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숙종대 정치 공작의 달인, 김석주

히메스타 2016. 6. 28. 09:20

 

일러스트

반대 세력의 정보를 빼내기 위해 정보원들을 배치하고 치열하게 두뇌 싸움을 벌이는 모습. 이는 현대의 스파이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정치 공작의 달인이 있었다. 바로 숙종대 척신()이자 관료로서 활약한 김석주(, 1634∼1684)다.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숙종대 초반의 정국에서 최고의 정치적 변수가 되었던 인물, 김석주의 정치 역정을 따라가보기로 한다.

명문가의 후손, 숙종 초반 정국의 중심에 서다

김석주의 가계도.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를 참고해 그린 것이다.

김석주의 본관은 청풍(), 자는 사백(), 호는 식암()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 김육(, 1580~1658)이고, 아버지는 병조판서 김좌명(), 어머니는 오위도총부도총관() 신익성()의 딸이었다. 할아버지 김육은 효종대 대동법의 실시에 힘쓴 인물이었으며, 아버지 김좌명은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의 아버지인 김우명()의 형이었다. 따라서 김석주는 명성왕후의 사촌이자,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조카가 된다.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 역시 그의 인척으로, 김익훈()은 처 외숙부이고, 김만중()ㆍ김만기()는 그의 처 외사촌이었다. 집안으로는 서인의 대표적인 명문가였으며, 김육의 손자이자 왕비의 사촌오빠라는 후광은 정치적 야망이 컸던 김석주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김석주는 어린 시절 김육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그 뒤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나 서인이 산당()과 한당()으로 분립되고, 송시열의 스승이자 산당의 영수 김집()이 한당의 영수가 된 김육의 대동법을 반대하고 김육의 장례 때의 문제로, 스승인 송시열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이는 김석주의 졸기()에서 확인된다.

김석주의 조부 김육은 일찍이 대동법을 힘써 주장하여 김집()과 의논이 화합하지 아니하였는데, 김집이 이 때문에 조정을 떠나갔고 김육도 서로 기꺼이 굽히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이로써 김육이 사류()와 서로 좋지 않았다고 일컬었다. 김육을 장사할 때에 미쳐 김좌명() 등이 참람하게 수도()를 파니, 대신() 민유중() 등이 법에 의거하여 죄 주기를 청하였다. 이때 송시열이 이조판서가 되어 자못 그 논의를 도와 곧 대간의 논의와 다른 자는 내치고 같은 자는 올리니, 이 때문에 김석주의 집에서는 사류를 깊이 원망하였다.- [숙종실록] 1684년(숙종 10) 9월 20일

김석주는 1657년(효종 8) 24세 되던 해에 진사가 되었으며, 1661년(현종 2) 왕이 직접 성균관에 거둥해 실시한 시험에서 4등을 하여 곧바로 전시(殿)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받았다. 이듬해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이 된 뒤, 정언ㆍ지평ㆍ부교리ㆍ수찬ㆍ헌납ㆍ교리ㆍ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김석주는 당시 서인의 분파가 가속화되자 한당()에 속했다. 이에 따라 집권당이던 산당()과 갈등하였으며, 산당의 압력으로 요직에는 중용되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674년(현종 15)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자의대비)가 며느리인 효종 비 인선왕후의 상복을 입는 문제로 일어난 갑인예송은 김석주가 정국의 중심에 설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김석주는 서인임에도 남인의 온건파 허적(, 1610~1680) 등과 결탁하여 송시열ㆍ송준길()ㆍ김수항() 등을 비판하였고, 결국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 정권이 수립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14세의 숙종은 송시열의 예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였는데, 이것은 정국의 변환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674년 갑인예송의 승리로, 1623년 인조반정 이후 50여 년 간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남인들이 허적, 허목, 윤휴 등을 중심으로 하여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점차 남인 정권의 세력이 강화되자, 김석주는 이를 견제하며 다시 서인들과 제휴했다. ‘김석주는 비록 송시열에게 감정이 있어서 계략을 꾸며 무너뜨리기는 했으나 본래 서인인 까닭에 여러 남인들과 끝까지 협조하지는 않았다.’는 [당의통략]의 기록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김석주는 허적을 경계하였는데, 1678년 영의정 허적이 일시 혁파되었던 도체찰사부(使)를 다시 설치해 오도도체찰사(使)가 되어 군권을 장악하는 등 그에게 힘이 기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숙종은 허적을 견제하기 위해 김석주를 부체찰사로 임명하기도 했다. 허적이 중심이 된 정국을 뒤집기 위해 김석주는 정보원을 곳곳에 포진시켰다. 그리고 입수한 정보를 한성 우윤인 남구만()에게 건넸고, 남구만은 지체 없이 상소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허적의 서자 허견()의 비행이었다. 허견이 김우명의 첩을 때려 이가 부러지게 했으며, 서억만()의 아내 이차옥()도 납치하여 욕보이게 했다는 것이었다1).

