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백과전서적 학풍의 19세기 지성계를 대표하는 학자 - 이규경

히메스타 2016. 10. 24. 16:10

 

이규경 이미지 1

19세기 조선시대 사회상에 대한 기존의 시각은 세도정치의 시작과 세도정치의 모순에서 파생된 삼정(: 조선 후기 국가재정의 근간을 이루었던 전정(), 군정(), 환정())의 문란과 민란의 발생에 중점이 두어졌다. 이러한 시각은 기존의 연구가 사회경제사 및 민란의 연구에 중점을 두면서 봉건사회가 해체되는 점진적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나간 것에서 연유한 측면이 크다. 그러나 19세기의 조선사회는 그 내부에서 축적 되어진 학문적 성과와 청의 고증학의 영향, 사회경제적 모순에 대한 대응으로 새로운 학문 풍토가 조성된 시기였다. 특히 조선후기 이후 주자성리학 일변도에서 벗어나 민생에 필요한 모든 학문 분야를 포괄하는 박학()의 풍조가 사상계의 일단을 형성했고, 이러한 흐름들은 19세기에도 지속되었다. 백과전서적() 학풍은 19세기 지성을 특징짓는 용어가 될 수 있으며, 이규경(, 1788~1856)은 이러한 지성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학문의 배경

 

이규경의 본관은 전주, 자는 백규(), 호는 오주() 또는 오주거사(), 소운거사()라고도 한다. 이규경의 호 오주()는 서양에서 지구 전체를 다섯 개의 주로 나눈 인식을 수용한 것으로, 서양의 학문을 수용하려는 의지가 나타나 있다. 이규경은 서얼 출신으로, 조부와 아버지 또한 모두 서얼 출신으로 규장각 검서관을 역임했다. 이규경의 할아버지는 정조의 총애를 받은 검서관 이덕무(, 1741~1793)이며, 부친 이광규(, 1795~1817) 역시 검서관을 지냈다. 이규경은 가학()의 전통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에 눈을 뜰 수 있었는데, [오주연문장전산고(稿)]에서는 조부 이덕무의 [청장관전서()]를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다. 이규경의 학문 형성에는 청나라의 고증학적 학풍의 영향과 조선사회 내부의 박학추구 분위기가 큰 역할을 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60권 60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역사·경학·천문·지리·불교·도교·서학(西)·예제()·재이()·문학·음악·음운·병법·광물·초목·어충·의학·농업·광업·화폐 등 총 1,417항목에 달하는 내용을 모두 변증설()로 처리하여 세밀한 문제까지 고증학적 학문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조선사회 내부의 박학추구 분위기는 민생의 안정과 국가발전에 필요한 것이라면 모든 사상체계를 포괄하려는 것으로 특히 양란 이후 일부 학자들에 의해 대두되었다. 이러한 학풍은 17세기의 이수광, 유몽인, 유형원 등과, 18세기 이익, 홍만종, 이덕무 등을 거쳐 19세기 학자들에게는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했다. 문화사적으로 보면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이익의 [성호사설]을 종합, 확대하고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규경은 관직생활을 하지 않고 오랫동안 저술활동에 전념하였기 때문에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하는 기록이 없으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그의 근거지와 교유관계가 일부 나타난다. 이규경이 교유한 주요인물로는 최한기(, 1803~1877)와 최성환(, ?~?), 김정호(, ?~?)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한미한 양반이거나 중인 출신이었다. [사소절분편변증설()]의 “나의 조부 형암(: 이덕무)선생이 사소절 3권을 지었다....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로 전해왔는데 도성에 사는 최도사() 성환이 편을 갈라 1권으로 하여 주자()로 간행했다. 나는 충주의 덕산() 상전리에 거처하여 알지 못했다. 1853년 가을에 서울에 있는 최한기가 내방하여 간행했음을 전하고 1854년 봄에 2질을 보내오니 옛 정분의 두터움을 알겠으며 그 감사함을 형용할 수 없다.”는 기록은 이규경이 충주에 거주했음과 함께 최한기, 최성환과 깊은 친분을 맺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한기는 중국에서 들어온 중국과 서양서적의 영향을 광범하게 섭렵하여 개국통상론을 주장할 만큼 서양의 과학문명을 수용하는데 적극적인 인물이었으며, 최성환은 19세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전개된 위항문학 운동에 핵심으로 참여했다. 최성환은 지도와 지리학에 해박하여 김정호와도 교분을 가졌으며, 이규경 역시 김정호의 뛰어난 능력을 칭송하여 그의 [여지도]와 [방여고] 2책은 꼭 전할만 것으로 평가하였다.

