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독립의 염원을 안고 식민지 하늘을 날다, 안창남

히메스타 2016. 8. 19. 10:04

 

 

안창남 이미지 1

친일파의 처리 문제를 논의한 어느 책의 첫 문장처럼 “식민지의 경험은 한 민족의 넋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세계사에서 19세기부터 20세기 전반은 인간의 폭력성과 탐욕이 어느 때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난 기간이었다. ‘제국주의 시대’라고 불리는 그 기간 동안 몇 개의 나라들은 지구의 대부분을 분할해 지배하고 착취했다. ‘서세동점(西)’이라는 표현이 알려주듯이, 그 열강들은 거의 모두 서양의 나라였다. 유일한 예외는 일본이었다. 그것과 가장 인접한 조선은 유구한 역사에서 처음으로 식민지로 전락하는 치욕과 고난을 겪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인들은, 체념해 순응하거나 적극적으로 협조해 영달을 추구하기도 했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여기서 서술할 안창남(, 1901~1930)은 당시로서는 매우 특수한 직업인 비행기 조종사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그는 뛰어난 비행 실력으로 식민치하의 한국인들에게 큰 기쁨과 자긍심을 선사했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 단체에 자금을 조달하고 비행 기술을 가르쳤다. 하지만 생몰 연대가 보여주듯이 그는 불의의 비행 사고로 29세의 짧은 삶을 마쳤다.

서른 이전에 삶을 마감한 사람이 후대에 어떤 족적을 남기기는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안창남은 그런 드문 예외에 해당한다. 그의 짧은 생애가 비상()의 희망뿐만 아니라 독립의 염원을 실천한 고귀한 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출생과 성장

 

안창남은 1901년 3월 19일 서울 평동()에서 의관()인 안상준()과 부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안창남이 세 살 때 세상을 떠났다(1904년). 안창남은 명민한 어린이였다. 그는 1911년에 미동()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우등으로 졸업하는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다.

그의 삶을 지배할 비행기와의 만남은 16세 때의 일이었다. 1917년 9월 서울 용산에서 열린 미국인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은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전부터도 비행기에 관심을 가져온 그는 이 경험을 계기로 비행기 조종사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도일과 비행 학습

 

그 뒤의 행적에서 보이듯이 안창남은 결심을 단호하고 열정적으로 실천하는 인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1년 뒤 결혼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먼저 자동차 운전을 배웠다. 그는 오사카() 자동차학교 전수과에서 3개월 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운수업에 종사했다.

본격적인 비행 학습은 1919년 8월부터 시작되었다. 우선 반년 동안 도쿄 아카바네() 비행기 제작소 기계부에서 비행 조정을 직접 배운 뒤, 1920년 8월에 도쿄 오쿠리() 비행학교에 입학해 석달 만에 졸업했다.

그해 12월은 그의 삶에서 기억할 만한 시점이었다. 당시 조선의 대표적인 잡지였던 [개벽()] 12월호에 <조선 비행가 안창남>이라는 기사가 실려 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이다. 기사를 쓴 사람은 [개벽]의 도쿄 특파원을 지낸 소파() 방정환(, 1899~1931)이었다. 안창남도 이 잡지에 <오쿠리 비행학교에서>라는 수필을 썼다.

뛰어난 비행 실력을 발휘하다

 

20세의 나이에 동경 소율비행학교 조교수가 된 안창남의 활약을 소개한 1921년 7월 11일 동아일보 기사.

20세가 된 안창남은 뛰어난 비행 실력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기 시작했다. 1921년 5월에는 일본 민간 비행사 시험에서 공동 1등으로 합격해 면허증을 받았고, 한달 뒤에는 지바에서 열린 민간항공대회에서 2등으로 입상했다.

그의 이름은 점점 알려지기 시작했다. 같은 해 7월 [동아일보]는 <신()비행가 안창남 동경 소율()비행학교 조교수, 금년 이십 세의 조선청년>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활동을 크게 소개했다.

