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새로운 상품시장을 개척한 신라의 귀족상인 - 김태렴

히메스타 2016. 10. 26. 14:25

 

 

김태렴 이미지 1

752년 일본 귀족들 사이에서는 신라의 물건을 구입하려는 열풍이 불었다. 그들은 저마다 구입하고자 하는 물건들의 이름과 수량을 문서로적어 일본 관청을 통해 신라인 김태렴에게 전달하였다. 그는 가져온 물건을 죄다 팔아치우고 유유히 일본을 떠났다. 신라의 왕자, 혹은 사신, 혹은 장사꾼으로 알려져 정체가 묘연한 김태렴(, ?~? ), 그는 누구인가?

일본에서 환영받은 신라인

큐슈 섬 북부에 위치한 다자이후()는 일본이 한반도와 교류했던 관문으로 예로부터 중요시 되었던 곳이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7김태렴 일행은 752년 이곳에 도착했다.

697년부터 791년까지의 일본 역사를 기록한 [속일본기()]에는 752년 윤 3월 22일에 북큐슈에 위치한 다자이후()에 신라 사람들이 도착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다자이후에서 신라 왕자 한아찬() 김태렴과 조(調)를 바치는 사신 대사(使) 김훤(), 왕자를 호송하는 김필언() 등 700여 명이 일곱 척의 배를 타고 와서 머물고 있음을 알렸다.”

8세기 중엽, 신라와 일본의 외교관계는 매우 험악한 상태였다. 732년 이후 4차례에 걸쳐 신라 사신이 일본을 방문했지만, 일본에서는 신라 사신을 일본의 관문인 다자이후에서 되돌려 보내기를 거듭했었다. 그런데 김태렴 일행에 대해서는 수도인 나라() 방문을 허락했다. 신라 사신의 규모는 대개 200명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무려 700명이 넘었다. 김태렴은 이들 가운데 절반 정도를 다자이후에 내려놓고, 6월 14일 370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고켄천황(: 재위 749~758)을 만났다.

김태렴은 고켄천황을 만나 특산물(調)을 바치는 자리에서 놀라운 발언을 하였다.

“신라국왕은 일본을 통치하는 천황의 조정에 말씀드립니다. 신라국은 예부터 대대로 끊이지 않고 배와 노를 나란히 하여 가서 일본을 받들었습니다. 이번에 국왕이 몸소 가서 조공하고 특산물을 바치려고 하였으나, 생각해보니 하루라도 임금이 없으면 국정이 해이해지고 문란해질까 염려됩니다. 이 때문에 왕을 대신하여 왕자 한아찬 태렴을 우두머리로 하여 370여 인을 거느리고 가서 입조(:외국 사신이 조정의 회의에 참여함)하게 하고 겸하여 여러 가지 특산물을 바치고 삼가 아뢰게 합니다.”

당시 일본은 소제국을 꿈꾸었지만, 주변의 신라와 발해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두 나라에게 일본은 상품을 판매할 시장이자, 상대국을 견제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였다. 일본의 힘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제국의 위상을 과시한 당나라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으며, 따라서 지나치게 존중해줄 이유가 없었다. 특히 신라와 일본은 외교상의 예의를 두고 심하게 다투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신라 왕자라고 하는 김태렴이 와서 스스로 일본의 조공국이라고 말하자, 일본 천황은 너무도 기뻐 이렇게 말했다.

“신라국은 예부터 늘 끊이지 않고 우리를 받들어 왔다. 이제 왕자 태렴을 보내어 입조하고 겸하여 특산물을 바치니 왕의 정성에 짐이 기쁠 뿐이다. 지금부터 오래도록 마땅히 위로하고 보살피겠다.”

천황에게 아부하고 융숭한 대접을 받다

그러자 김태렴이 다시금 아부를 했다.

“하늘이 두루 덮고 있는 밑에 왕토() 아님이 없고, 육지가 연속해 있는 한()의 바닷가까지 왕의 신하 아님이 없습니다. 태렴은 다행히 성스러운 시대를 만나 조정에 와서 받드니 기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제가 몸소 갖추어온 국토의 미미한 물건을 삼가 바칩니다().”