변증설로 정리한 [오주연문장전산고]

 

이규경은 20~30대의 청년 시절을 서울 인근에서 보냈다. 말년에는 외가와 연고가 있는 충주와, 서천 등 충청도 지역의 농촌에서 저술활동을 하면서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완성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가장 큰 특징은 다루고 있는 항목이 1,417여 가지에 달하며, 고증을 원칙으로 하면서 저자의 주관적 견해가 피력된 변증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규경은 서문에서 “명물도수(: 명목, 사물, 법식, 수량 등 백과사전식 잡학)의 학문이 성명의리지학(: 성리학)에는 미치지 못하나 가히 폐할 수 없다”고 강조하였는데, 이는 [오주연문장전산고] 전체 내용을 관통하는 정신이다.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포괄한 내용은 전대까지의 학문적 성과를 집약하고 있어서 19세기의 학문과 사상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규경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자였으며, 주자성리학의 이론에 대해서도 해박하였다. 성리학의 이론서인 13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이에 대한 주석을 단 것을 비롯하여 [대학변증설], [소학변증설], [중용변증설] 등에서 자신의 학문관을 유감없이 피력하였다. [중용변증설]에서는 “중용에 대해서는 이미 주자의 집주()가 있으니 후대의 유학자들은 마땅히 그 주자의 훈고()를 따라야 할 뿐이다. ... 후대의 유학자들이 늘 이설()을 많이 내어 끊임없이 어지럽게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리 동방의 윤휴()같은 사람이 가장 심하다”고 하여, 숙종대에 사문난적으로 몰린 윤휴를 비판하였다.

이규경은 주자성리학에도 해박하였지만, 그의 사상적 특징은 여러 사상을 포용, 통합하여 실사구시()적으로 활용하는 데 있었다. 주자의 사상과 육구연과 왕양명의 사상, 그리고 도교와 불교의 사상까지를 통합하려는 입장에 있었으며, 이러한 회통적() 사상은 그가 추구하는 박학()을 완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불교와 도교에 대한 이규경의 기본적인 인식 또한 성리학을 우위에 두면서도 불교와 도교에 보이는 성리학과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그 장점을 취하여 성리학체계가 가지는 한계성을 보완하려는데 있었다.

이규경이 활동했던 19세기 초, 중반은 서양세력이 점차 밀려오고 이에 대해 합리적인 대처의 문제가 요구되면서 지식인들 내부에서 대외인식의 문제가 중요시 되었다. 이규경은 호를 오대양 육대주의 의미를 지닌 '오주()'라고 할 만큼 서양과 천주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변증설 가운데 약 80항목에 걸쳐 서학을 직접, 간접적으로 논하고 있는 것에서도 나타나는데, [용기변증설()], [백인변증설()], [지구변증설()], [척사교변증설()] 등에 구체화되어 있다. 그가 변증한 서학 관련의 항목은 천문·역산()·수학·수리·의약·종교 등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참고한 한역서학서(西)만 해도 [천주실의], [직방외기] 등 근 20종에 달했다.

이규경은 서양의 과학기술이 중국의 그것보다 우위에 있음을 자각하면서도 동양사회의 과학적 전통을 중시하였는데 이는 결국 부국()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이단()에 상관없이 그 필요한 것을 취용()하고 전통사상과 새로운 사조를 흡수하려는 사상적 개방성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개방성은 다시 개국통상론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규경은 서교(西)인 천주교 자체에 대해서는 강한 비판적 입장을 가져 “요즘에 이르러 천주교의 폐해는 노장이나 불교, 양주(), 묵적()의 폐해보다 심하다”고 하였으며 야소교(: 예수교)는 천주 사학()이라 비판하고, 이 폐단을 극복하는 길은 성리학인 정학()을 밝힘에 있다고 하였다.

부국()과 통상()을 지향하다

 

이규경은 역사를 정의하면서 “역사란 나라의 거울이다 옛 것을 드러내고 미래를 여는 것이다. 옛 것을 법삼아 오늘에 비추어 보는 것이 역사이다”라 하여 역사의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였으며, 역사를 기록하는 법은 포폄(: 평가)과 편기(: 편집하고 기록함)의 2가지에 있다고 하였다. 이규경의 고증적인 학풍은 중국사에 대한 해박한 고증에서 더욱 잘 나타나 있다. [이십삼대사급동국정사변증설()]은 중국의 역사책에 대해 낱낱이 고증을 가한 것으로 그의 학문적 깊이를 알 수 있는데, 중국 측의 자료와 함께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와, 이익의 [성호사설] 등 선대의 한국 측 자료도 광범하게 인용하였다.

