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는 우리 고유의 화풍(畵風)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의 산천이 아닌 조선의 산천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다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진경시대란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조선 고유의 진경문화를 이루어 낸 시기로, 정선이 활동한 영조대는 진경시대 중 최고의 전성기였다.
진경산수화의 중심, 겸재 정선
정선의 본관은 광주(光州)로, 선대는 경기도 광주(廣州) 일대에서 세거(世居: 한 고장에 대대로 삶)하다가 고조부 연(演) 때부터 도성의 서쪽, 즉 인왕산 기슭에 터전을 잡았다. 정선은 1676년 아버지 시익(時翊)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幽蘭洞)에서 태어났다. 현재 종로구 청운동 89번지 경복고등학교가 위치한 북악산 서남쪽 기슭 인근이었다. 19세기 유본예(柳本藝)가 쓴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유란동은 북악산 밑에 있다. 언덕 바위에 〈유란동〉이라는 석 자를 새겼다. 이 동네는 청송 성수침(成守琛)이 살던 곳으로 꽃구경을 하기 좋은 곳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선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인왕제색도>와 같이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 많은 것은 그의 근거지가 바로 인왕산 일대였기 때문이었다.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인 김홍도(金弘道, 1745~?)나 신윤복(申潤福, 1758~?)이 화원 출신이었던 반면에, 정선은 가난한 양반 가문의 맏아들이었다. 그는 열 살을 지날 무렵부터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일하러 가는 형편이었으나, 그림에 대한 재능과 열정만은 잊지 않았다.
정선은 유란동에 살면서 인근에 살던 안동 김씨 명문가인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창업(金昌業)의 문하에 드나들었고, 이들에게서 성리학과 시문을 수업 받으며 이들 집안과 깊은 인연을 쌓아갔다. 안동 김문의 인사들은 그를 후원했고, 정선은 감사의 뜻으로 안동 김문(金門)의 주거지인 <청풍계(淸風溪)>를 여러 번 그렸다. 현재에도 청풍계가 위치했던 곳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청운초등학교 건너편 어느 주택 안 담벼락에 남아있는 이 글씨에서 청풍계의 옛 자취를 느껴볼 수가 있다. 정선은 안동 김문의 후원과 더불어 국왕인 영조(英祖, 1694~1776)의 총애를 받았다. 영조는 정선보다 18년 연하였지만, 83세까지 장수하면서 정선과 60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 했다. 정선은 40대 이후에 관직에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1721년(경종 1) 46세 때 경상도 하양(河陽)의 현감을 맡아서, 5년간 근무한 후 1726년(영조 2) 임기를 마쳤다. 이때의 작품으로는 성주 관아의 정자를 그린 <쌍도정도(雙島亭圖)>가 전한다. 1727년 정선은 북악산 서쪽의 유란동 집을 작은 아들에게 물려주고, 인왕산 동쪽 기슭인 인왕곡으로 이사를 했다. 정선은 84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으며, 그의 대표작인 <인곡유거(仁谷幽居)>는 이곳에서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자화상처럼 그린 그림이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작품이자 정선이 남긴 400여 점의 그림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왕제색도>. 1751(영조 27)년에 그린 것으로 비 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왕산의 순간을 포착하여 느낌을 잘 표현하였다. 정선의 그림 가운데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 것이많은이유는 그의 근거지가 인왕산 일대였기 때문이었다. 138.2 x 79.2cm , 국보 제 216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예술에 상당한 조예를 지니고 있었던 영조는 정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꼭 호로만 부를 정도로 그 재능을 아끼고 존중했다. 이것은 영조대에 정선이 여러 관직을 지낸 것에서도 나타난다. 1729년 정선은 영조의 부름을 받아 한성부 주부가 되고, 1733년 6월에는 청하현감에 임명되었다. 청하현감 시절 그림으로는 <청하성음도>, <내연산삼용추(內延山三龍湫)> 등이 있다. 1740년경에는 훈련도감 낭청(郎廳)을 지냈으며, 1740년 12월부터 1745년 1월까지는 경기도 양천의 현령을 지냈다. 정선은 65세부터 70세까지 현재는 서울에 편입된 경기도의 양천현령을 지내면서 서울 근교의 명승들과 한강변의 풍경들을 화폭에 담았다. 이후 10여 년 동안은 관직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금강전도(金剛全圖)>, <인왕제색도> 등의 명작을 남겼다. 79세인 1754년에 종4품인 사도시첨정(司寺僉正)을 거쳐 1756년에는 종2품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까지 올랐으니 관운도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정선이 그린 300년 전 서울 풍경들
