작 농지를 확보하고 농병일치의 군제, 그리고 균등한 세제와 과거제도의 폐지 등을 주장하며 이상 국가의 건설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마련하였다.
35세에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를 시작으로 [이기총론(理氣總論)] 등 다수의 책을 쓰면서 한편으로 31세에서 49세에 이르는 세월에 걸쳐 저술한 것이 그의 필생의 대작인 [반계수록]이다. 유형원의 국가개혁안이 총망라된 [반계수록]은 그가 일생동안 재야의 사림으로 학문에 전념하면서 내놓은 필생의 역작이었으나, 현실에서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방대한 저술에 몰두한 탓인지 유형원은 [반계수록]을 완성하고 3년이 흐른 1673년(현종 15) 음력 3월 19일에 향년 52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반계수록]의 재조명
반계 유형원이 19년의 세월에 걸쳐 집필한 그의 필생의 역작 [반계수록]. 총 26권에 걸쳐 그의 개혁사상과 이상적 국가 건설안이 담긴 대작이다. [반계수록]은 정약용 등 후기 실학자들은 물론, 소론계의 성리학자 윤증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개혁군주인 영조와 정조에 의해 국정 개혁의 지표가 되었다.
우반동으로 가기 1년 전인 31세부터 집필을 시작한 [반계수록]은 무려 19년의 세월이라는 기나 긴 집필 과정을 거쳐 그의 나이 49세(1670년)에 완성되었다. 1670년에 완성된 [반계수록] 26권은 유형원의 사상과 국가 건설안이 담긴 대작이었으나, 그의 생존 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678년 배상유(裵尙瑜, 1610~1686)가 숙종에게 추천했지만,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새롭게 조명을 받은 것은 실학자들이 활약했던 18세기에 와서였다. [반계수록]은 덕촌 양득중(梁得中, 1665~1742)을 비롯하여 성호 이익과 그의 제자 순암 안정복(安鼎福, 1712~1791)에 의해 비로소 세간에 알려지고 칭송받게 되었다. 양득중은 영조에게 [반계수록]의 간행을 추천하는 상소를 올렸고, 1750년 영조는 이 책의 간행을 허락하였다. 당시 3부가 간행되어 남한산성과 사고에 보관되었는데, 1770년 영조는 다시 경상관찰사에게 이 책의 목판인쇄를 지시했다. 특히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유형원의 개혁안을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다.
“고 처사 증 집의 겸 진선 유형원은 그가 지은 [반계수록보유(磻溪隨錄補遺)]에서 말하기를 ‘수원 도호부(水原都護府)는 광주(廣州)의 아래 지역인 일용면(一用面) 등지를 떼어 보태고 읍치(邑治)를 평야로 옮기면 내를 끼고 지세를 따라 읍성(邑城)을 쌓을 수 있다.’ 하고, ‘읍치의 규모와 평야가 매우 훌륭하여 참으로 큰 번진(藩鎭)의 기상이 있는 지역으로서 안팎으로 만호(萬戶)를 수용할 수 있다.’고 거듭 주장하였다. 또 말하기를 ‘성을 쌓는 부역은 향군(鄕軍)이 번을 드는 대신으로 내는 재물로 충당할 수 있다.’고 하였다. 대체로 그 사람은 실용성있는 학문으로 국가의 경제에 관한 글을 저술하였으니, 기특하도다. 그가 수원의 지형을 논하면서는 읍치를 옮기는 데 대한 계책과 성을 쌓는 데 대한 방략을 백년 전 사람으로서 오늘날의 일을 환히 알았고, 면(面)을 합치고 번을 드는 대신으로 돈을 내게 하는 등의 세세한 절목에 있어서도 모두 마치 병부(兵符)를 맞추듯이 착착 들어맞았다. 그의 글을 직접 읽고 그의 말을 직접 썼더라도 대단한 감회가 있다고 할 터인데, 그의 글을 보지 못했는데도 본 것과 같고 그의 말을 듣지 못했는데도 이미 쓰고 있으니, 나에게 있어서는 아침 저녁으로 만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836)은 정조의 명으로 수원성을 축성하면서 유형원의 축성 이론을 적용하기도 했다. 결국 유형원의 실학사상은 성호 이익을 거쳐 순암 안정복, 다산 정약용 등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한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의 개혁방안으로 이어지는데, 그가 실학의 비조로 평가되는 것도 이러한 학문적 계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농촌 생활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조선사회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한 그의 학문적 영역은 정치ㆍ경제ㆍ역사ㆍ지리ㆍ국방ㆍ언어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범위를 자랑했다.
유형원과 동시대를 살았던 소론계의 대학자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은 호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반계수록]을 읽게 되었다고 하고, “그가 지닌 학문의 정밀함과 뜻과 도량의 원대함은 후세의 말 잘하는 선비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고 토로했다. 결국 영조대에 [반계수록]이 출판될 수 있었던 것은 스승 윤증으로부터 유형원의 책을 빌려 읽은 제자 양득중이 영조에게 간행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실학자 안정복은 남대문 밖 도저동(桃楮洞, 현재 후암동 부근)에서 유형원의 증손인 유발(柳發, 1683~1775)을 만나게 되었다. 안정복은 유발로부터 [반계수록]을 빌려 읽게 되었다. 유형원을 흠모한 안정복은 [반계수록]을 읽은 뒤 “참으로 천리(天理)를 운용하여 만세를 위해 태평을 얻어주는 책이 아닐수 없다”고 평가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안정복은 1776년(영조 52)에 <반계선생연보>를 편찬하였다. [반계수록]에 포함된 개혁방안은 19세기에도 이어져 대원군을 포함한 경세가들의 정책에 많이 반영되었다.
오랜 인습 속에 쌓여 온 조선후기 지배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새로운 경세론을 펼친 그의 국가개혁론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 보려는 실천적인 변법론이라는 역사적 평가와 함께 1980년 이우성 교수에 의해 [반계잡고(磻溪雜考)]라는 새로운 자료가 공개되면서 조선후기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이 성리학과 사상적으로 연관되어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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