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승려는 어떤 경계인(境界人)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는 상당한 수준의 지식인이었고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유구한 전통과 영향력을 가진 종교인이었지만, 조선시대에 유교가 국시(國是)로 채택되면서 그런 지위는 팔천(八賤: 조선시대에 천역에 종사하던 천민으로 사노비, 승려, 백정, 무당, 광대, 상여꾼, 기생, 공장(工匠) 등이 해당됨)의 하나로 불릴 만큼 급락했다. 고려시대에 승려는 종교의 영역을 넘어 정치ㆍ경제 분야에서도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조선시대에는 몇 개의 예외적 사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크게 위축된 입지에 머물렀다.
그런 예외적 사례의 대표적인 경우는 전란과 관련된 것이었다. 모든 국민이 동원되는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승려도 예외가 아니었고, 그때마다 승려들은 방대하고 전국적인 조직과 일치된 행동으로 뛰어난 전과를 올렸다.
전란의 규모가 클수록 그런 의병들이 많이 배출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 1544~1610)은 그의 스승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 1520~1604)과 함께 임진왜란에서 가장 혁혁한 공훈을 세운 승병장이었다.
출가와 구도
사명당대장진영(四溟堂大將 眞影). 사명당의 진영은 현재 10여 점이 전해지는데, 이것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좌측 하단에 ‘가경원년병진(嘉慶元年丙辰, 1796년, 정조 20)’이라고 씌어 있어 그려진 시기를 알 수 있다. 가로 78.8센티미터, 세로 122.9센티미터. 보물 제1505호. 대구 동화사 소장.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사명당의 속명은 임응규(任應奎)로 본관은 풍천이고 자는 이환(離幻)이다. 사명당은 그의 법호이고, 널리 알려진 또 다른 이름인 유정은 그의 법명이다. 경상남도 밀양 출신으로 아버지는 임수성(任守成)이다.
사명당은 14세에 어머니를 여의고(1558년, 명종 13) 이듬해에 아버지까지 돌아가자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신묵(信默)의 제자로 출가했다. 그 뒤의 외교적 활약과 성과가 잘 보여주듯이, 사명당은 뛰어난 지력(知力)을 갖고 있었다. 그는 출가한 지 3년 만에 승과에 급제했고, 수준 높은 지식을 바탕으로 여러 유생과 교유했다. 유생과 승려는 상극의 사이 같지만, 조선후기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과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의 교유가 보여주듯, 학문과 인격에서 깊이 사귀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사명당이 친교를 맺은 대표적인 인물은 박순(朴淳, 1523~1589)ㆍ임제(林悌, 1549~1587)ㆍ노수신(盧守愼, 1515~1590) 등이었는데, 모두 당대의 뛰어난 인물이었다. 박순과 노수신은 모두 영의정까지 오른 고관이었고, 임제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시인이었다. 나이로 판단할 때 박순ㆍ노수신과는 사제 관계에 가까웠고, 임제와는 친구 사이였을 것이다. 실제로 사명당은 노수신에게서 [노자]ㆍ[장자]ㆍ[열자] 등 제자백가서와 시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승려로서 그의 본분은 구도(求道)였다. 그는 직지사의 주지를 지낸 뒤 1575년(선조 8) 선종의 으뜸 사찰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지만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로 스승 휴정을 찾아가 수도했다. 사명당은 3년 뒤부터 팔공산ㆍ금강산ㆍ청량산ㆍ태백산 등 전국의 주요 명산을 돌아다니며 구도한 끝에 1586년(선조 19) 충청북도 옥천산(沃川山) 상동암(上東庵)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속세의 나이로 42세 때였고, 출가한 지 27년만의 일이었다.
임진왜란에서의 활약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사명당은 48세였다. 그때 그는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있었는데, 근처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했다. 승병장으로서 본격적인 활약은 그 뒤에 시작되었다. 사명당은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평양 근처의 순안(順安)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했다.
그는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승병 2천 명을 이끌고 평양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한 뒤 1593년 1월 평양 전투에 참전해 큰 공로를 세웠다. 그 전투는 명군(明軍)과 연합해 평양을 탈환함으로써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계기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뒤 성호 이익(李瀷, 1681~ 1763)은 이 전투에서 명의 장소 이여송(李如松)이 병법을 몰라 퇴각하는 왜병을 뒤쫓아 섬멸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고 비판하면서 " 이 때 우리나라가 쇠잔했지만, 그래도 군사가 많았고 유정(惟政)이 거느린 승군이 참전해 기이한 작전을 많이 썼으니 이여송을 기다릴 필요가 있었겠는가"라고 지적했다([성호사설] 제11권 인사문(人事門) 이제독부지병(李提督不知兵)). 이런 평가는 사명당의 뛰어난 지휘능력과 승군의 강한 전력을 잘 보여준다.