여기에 더해 1680년(숙종 6) 3월에 허적이 할아버지 허잠()의 시호를 맞이하는 잔칫날에 이른바 유악(: 왕실에서 사용하는 기름칠한 천막) 사건이 발생하였다. 비가 내려 숙종이 유악을 허적의 집에 보내고자 하였는데, 이미 허적이 허락도 없이 가져갔던 것이다. 더구나 김석주에 의해 남인들이 권력을 잡은 후 전횡을 일삼는다는 보고가 여러 차례 올라오고 있었다. 숙종은 내시를 시켜 거지 모양으로 꾸며 허적의 잔치를 염탐하게 했다. 잔치에 참여한 사람은 거의가 남인들이었고 서인은 김만기, 오도인 등 몇몇뿐이었다. 그야말로 남인들의 잔치, 오늘날로 치면 여당 실세가 주관한 잔치가 대통령이 주관한 모임과 맞먹는 정도의 규모였다고나 할까? 크게 노한 숙종은 영의정인 남인 허적을 파면한 후 서인인 김수항으로 대체하고, 훈련대장 남인 유혁연의 병권을 빼앗고 서인 김만기로 대체하는 등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을 불러들였다. 이른바 경신환국()의 서막이었다.

삼복()의 역모를 고변하다

김석주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정원로() 등에게 허견이 종실인 복창군()ㆍ복선군()ㆍ복평군()과 함께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하게 하였다. 복창군ㆍ복선군ㆍ복평군은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아들들로, ‘삼복()’으로 지칭되었다. 일찍이 정원로의 집에서 허견과 삼복이 모인 일이 있었는데, 복평군 이남이 허견에게 ‘왕은 곧 돌아가실 것이오. 그대의 아비는 나를 왕으로 세우려 했는데 나는 곧 병조판서가 될 것이오. 그대와 피를 나누어 마셔 맹세하고 함께 의논하여 서인을 몰아냅시다.’라고 말한 것을 김석주가 정원로로 하여금 고변하게 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허적과 허견 그리고 삼복()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김석주가 주도한 정치 공작은 결과적으로 남인 축출, 서인 득세의 권력 교체를 가져왔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1680년 경신년에 일어난 환국이라 하여 ‘경신환국’이라 한다. 이때, 공을 세운 자들을 보사공신()에 책봉하였는데, 김석주는 보사공신 1등으로 청성부원군()에 봉해졌다2). 당시 사람들은 김석주가 확실한 증거 없이 역모 사건을 조작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역모의 옥사는 모두 옭아매서 억지로 탐지한 데서 나왔으며,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그 일을 주동한 자는 김석주 등 몇 명뿐이었고, 조정 신하들도 더불어 듣지 못했다. 사람들이 마음으로 의혹했는데, 공신을 추록()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사류들이 더욱 그것을 불평하였다.- 이건창, [당의통략()] 숙종조