조선 사람의 재주가 세계 어떠한 민족보다 뛰어나고 조선 민족의 문명이 세계 어떠한 민족보다 앞섰던 것은 광휘 있는 우리의 과거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라. 다만 일시의 쇠운으로 한참 동안 쇠퇴한 일이 있었으나 원래 탁월한 선조의 피를 받은 조선인은 이제 모든 구속의 멍에를 벗고 세계 민중이 다투는 무대 위에서 장쾌한 그의 재주를 발휘코자 하는 중이다. 20세기 과학 문명의 자랑거리인 비행기에 대하여 우리 조선 사람으로 첫 이름을 날린 사람은 당년 20세의 청년으로 귀신같은 재주를 가진 안창남군이라. 몇해 전 비행에 뜻을 두고 동경 소률비행학교에 입학하여 작년 11월에 우수한 성적으로 그 학교를 졸업한 후 그의 특이한 재주는 그 학교 직원의 인증한 바 되여 금년 4월부터 그 학교 조교수가 되여 수다한 일본 청년에게 비행술을 가르치는 중이라.

11월에는 그에게 비행기를 사주자면서 2만원 모금을 목표로 후원회가 결성되기도 했다. 이때 부인과 이혼하는 아픔도 있었지만, 안창남은 1922년 11월 도쿄-오사카 왕복 우편비행 시합에서 우수상을 받고 2등 비행사 자격증을 취득함으로써 다시 한번 도약했다. 21세의 청년은 이제 조선의 희망이 되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조국의 하늘을 날다

 

안창남의 고국방문 대비행회를 선전하는 1922년 10월 19일 동아일보 기사.

조국에서는 안창남을 직접 보고 싶다는 열망이 솟구쳤다. 그것은 3ㆍ1운동이 좌절되고 식민지가 된 지 10년이 넘어가면서 점차 일상이 되어가는 예속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작은 바람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움직임을 주도한 것은 앞서 안창남에게 주목한 [동아일보]였다. [동아일보]는 1922년 12월 10일에 ‘안창남 모국방문 대비행회’를 주최하겠다면서 10월부터 그 사실을 사고()로 발표했으며, 그의 활약을 상찬하는 사설도 실었다(10월 22일).

식민지는 기대와 희망으로 들썩였다. 11월 29일에는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동아일보사의 발기로 '안창남군 고국방문후원회'가 조직되어 박영효()ㆍ권동진() 등 당시의 주요 인사 47명이 회원으로 참여했다.

드디어 안창남은 12월 5일 서울에 도착했다. 대대적인 환영을 받은 것은 물론이었다. 그의 역사적인 고국 방문 비행은 예고대로 12월 10일에 이뤄졌다. 안창남은 ‘금강호()’라고 이름 붙인 영국제 뉴포트 단발쌍엽() 1인승 비행기를 타고 여의도 간이비행장을 이륙한 뒤 남산을 돌아 창덕궁 상공을 거쳐 다시 여의도에 착륙했다. 당시 서울 인구 30만 명 중에서 5만 명이 그 비행을 지켜보고 환호했다는 사실은 이 행사에 쏟아진 성원을 짐작케 한다.

청년 비행사는 이제 식민지 조국의 영웅이 되었다. 그는 1923년 1월 다시 [개벽]에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이라는 글을 실었다. 조국의 하늘을 나는 감격과 식민지라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그 글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경성)의 한울! 의 한울! 내가 어떠케 몹시 그리워 햇는지 모르는 의 한울! 이 한울에 내 몸을 날리울 때 내 몸은 그저 심한 감격에 떨릴 뿐이엇습니다. 이 아모리 작은 (시가)라 합시다. 아모리 보잘 것 업는 도시라 합시다. 그러나 내 고국의 서울이 아닙니까. 우리의 도시가 아니입니까. 장차 크게 넓게 할 수 잇는 우리의 도시, 또 그리할 사람이 움즉이고 자라고 잇는 이 그 한울에 비행기가 나르기는 결코 1,2차가 아니엇슬 것이나 그 비행은 우리에게 대한 어떤 의미로의 (모욕), 아니면 어떤 (자)는 일종 위협의 의미까지를 뛴 것이엇섯습니다. 그랫더니 이번에 잘하나 못하나 우리끼리가 깃버하고 우리끼리가 반가워하는 중에 우리끼리의 한몸으로 내가 날을 수 잇게 된 것을 나는 더할 수 업시 유쾌히 생각하엿습니다. 참으로 일본서 비행할 때마다 (기두)를 西(서천)으로 향하고 보이지도 안는 이 을 바라보고 오고 십흔 마음에 가슴을 뛰노이면서 몃번이나 눈물을 지웟는지 아지 못합니다.
(원문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원문 보러가기