사명당은 두 달 뒤에도 서울 근교의 노원평(蘆原坪) 전투에서큰 전과를 올렸다. 노원평 전투는 1593년 3월 25일부터 사흘동안 치러진 격전이었는데, 사명당은 양주목사 고언백(高彦伯) 등 관군과 연합해 3천 명의 병력으로 왜군을 맞았다.
한달 전 행주산성에서 대패한 왜군 5만 명은 한양에 집결한 뒤 식량과 보급품을 조달하기 위해 양주로 군사 일부를 보냈는데, 사명당은 매복 작전으로 그들을 섬멸한 것이었다. 이 노원평 전투는 왜군을 한양에서 물러나게 만든 중요한 계기로 평가된다. 이 공로로 사명당은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제수되었다. 한양을 수복한 뒤 사명당은 영남 지방으로 이동해 전투와 축성(築城), 군량미 조달에 계속 참여했다.
임진왜란에서 사명당의 활약은 군사적 부분에만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좀 더 중요한 성과는 외교에서 거뒀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사명당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일본과의 강화(講和) 회담에 나아가 의견을 조율했다(제1차: 1594년 4월 13∼16일, 제2차: 1594년 7월 12∼16일, 제3차: 1594년 12월 23일, 제4차: 1597년 3월 18일).
널리 알려졌듯이, 5개 항에 걸친 일본의 강화 조건은 매우 황당한 것이었다(명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고 감합무역(勘合貿易: 감합은 입국을 확인하는 행위로 당시 조선과 명이 일본ㆍ여진과 시행한 무역의 일반적인 형태를 말한다)을 재개하며,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하고 조선 왕자 및 대신 12인을 인질로 삼을 것 등). 사명당은 이런 조건의 비현실성과 불합리성을 논리적으로 지적했다.
1604년(선조 37)에는 일본에 파견되어 협상 끝에 이듬해 4월 왜란으로 일본에 끌려갔던 3천여 명의 백성을 데리고 귀국하는 중요한 성과를 올렸다. 이런 공로로 사명당은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에 임명되었다.
입적과 그 뒤의 영향
표충비는 1738년(영조 14) 사명당의 제자인 남붕조사(南鵬祖師)가 세운 비석이다.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고 있는 비로, 일명 ‘사명대사비’라고도 불린다. 국가에 큰 어려움이나 전쟁 등의 불안한 징조가 보일 때에 비에서 땀이 흐른다 하여 ‘땀 흘리는 표충비’로도 잘 알려져 있다.
대리석으로 전체 높이는 4미터고, 탑신 높이는 270센티미터다. 앞면에는 사명당의 행장인 <송설대사비명(松雪大師碑銘)>이, 뒷면에는 스승 서산대사의 행장인 <서산청허당휴정대사비명(西山淸虛堂休靜大師碑銘)>이 새겨져 있다. 표충사에서 동쪽으로 약 4킬로미터 떨어진 경상남도 밀양시 부안면 무안리에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5호.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사명당은 그 뒤 병으로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광해군 2) 8월 26일 설법을 마친 뒤 가부좌를 틀고 입적했다. 세속 66세, 법랍 51세였다. 종교적 성취와 세속적 인정을 모두 충족시킨 영광스러운 생애였다고 평가할 만하다.
사명당의 이런 군사적ㆍ외교적 활약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민간설화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뒤 ‘사명당 설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이야기의 내용은 대체로 사명당이 일본에 가서 신이한 행적으로 왜왕을 굴복시켰다는 것이다. 예컨대 왜왕이 사명당을 큰 무쇠 방에 들여보내고 불을 땠지만, 사명당이 ‘빙(氷)’자를 천정에 써 붙이고 도술을 부려 방문을 열자 수염과 눈썹에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는 것 등이다.
사명당을 기리는 대표적인 사찰은 그의 고향인 밀양에 세워진 표충사(表忠寺)다. 그 사찰의 이름은 사명당의 가장 대표적 면모인 국가에 대한 충성을 표상하고 있다. 그리고 국난이 있을 때면 땀을 흘린다는 ‘표충비’도 유명하다.
승려로는 드물게 [사명당 대사집](7권 1책)이라는 문집을 남긴 것도 특기할 만하다. 1612년(광해군 4) 제자 혜구(惠球)가 간행한 그 문집에는 허균(許筠, 1569~1618)이 서문을 썼으며, 다양한 시(254수)와 상소, 게송(偈頌: 불교적 교리를 담은 한시) 등이 실려 있다.
종교가 지나치게 현실에 개입하거나 민감하게 반응하면 부정적인 측면이 더 클 것이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급박한 위기상황에서도 그런 태도를 고수하는 것도 적절치는 않을 것이다. 사명당은 종교인의 자세를 견지하면서도 필요하고 적절한 현실적 참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어떤 전범을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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