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장애를 극복하고 이용후생에 힘쓴 학자 - 유수원

히메스타 2016. 10. 10. 17:00

 

비국(비변사) 당상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단양군수 유수원이 귀는 비록 먹었으나 문장을 잘합니다. 책을 한 권 지었는데, 나라를 위한 경륜을 논한 것입니다. 헛되이 늙는 것이 아깝습니다.” 하였는데, 이광좌가 아뢰기를, “신 역시 그 책을 보았는데, 책이름을 [우서(迂書)]라 합니다. 주장과 논변이 매우 이채롭습니다.”하니, 임금이 승정원에 명하여 구해 올리게 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13년(1737년) 10월 24일
위의 기록은 인재를 추천하라는 영조의 명을 받고, 이종성이 단양군수 유수원을 추천한 내용이다. 이종성이 [우서]에서 주장한 논리가 매우 우수함을 지적하자, 영조는 직접 이 책을 보기 위해서 승정원에 명하여 [우서]를 올리게 한 것이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유수원이 “귀는 먹었으나 문장을 잘한다.”는 것으로서, 유수원이 장애를 가진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영조실록]에는 영조가 유수원이 귀가 먹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승정원에서 기록을 담당하는 주서(注書)에게 글을 써서 보여 주도록 명하는 감동적인 장면도 나타난다.


유수원은 누구인가?


유수원 (柳壽垣, 1694~1755)은 영조시대 장애를 극복하고 관료이자 학자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인 인물이었다. 또한 [우서(迂書)]에서 피력한 주장들이 북학(北學) 사상의 원류가 된다는 점에서 조선후기 지성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은 적지가 않다.

유수원의 본관은 문화(文化)이며, 호 농암(聾庵), 농객(聾客)은 ‘귀머거리’란 뜻을 담고 있다. 1694년(숙종 20) 유봉징(柳鳳徵)의 아들로 충주에서 출생했는데, 그의 친족 일가는 서울과 그 근교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중견 관인가문으로서 당색으로는 소론(少論)에 속하였다. 큰 할아버지인 유상운(柳尙運)은 숙종대에 영의정에 올랐으며, 유상운의 아들이자 유수원의 종숙부(從叔父)인 유봉휘(柳鳳輝)는 소론의 핵심으로 우의정을 역임하다가 영조 초반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였다. 유수원은 21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5세에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후에 정언, 낭천현감, 지평, 단양군수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단양군수 시절에는 그의 저술 [우서]를 왕이 직접 열람하는 영예를 얻기도 했다. 1741년(영조 17) 영조는 유수원이 올린 [관제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을 보고, 직접 면담을 청했다. 유수원의 귀가 어두워 필담을 나누면서도 영조는 그가 제시한 관제 개혁안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영조는 이 무렵 남인 학자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간행하기도 했는데, 개혁에 필요하다면 소론이나 남인을 구별하지 않고 그들의 아이디어를 수용했음이 나타난다. 1743년 유수원은 [속오례의(續五禮儀)] 편찬에 참여하면서 영조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그러나 영조대 집권 노론 세력의 반대파인 소론의 후예라는 점은 유수원의 정치 인생에 커다란 약점으로 자리했다. 특히 종숙인 유봉휘가 소론의 핵심으로 노론을 제거한 옥사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1725년(영조 1) 유배 후 죽은 것은 그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1744년(영조 20) 이후 유수원의 이름은 실록에서 사라진다. 영조 후반 정국이 노론 중심으로 운영되고 소론 인사들이 관직에서 밀려나는 과정에서 강경 소론파의 후손인 유수원이 자리할 곳은 없었다. 11년 후 그의 이름이 다시 실록에 등장할 때 그는 역모 연루자였다. 1755년(영조 31)에 일어난 나주괘서(羅州掛書) 사건은 나주에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의 도탄이 심하니 거병하노라’는 벽보가 붙은 것에서 수사가 시작된 사건으로, 소론 강경파들이 영조 즉위의 부당함을 주장하면서 사건의 파장은 정국을 흔들었다.