정선이 그린 그림 중에는 18세기 한양과 그 주변 풍경을 담은 작품들이 돋보인다. 인왕산에 있던 자신의 집을 배경으로 한 <인곡유거(仁谷幽居)>와 이곳에서 쉬고 있는 정선 자신의 모습을 그린 <독서여가(讀書餘暇)>를 비롯하여, <백악산(白岳山)>, <대은암(大隱巖)>, <청송당(聽松堂)>, <자하동(紫霞洞)>, <창의문(彰義門)>, <백운동(白雲洞)>, <필운대(弼雲臺)>, <경복궁(景福宮)>, <동소문(東小門)>, <세검정(洗劍亭)> 등은 300년 전 서울의 풍경화 그 자체이다. <청송당>의 그림에 그려진 큰 바위는 현재 경기상고 안에 그대로 남겨져 있고, <필운대>의 그림과 배화여고 건물 뒷 편에 위치한 현재 필운대의 모습을 비교하면 정선의 그림이 진경산수화임을 실감하게 된다. 특히 최근에 인왕산에 위치했던 아파트가 철거되고 이 지역을 원형으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정선의 그림에 그려진 <수성동(水聲洞)>의 계곡과 다리의 모습이 원형대로 남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인왕산 일대의 모습을 사실대로 묘사한 <수성동(水聲洞)>, 제작연도 미상, 33.7 x 29.5cm,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
한강 일대의 운치를 느낄 수 있는 <행호관어(杏湖觀漁)>, 제작연도 미상, 23 x 29.2cm,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
제목 그대로 서울과 주변의 명승을 담은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는 한강을 중심으로 한 한양의 주변 지역의 모습이 담겨 있다. 양수리 부근에서 한양으로 들어와 행주산성까지 이르는 한강과 주변의 명승지가 25폭의 그림으로 형상화되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림을 그린 배경도 흥미롭다. 65세인 1740년 정선은 양천현령으로 부임했다. 이때 정선을 찾아온 벗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1671~1751)이 이별하면서 이런 제안을 하였다. ‘자신이 시를 지어 보내면 자네의 그림과 바꾸어서 보자고’. 이 제안은 1741년 [경교명승첩] 상하 2첩 25폭으로 완성을 보았다. 이 화첩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컸던지 정선은 “천금을 준다고 해도 남에게 전하지 말라(千金勿傳)”는 인장(印章)까지 남겨 두었다.
[경교명승첩]은 한강 상류의 절경을 담은 <녹운탄 綠雲灘>과 <독백탄 獨栢灘>에서 시작한다. ‘탄(灘)’은 ‘여울’이란 뜻으로, 현재의 양수리 부근으로 추정된다. 한강 상류에서 시작한 그림은 현재의 서울 중심으로 향한다. <압구정(狎鷗亭)>은 조선초기 세도가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별장 주변을 담은 그림이다. 그림의 중앙부 우뚝 솟은 바위 위에 별장이 위치하고, 백사장이 길게 뻗어 나온 모습이나 돛단배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은 최고급 아파트가 들어선 현재와는 너무나 다른 평화로운 풍경들이다. <광진(廣津)>과 <송파진(松坡津)>, <동작진(銅雀津)>의 그림들은 18세기에 이 지역이 포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작진>에는 18척의 많은 배가 그림에 등장하며, 바다와 강을 왕래하는 쌍돛대를 단 배도 등장하고 있다. 물화(物貨)의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한강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행호관어(杏湖觀漁)>에는 고깃배가 등장하는 점이 흥미롭다. ‘행호’는 지금의 행주산성 앞 한강으로 이 일대에 많은 고기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한강의 명물이었던 웅어(멸치과의 바닷물고기로 남서해로 흘러드는 강어귀에서 많이 잡힘)는 바닷물과 민물이 합류하는 곳에 살았으며, 그 맛이 뛰어나 왕에게 진상하는 물품으로 사용되었다. <행호관어>에는 웅어가 뛰어놀았던 한강의 운치가 느껴진다. 남산의 풍광을 그린 <목멱조돈(木覓朝暾)>은 이병연이 보내온 ‘새벽 빛 한강에 떠오르니, 언덕들 낚싯배에 가린다.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첫 햇살 남산에 떠오른다.’는 시에 맞추어 남산에 떠오른 일출의 장관을 그린 것이다. 이병연과 정선이 약속한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시와 그림을 맞바꾸며 감상함)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화폭에 담은 금강산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 가운데 최고로 평가되는 <금강전도(金剛全圖)>. 항공촬영을 하듯 위에서 금강산 1만 2천 봉우리를 장대하게 담아낸 걸작이다. 1734(영조 10)년 제작, 94.5 x 130.8cm , 국보 제 217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인왕산과 한강 일대 등 서울 주변의 모습을 담은 그림과 함께 정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그림은 바로 금강산 그림이다. 정선이 40대 이후 출사한 것은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에 나타나지만, 청년기의 삶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정선의 30대 행적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두 차례에 걸친 금강산 여행이다. 그는 1711년 36세 되던 해에 처음 금강산을 다녀왔고, 이듬해에도 금강산을 다녀왔다. 1711년 8월의 여행은 평소 그를 후원했던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 제자들을 데리고 떠나는 금강산행에 동행한 것이었는데, 정선의 절친한 벗이엇던 이병연이 금화현감으로 있으면서 이들을 맞아주기도 했다. 금강산을 다녀온 후 정선은 13폭의 그림을 남겼다.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으로 전해지고 있는 이 그림에는, <금강산내총도>, <단발령망금강>, <장안사>, <불정대>, <벽하담>, <백천동장>, <옹천>, <고성문암관일출>, <해산정>, <총석정>, <삼일포>, <시중대> 등 금강산의 명소들이 그려져 있다.