2월에는 [안창남 비행기()](윤종덕 지음, 이문당 발간)라는 책이 나오기도 했다. 안창남은 그해 7월에 1등 비행사 자격을 획득했다.

독립운동과 비운의 죽음

 

그러나 안창남은 단순한 비행사에 머물지 않았다. 당시 비행사는 여객이나 화물의 운송보다는 유람 비행, 삐라 살포 대행, 비행 기술 교육 사업 등으로 높은 소득과 명예를 함께 누릴 수 있는 직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런 안락에 머무르지 않고 험난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23년 9월에 관동대지진으로 일본은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런 혼란은 재일 조선인의 학살이라는 만행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도쿄의 오쿠리 비행학교도 파괴되었고 문을 닫았다. 그러자 국내 신문들에는 안창남의 사망설이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새로운 삶을 결심하고 실천했다. 1924년 자신의 뛰어난 재능인 비행 기술을 독립운동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것이다. 그는 1925년 1월, 먼저 상해에서 임시정부 요인과 접촉했지만, 비행학교를 설립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안창남은 중국 혁명을 매개로 독립을 이루기로 방향을 전환했다. 1926년 그는 여운형 (, 1886~1947)의 권유로 산시성(西)의 군벌인 옌시산()의 휘하에서 항공중장과 산서비행학교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독립운동은 더욱 본격화되었다. 그는 상하이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공명단()에 가입했다. 공명단은 상하이와 만주를 중심으로 다양한 독립운동을 벌인 단체였다. 그는 1929년에 비행대의 설립을 목표로 국내에 파견된 공명단원 최양옥()ㆍ김정련() 등에게 당시로서는 큰 금액인 600원을 제공했다. 당시 [매일신보]는 <제남()서 안창남 씨에게 육백 원을 위선()바더>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고, 그때 체포된 최양옥도 해방 후 쓴 수기에서 안창남이 공명단의 주축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안창남은 불의의 사고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1930년 4월 2일 중국 산시 비행학교에서 비행 교육을 하던 중 추락해 사망한 것이다. 29세의 푸른 나이였다.

추모와 기억

 

그러나 그의 치열한 삶은 깊은 궤적을 남겼고 오래도록 추모되고 기억되었다. 1949년 9월에는 <안창남 비행사> (노필 연출, 윤봉춘ㆍ박순봉 출연)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2000년 4월에는 <서거 70주기 안창남 혼맞이> 공연이 독립기념관에서 열렸고, 2001년 3월에는 ‘탄신 백주년 기념제’가 개최되었다. 같은 해 광복절에는 독립운동의 업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됨으로써 국가의 공식적인 포상이 이뤄졌다.

식민지 시대에 한국인들은 전래 민요인 <청춘가>의 가락에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가사를 붙여 노래했다. 사이클 선수 엄복동(, 1892~1951)은 ‘전조선 자전차 경기대회’에서 일본인을 누르고 거듭 우승한 또 한 명의 희망이었다.

이런저런 개인적 생활이나 세상일과 관련해 운명이나 신의 존재를 생각할 때가 가끔 있다. ‘신이 계신다면 내게(또는 다른 사람이나 사회에)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이런 것이 운명일까?’ 하는 것이다. 뛰어난 경력으로 얻은 큰 명성을 버리고 험난한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그렇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안창남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짧은 글이 그분의 생애와 업적을 기억하고 기리는 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