이규경은 우리의 풍속과 역사, 지리, 물산 등에 대해서도 많은 고증을 하였다. [동방구호고사변증설()]에서는 우리나라를 부르던 명칭에 대한 고사를 소개하면서, 국호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였다. “우리나라를 멀리할 경우에는 구이()니 육부()니 하고 예우하여 가까이 할 경우에는 군자국 또는 예의방(), 소중화()라 하며, 통틀어 말할 때는 조선. 삼한, 해동(), 좌해(), 대동(), 청구(), 근역(), 진단(), 근화향(槿)이라 한다”고 전제한 다음 이에 대한 고증을 가하였으며, 우리나라가 군자국으로 인식된 데 대하여 큰 자부심을 가지고 [논어]에서 공자가 우리나라에 살고 싶다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

이규경은 “외국에도 또한 역사가 있다. 모두 같은 문화를 입었으면 오랑캐의 후예라 하여 그것을 버릴 수 없다. 외국의 역사는 불가불 알아야 할 것이니 정사()를 읽다가 그 근거를 참고할 곳이 있으므로 그 근거를 적는다”고 하여 외국의 역사와 문화에 비중을 두었다. 이규경이 외국사에 안남(: 베트남)과 일본, 회부(: 이슬람)를 포함시킨 것은 우리나라와의 문화교류를 의식했기 때문이며, 그 서술에 있어서는 중국 측과 우리 측 자료를 널리 참고하였다.

이규경은 우리의 역사 고증에 많은 비중을 두는 한편 물산(), 향도(), 속악() 등에 이르기까지 소홀해지기 쉬운 우리 것을 찾기 위한 많은 노력을 개진하였다. 그의 조부 이덕무도 우리나라의 풍토와 생활에 밀착된 시를 남겨 ‘조선의 풍요()’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러한 전통이 이어진 것이다. [울릉도사실변증설()]에서는 평민 안용복이 울릉도를 찾기 위해 힘쓴 사실을 자세히 나열하여 국토에 대한 애정과 함께 신분이 낮은 사람도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규경은 관직에 종사하지 않고 농촌에 은거하면서 가학()으로 마련된 학문적 배경과 최한기, 최성환 등과의 교유관계를 통하여 서양과 청나라의 선진 학문을 수입하였다. 그는 학통상으로는 북학파와 연결되고 있었으나. 그가 처했던 위치가 농촌의 재야 지식인이었던 만큼 농민의 생활안정과 농촌문제의 해결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저자의 이러한 지역적, 학문적 기반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규경이 무엇보다 지향한 것은 부국()과 통상()이었다. 국토 내에 소장되어 있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잠재되어 있는 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활용하여 잘 살고 선직적인 국가를 지향해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도량형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화폐의 유용성을 타진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시장의 유래와 기능을 소개한 것에서 출발하여 개국통상론을 주장한 것에서 집대성되었다. [장시변증설()]에서는 전국의 장날을 통일할 것을 주장하고 투기와 고리대의 폐단이 없는 상업의 발달을 추구하였으며, [서양통중국변증설(西)], [여번박개시변증설()] 등에서는 적극적인 개국통상을 주장하였다. [여번박개시변증설]에서 이규경은 “다른 나라와 시장을 열어 교역하는 일은 서로 도움이 되는 것인데 어찌 해가 있을 것인가? 중국은 우방과 서로 교역하여 공사()의 이익을 크게 누리고 국가경제가 넉넉한데 우리만 그것이 병란()을 부를까 염려하여 감히 교역할 생각을 못하여 옹색해지고 기이한 나라가 되었다. 고려시대의 송상()들이 조석으로 왕래하였건만 병환이 없었으니 만일 서남의 선박들과 무역한다면 족히 나라를 부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여 개국통상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는 특히 16세기의 학자 이지함(, 1517~1578)이 유구국과의 교섭을 주장한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규경은 19세기 중엽 박학()을 학문의 중심으로 삼으면서, 서양 세력과의 적극적인 개항과 통상을 주장한 학자였다. 그와 비슷한 입장을 보이면서 전통을 바탕으로 근대를 지향한 인물인 최한기, 최성환, 박규수, 오경석 등에 대한 연구가 보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봉건사회 해체기, 무기력한 지식인으로만 대변되는 19세기 조선사회에 대한 기존의 상()도 어느 정도는 극복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