김태렴은 이번에는 아예 고켄천황을 지상을 다스리는 최고의 존재로, 당나라 황제와 버금갈 만큼 존중해 주었다. 그러자 고켄천황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켄천황은 독신의 여성으로서 남동생을 제치고 임금이 된 터라, 권력 기반이 취약했다. 당시의 실권은 후지와라씨() 가문이 장악하고 있었다. 권력이 불안한 천황에게 대외적인 체면은 매우 중요했다. 고켄천황은 자신의 체면을 살려준 김태렴을 위해 최대한의 보답을 해주었다. 3일 후 고켄천황은 김태렴 일행을 위해 조당(: 조정)에서 큰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또한 코켄천황은 김태렴을 만난 다음날인 6월 15일부터 7월 8일까지 김태렴이 가져온 물건을 구입하기를 희망하는 5위 관등 이상 고급 귀족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의 품목, 수량, 가격 등을 기록하여 외국과의 교역을 담당하는 관청에 문서로 제출하게 했다. 이 문서가 <매신라물해()>다. 김태렴은 스스로 일본의 신하를 자처했기 때문에, 그의 일행이 일본에 머무는 동안의 비용은 그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일본 정부에서 짊어져야만 했다. 김태렴은 6월 22일 일본의 도다이지() 등을 방문해 예불을 올리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김태렴은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 하에 가져간 물건을 다 팔아치우고, 7월 24일 귀국하고자 했다. 그러자 일본 천황은 나니와관(: 오사카에 있는 외국 사신이 머무는 숙소)에 머물고 있던 김태렴에게 사신을 보내어 명주와 베, 술과 안주를 보내주기도 했다. 김태렴 일행은 일본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은 물론 경제적인 이득도 최대한 얻을 수 있었다.

사신인가 장사꾼인가?

김태렴은 자신이 신라의 왕자이며 외교사신이라고 하였지만,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우선 그는 외교사절이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직접 서명한 문서를 가져오지 않았다. 오직 말로만 일본 천황을 칭송해주었던 것이다. 이 점이 의심스러웠던 고켄천황은 6월 17일 열린 연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짐은 김태령의 정성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는 바, 관위()을 올려주고 물건을 내린다. 지금 이후로는 신라 국왕이 직접 와서 아뢰도록 하고, 만약 다른 사람을 보내어 입조할 때에는 반드시 표문(: 외교문서)을 가지고 오도록 하라.”

사신이 외국에 갈 때 상인이 사신단을 따라가서 공무역을 하는 것은 과거 국제무역의 관례였다. 사절단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외교적 업무를 수행할 사람은 정해져 있는 법이다. 따라서 나머지는 상인들이 차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김태렴 일행은 이전까지 200명 남짓했던 신라 사신단에 비해 그 규모가 월등히 크다. 그만큼 그를 따라간 상인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그에게는 외교가 아닌 교역이 훨씬 중요한 문제였다.

김태렴이 일본에 판 물건

김태렴의 물건을 사기 위해 일본 귀족들이 작성한 <매신라물해()>는 도다이지() 쇼소인()에서 6폭의 토리게리츠쵸 병풍()의 다섯 번째 그림 배면지에 사용된 것을 1912년 병풍 수리 과정에서 발견한 이후, 지금까지 약 30종이 발견된 바 있다. 매신라물해는 당시 일본 귀족들이 구입하기를 원했던 신라의 물품을 알 수 있는 동시에, 김태렴이 일본에서 어떤 물건을 팔았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나라현 도다이지() 북서쪽에 위치한 창고인 쇼소인()은 일본의 왕실창고로 다수의 일본 전통공예품 및 한국과 중국의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김태렴에게 구입한 신라 물품 또한 다수 보관되어 있으며, 199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출처: (cc) Moja at ko.wikipedia.org>

매신라물해에 따르면, 일본 귀족들은 사향, 침향, 용뇌향 등의 향료()와, 인삼, 감초, 가리륵, 육종용, 필발, 지초 등의 약재(), 동황, 연자, 주사, 호분 등의 안료(), 소방, 자근 등의 염료(), 각종 불교 용품, 거울, 가위, 소반, 젓가락 등의 식기류, 마구, 양탄자, 비단, 비단 담요, 잣, 꿀, 책, 병풍, 향로, 화로, 물병, 황금 등 122종의 신라 물건을 구입하고, 실() 아니면 솜(綿), 실크()로 값을 지불했다.

일본 정부는 김태렴과 일본귀족의 물품 거래 전반을 관리했다. 이는 귀족들 사이에서의 사적인 교역을 막고, 일본 왕실이나 정부 수요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고려하면, 귀족들이 구입한 물건보다 일본 정부나 왕실에서 매입한 물건의 양이 많았을 것이 분명하다.

김태렴은 신라에서 생산한 염료, 생활용품, 기물, 문화용품, 약제류 외에도 침향, 용뇌향, 가리륵, 육종용, 호분, 필발, 연자 등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 중국에서 생산된 고가의 향료 등을 중개해서 팔기도 했다.

일본 왕실의 유물 창고인 도다이지() 쇼소인()에는 752년 일본이 구입한 신라 물건이 많이 보관되어 있고, 이들 가운데 첩포기()라 불리는 꼬리표가 붙어있는 것이 있다. 화전(: 꽃문양이 있는 양탄자)과 색전(: 자주색 장방형의 양탄자)에 붙은 첩포기에 쓰인 행권한사(), 자초낭댁()은 일본 교역에 참여한 신라 진골귀족 집안의 이름()으로 볼 수 있다.