노론은 이 사건을 역모로 몰면서 소론을 일망타진하는 계기로 삼았고, 그 과정에서 소론이었던 유수원도 처형을 면하지 못하였다. 유수원이 실제 역모에 가담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와 함께 처형된 심악이라는 인물이 마지막 공초(供草: 조선시대 형사사건에서 죄인을 신문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에서 “유수원이 사형된 것은 신은 그 이유가 흉언 때문인 것으로 알았지 대역(大逆)으로 정법한 것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신은 유수원의 역절(逆節)을 나라를 향한 정성으로 생각하였고, 유수원의 흉언을 대역(大逆)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고 하고, 이어서 “유수원과 함께 죄를 입는다면 죽더라도 기쁘겠습니다.”고 하였다. 당쟁의 치열함 속에서 유수원이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우서]의 체제와 주요 내용


유수원은 비극적으로 생애를 마감했지만, 그의 나이 40세를 전후한 시절인 1729년(영조 5)~1737년(영조 13)에 걸쳐, [우서(迂書)]를 저술하였다. 정치적인 부침에 선천적인 장애와 질병으로 시달렸지만, 여러 지방의 수령을 지내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의 열정을 쏟아부은 책이었다. ‘우서’라는 제목은 ‘우활(迂闊: 사정에 어둡고 실용에 적합하지 못함)하여 세상에 쓰이기 어렵다’는 뜻을 담고 있지만, 이것은 단지 저자의 겸손함을 보여줄 뿐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은 결코 우활하지 않았다. [우서]는 당대의 현실을 진단한 바탕 위에 신분제도, 과거제도 등에 대한 개혁안과 국부를 증진하기 위한 대책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이 책은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었으며, 국왕인 영조 또한 [우서]를 읽어 본 후에 ‘대체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저술은 선유(先儒)의 말을 뽑아 모아서 공교(工巧)함을 구하는 데 지나지 않는데, 이 사람은 자기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만을 기술하였으니, 참으로 귀하다’고 하여, [우서]의 내용을 높이 평가하였다.

[우서]는 문답체 형식으로 기술하여 독자를 끌어들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맨 처음 부분의‘이 책을 저술하는 근본 취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문답으로 처리하고 있다.


 문) 그대가 이 책을 저술하는 것은 내용이 참으로 세상에 시행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가.
답) 미쳐서 실성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세상에 시행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모르겠는가.
문) 그렇다면 이 책을 저술하여 무엇하겠는가.
답) 천하의 모든 일은 참으로 그 이치가 있으면 반드시 그 말이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 세간(世間)에 반드시 이러한 이치가 있으므로 부득이 말하는 것이니, 시행될 수 있고 없음은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 옛날 군자(君子)들은 대개 많은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들이 어찌 당초부터 시행될 수 있고 없음을 헤아렸겠는가. 요는 마음에 쌓이고 맺힌 바 있으나 이를 펼 수 없어서 부득이 글로 기록하여 스스로 성찰하였던 것뿐이다.
 
[우서]는 문답체 형식이지만, 그 구성은 체계적으로 정리된 논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77개의 항목이 논지의 전개에 따라 질서 있게 연결되어 있는데, 처음 6개 항목은 서론, 다음 69개 항목은 본론, 마지막 2개 항목은 결론에 해당하고 있다. 서론에서 유수원은 국허민빈(國虛民貧)의 원인을 ‘사민불분(四民不分)’, 즉 사ㆍ농ㆍ공ㆍ상으로 대표되는 백성 모두가 각자의 생업에 전업하지 못하는 데서 찾고 있다. 양반 문벌 중심의 신분질서가 고착화되는 한 백성들은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우서]의 기록을 따라가 보자.