금강산을 다녀온 후 꼭 1년만인 1712년 8월, 정선은 다시 금강산 유람에 나섰다. 금화현감으로 있던 벗 이병연의 부친과 동생, 후배 시인 장응도가 동행을 했다. 후원자이자 스승과 함께 했던 1차 금강산행과는 달리 조금은 편안한 기분에서 정선은 금강산을 다녀왔고, 총 30폭의 그림인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으로 당시의 감흥을 남겼다. 이 그림에는 금강산 초입의 <금성 피금정>에서 시작하여, <단발령망금강>, <정양사> 등 내금강 그림들과, <불정대 망십이폭>, <백천교 출산도> 등 외금강 그림, <삼일포도>, <옹천도>, <총석정도> 등 해금강 그림,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들른 철원의 삼부연과 곡운의 농수정을 그린 <철원 삼부연도>, <곡운 농수정도> 등으로 구성되었다. 삼부연과 농수정은 각각 김창흡과 김수증의 연고지로서, 정선은 자신을 후원한 안동 김문에 대해 최대의 성의를 보낸 것이었다.
1712년에 그린 [해악전신첩]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당시에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정선이 진경산수 화가로 명성을 쌓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정선은 청하현감으로 재임하던 시절인 1734년 최고의 금강산 그림을 남겼다. 현재 삼성 리움미술관에 소장된 <금강전도(金剛全圖)>가 그것이다. <금강전도>는 마치 항공 촬영을 하듯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으로 금강산 1만 2천봉을 장대하게 담아냈다. 1747년 72세의 정선은 다시 금강산 그림을 그렸다. 이것이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정묘년 해악전신첩]이다. 이외에도 정선은 부채에 그린 <정양사도>와 <금강전도>를 비롯하여, <만폭동도>, <비로봉도> 등 금강산을 소재로 한 명품들을 남겼다. 36세에 처음 실물을 접하고, 84세로 사망할 때까지 금강산은 늘 정선의 가슴속에 자리하였고, 정선은 다양한 필치로 금강산을 화폭에 담아 금강산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겸재의 유산(遺産)
화가로서의 겸재 정선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독서여가(讀書餘暇)>. 제작연도 미상, 17 x 24.1cm,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작품 보러가기
정선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대표적인 그림으로는 <독서여가(讀書餘暇)>가 있다. 이 그림은 툇마루에 나와 앉아 화분에 핀 모란을 감상하는 선비의 모습을 그렸는데, 자신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방안에는 책이 가득하여 정선의 독서벽을 알 수 있으며, 특히 그림으로나마 정선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작은 즐거움이다. 정선은 76세 되던 해인 1751년 비안개가 걷힌 후에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 인왕산 모습을 최고의 필치로 그린 <인왕제색도>를 남겼고, 80세 이상 장수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붓끝에서는 18세기 조선의 풍경이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생생한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거의 모든 집에서 그의 그림을 소장할 만큼 화가 정선의 위상이 높아졌다. <인왕제색도>나 <금강전도>와 같이 우람하고 힘찬 산수화는 물론이고, 섬세한 붓 터치가 돋보이는 초충도(草蟲圖)에 이르기까지 정선은 회화의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였다.
정선의 작품은 뛰어난 필치와 사실적인 묘사로 당시의 풍경들을 손에 잡힐 듯하게 한다. 정선이 살았던 인왕산과 북악산 주변의 그림들과, 배를 타고 가면서 그린 한강 교외의 그림들은 300년전 서울과 그 주변의 모습들을 생생히 복원시키고 있다. 진경산수화의 백미 정선의 그림들과 함께 600년 고도 서울과 한강의 자취를 찾아가는 여행을 떠나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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