김태렴은 신라의 왕자였을까?

[속일본기]는 김태렴이 신라의 왕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절단으로 위장한 귀족 상인집단의 수장이었을 뿐이다. 그들이 일본에 가져온 물건은 진상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시장에 내다팔기 위한 물건이었다. 그는 신라 정부의 공식적인 표문을 지니지 않았고, 장사를 하기 위해 일본의 환심을 사려고 고겐천황에게 아부를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태렴은 [삼국사기] 등의 우리쪽 역사자료에는 전혀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 언제 태어났는지도 알 수 없다. 그는 진골 출신이지만, 최소한 당시 신라 경문왕의 아들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는 왕의 먼 친척뻘임에도 왕자라고 대충 얼버무리며 일본에서 자신의 위상을 과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일본의 관계를 악화시키다

그가 일본을 방문한 다음 해인 753년 1월, 당() 조정의 신년 축하의식에서 신라사신과 일본사신은 자리 문제로 다투었다. 신라가 일본보다 높은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 일본이 반발한 것이었다. 일본은 김태렴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으나, 그것은 신라의 입장이 아니었다. 2월에는 신라에 온 일본 사신을 신라 정부에서 무례하다는 이유로 돌려보냈다. 일본 정부는 김태렴이 한 말이 장사를 위해 아부한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일본은 신라에 분노했고, 그 결과 758년 발해의 신라 공격 계획에 가담하기로 했다. 759년 일본은 배 500척을 만들어 신라를 정벌하려고 준비를 하였으나, 신라 공격이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일본이 이와 같은 행동에 나서자, 신라는 760년 9월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일본은 김태렴이 약속했던 예의, 조공품, 믿을 만한 사람, 그리고 분명한 말 4가지를 갖추어 오라면서 사신의 방문을 거절했다. 김태렴에게 한번 속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외교관계는 복잡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신라는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 676년까지 당나라와 전쟁을 했다. 당나라와 전쟁을 치르면서, 신라는 일본과 당이 돈독하게 연결될 것을 우려해 진골 왕족이나 고위인사를 사절단으로 파견하는 등 일본을 우대해주었다. 하지만 차츰 당나라와의 관계가 호전되던 차에, 733년 발해와 당의 전쟁에서 당나라에 원군을 보내주었다. 이에 따라 당나라는 대동강 남쪽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었고, 신라는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의 희망과 달리, 신라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차츰 고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때문에 양국 관계는 더욱 꼬이게 된 것이다. 두 나라는 779년을 끝으로 사신교환을 단절하고 말았다.

스스로 시장을 개척하다

김태렴의 아부성 발언은 분명 일본의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김태렴이 신라 경문왕과 미리 어떤 약속을 하고 일본에 갔는지, 아니면 경문왕의 외교 정책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행동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그의 행동이 양국 간계를 악화시켰던 것은 분명한 만큼, 비난의 소지도 없지 않다.

김태렴을 비롯한 8세기 신라 귀족들은 조선시대 양반들과 달리, 자신이 경영하는 수공업장을 갖추고 물건을 제조해서 제조 단계에서부터 판매까지 적극 관여했다. 그들은 신라 조정이 벌이는 일본과의 외교적 힘겨루기 때문에 중요한 상품 수요처인 매력적인 일본 시장에서 상거래를 못해 손실을 보는 상황을 참기 어려웠다. 따라서 상거래의 활로를 뚫기 위해 김태렴을 대표로 하는 대규모 상단을 꾸려 직접 일본에 가서 다량의 상품을 팔아치웠던 것이다. 외교적 명분보다는 실리가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명분에 얽매어 김태렴 일행에게 엄청난 선물을 주고 체류비를 부담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외교적으로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일본은 비록 신라와 외교관계를 단절했지만, 이후로도 민간 무역만큼은 허락했다. 일본 역시 수입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당나라와 발해에 사신을 보내 수입품을 확보하고자 노력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다자이후를 창구로 다시 신라 물건을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뛰어난 상품에 길들여진 일본 귀족들의 수요가 줄지 않았기에, 768년 일본에서는 신라 물건을 매입하기 위해 일본 귀족들에게 다자이후에 비치된 솜을 최고 2만 둔()에서 최하 1천 둔까지 나누어 준 바 있다. 김태렴 이후 신라와 일본과의 교역은 계속 늘어났다. 828년에는 청해진()의 설치로 당-신라-일본을 잇는 교역망이 형성되면서, 동아시아의 국제교역망은 더욱 활성화된다.

우리 역사에는 유독 상인에 관한 기록이 매우 드물다. 8세기 중엽 신라의 수공업과 상업이 발전하는 상황에서 등장한 김태렴은 한국사에서 매우 특별한 인물이다. 그는 새로운 상품시장을 개척하고 막대한 이익을 얻은 빼어난 장사 수완과 과감성을 갖춘 뛰어난 상인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