 “우리 왕조가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나라를 세운 지 3백 년에 이르었으나, 사민(四民)이 제대로 나누어지지 않고 있으니, 나라가 허약하고 백성이 가난한 것은 오로지 이에서 빚어진 것이다. 우리 왕조는 국초로부터 임진년에 이르기까지, 또 병자년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 차례의 구란(寇亂: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기는 했으나, 한자의 영토도 잃지 않고 인구도 날로 증가하여 왔다. 그리고 국가에서 받아들이는 것도, 공세(貢稅) 이외에는 별로 더 부과된 일이 없었다. 따라서 간혹 천재(天災)로 상해를 입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을 휴양(休養)하여 온 끝이니, 어찌 민산(民産)이 오늘날처럼 물로 씻은 듯 바닥을 드러낼 수가 있었겠는가. 우리나라의 이른바 부잣집을 말하더라도, 대개 사부(士夫)와 훈척과 상인ㆍ역관들을 여유 있다고 하는데 불과할 뿐, 농가를 보면, 비록 삼남(三南)의 비옥한 지역이라 할지라도, 햅쌀과 묵은 쌀이 이어지는 집이 거의 없다. 지난날의 역사를 두루 살펴 보아도 우리나라처럼 민산이 심히 메말랐던 나라는 없으리라. 그러면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실로 사민(四民)이 분별되지 못했으므로, 각자가 제 직업에 힘을 다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수원은 18세기 당시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을 민산(民産)의 부족으로 보고 있으며, 일부 사대부와 훈척, 상인, 일부 역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농민들은 가난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민일치(四民一致)’, 즉 신분제 질서를 파기하여 백성들의 평등을 이루는 것을 일차적인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본론에서는 이러한 신분제 질서의 파기를 위한 구체적인 개혁 방안들을 정치ㆍ경제ㆍ사상ㆍ신분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제시하고 있다. 신분제 질서의 해체에 관한 견해로는 <논문벌지폐(論門閥之弊)>, <논과거조례(論科擧條例)> 등이 있는데, “사ㆍ농ㆍ공ㆍ상은 다 같은 사민(四民)이다. 만일 사민의 아들이 한 모양으로 행세하게 한다면 높고 낮을 것도 없고 저 편이나 이 편의 차이가 없어서, 고기는 강호(江湖)에서 서로를 잊고 사람은 도술(道術)에서 서로를 잊듯이 결코 허다한 다툼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와 같은 주장을 하여 사민의 직업이 모두 평등함을 강조한 것이 주목된다. 관료기구의 적절한 운영에 대해서는 <논관제지폐(論官制之弊)>, <논구임직관사례(論久任職官事例)> 등의 논설을 통하여 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상공업 중심의 이용후생(利用厚生) 사상을 제시하다


그의 개혁안 중에 가장 주목되는 것은 상공업의 진흥을 통해 농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바꾸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40항목의 논설이 정리되어 있는데, 화폐, 공장(工匠), 군제(軍制), 어염(魚鹽) 등 다양한 내용들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유수원은 위의 논설들을 통하여 무위도식하면서 문벌에 끼려고 애쓰는 양반들을 전업시켜 농ㆍ공ㆍ상업에 종사하게 하고, 사ㆍ농ㆍ공ㆍ상을 평등한 직업으로 만들어 전문화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농업에 있어서는 무리한 토지개혁 보다는 상업적 경영과 기술의 혁신을 통하여 생산성을 높이고, 상업에 있어서는 상인 서로간의 합자를 통한 경영규모의 확대와 상인이 생산자를 구성하여 생산과 판매를 주관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대상인(大商人)이 학교와 교량을 건설한다든지 방위시설을 구축하여 국방의 일익을 담당하는 등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 대기업이 사회간접자본을 투자하거나 낙후된 지역사회의 개발에 적극 참여하게 하는 것과도 유사한 입장이다. 상세(商稅)와 전매 사업의 확대, 무허가 상인의 축출, 공장(工匠)의 개혁 등도 유수원이 제시한 주요 정책이었다.

유수원은 [우서]를 통하여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이용후생의 길은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업에 철저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국가가 온갖 여건을 조성하고 유도하는데 있었다. 사민일치의 사회체제와 균등한 수취체제 아래서 백성들 모두가 능률적이고 전업적으로 자원을 개발하고 기술을 연마하며, 물자의 신속하고도 원활한 유통을 통하여 수요와 공급에 충실할 때 부국안민(富國安民)은 저절로 이루어 질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이를 문답체의 논설로 정리하여 그 핵심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유수원에 의해 제시되었던 체계적인 국부(國富) 증진 사상은 그의 뒤를 잇는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등의 북학파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면서 18세기 영, 정조대 이후에는 조선후기를 풍미하는 시대사상으로 부각되게 된다. 그를 북학사상의 선구자로 칭하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유수원은 18세기 사회의 총체적인 문제점으로 국가의 재정 부족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공업에 중심을 둔 이용후생 사상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박지원이나 박제가와는 달리 중국의 사행 경험이 없이, 자생적으로 당시 조선사회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상공업 중심의 이용후생 사상을 피력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특히 장애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가 지향할 과제와 비전을 제시한 점은 우리에게 보다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