당시 보사공신에 김석주ㆍ이립신()ㆍ정원로 등이 책봉되었는데, 뒤에 정원로가 역모에 가담했던 사실이 밝혀져 처형을 당하게 되었다. 정원로는 처형당하기 전에 신범화()도 공범이라고 발설하며, “처음에 바로 고()하지 아니하였던 것은 신범화의 사주(使)를 받았기 때문입니다3).”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신범화는 김석주의 측근이었다. 김석주는 신범화가 무고하고 오히려 공로가 있다고 변호해주었다. 처음에는 신범화를 체포했으나, 의금부가 김석주를 꺼려해서 핵실(: 사실을 조사하여 밝히다)할 수가 없었다4). 김석주의 권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석주는 신범화를 대변하여 말하기를 “신(김석주)이 사실 신범화로 하여금 몰래 반역 상황을 살피게 했습니다. 왕수인()이 기원형()을 보내 신호()를 엿보게 한 일과 같습니다. 지금 조정의 의론이 흉흉한 것은 바로 배반한 적들이 원수를 갚고자 해서이니, 청컨대 신범화의 공()을 녹훈(錄)하여 이로써 그 원통함을 밝히소서.”라고 하였다. 김석주는 명나라 무종() 때에 황족인 신호()가 반역을 음모할 때에 왕수인()이 기원형()을 보내어 정탐한 일이 있었음을 이야기하며5) 신범화를 옹호했고, 신범화는 보사공신에 책봉되었다. 위에서 김석주가 중국의 역사에도 해박했음을 알 수 있으며, 명나라의 정치 공작의 사례를 빗대어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숙종실록]에서는 김석주의 정치 공작이 종사를 보전한 데는 일정한 공이 있긴 하지만 그 ‘과()’가 더 큼을 지적하고 있다.

김석주가 종사를 보전한 데 큰 공이 있었던 것이기는 하였으나, 궁위()를 통하여 주로 밀고하였으니, 이는 본래 남의 신하된 자로서의 올바른 도리는 아니다. …… 세상에서는 진실로 공의 우두머리요 죄의 으뜸인 자로서 김석주를 치고, 후세의 군자도 만약 다시 음양() 소장()의 변화를 논하면서 갑인년 화의 뿌리를 미루어본다면 또 반드시 그 공이 죄를 갚기에 모자란다고 할 것이다. 아! 애석하도다.- [숙종실록(보궐정오)] 1680년(숙종 6) 8월 17일

남인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고변들

1680년 경신환국 이후 김석주는 숙종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 우의정으로 호위대장을 겸직하며 세력을 잡았다. 김석주의 정치 공작 본능은 이후에도 이어진다. 그는 서인이자 인경왕후의 숙부인 김익훈()과 함께 남인을 완전히 제거시키기 위해 다시 음모를 꾀하였다. 김환()을 사주해 허새() 등의 남인들이 모역한다고 고변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김석주는 몰래 무인 김환을 불러 “나라에 큰 변이 있는데 알아낼 방도가 없으니, 네가 잘 정탐하여 고하라”고 하였다. 김환이 그럴 수 없다고 사양하자, 김석주는 위협하면서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너를 베어 죽이리라”하였다. 김석주의 협박으로 김환은 정탐자가 되었고, 김석주는 그에게 정탐하는 방책을 알려주었다.

“지금 허새()ㆍ허영()의 집이 용산()에 있으니, 네가 피접(: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요양함)한다고 칭탁하고 그 이웃에 머물면서 교제를 하되, 매우 친숙해진 뒤에 함께 장기를 두다가 승패가 결정될 무렵에 네가 ‘남의 나라를 빼앗은 것도 마땅히 이러하리라’고 말하면, 그의 기색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그가 이상한 기색이 없거든, 밤에 동침하면서 은밀히 역모를 같이하자고 의논해 보면 그의 진위를 알 수 있으리라6).”

김환은 “만일 저들이 반역할 뜻이 없으면 도리어 내가 반역하는 것이 되는 즉, 어찌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김석주는 “내가 있으니 염려 말아라.”하고 많은 은화를 자금으로 쓰도록 주었다7). 김환이 김석주의 말과 같이 장기를 두면서 그들의 마음을 떠보려 하자 허새와 허영이 과연 응하였다. 김석주의 계략이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다음으로, 김석주는 김환에게 유명견()을 살피도록 하였다. 유명견은 남인의 명사()로 김환은 유명견에게 접근하기 위해 유명견의 문객인 전익대()와 사귀었다. 이때, 김석주가 사은사(使)로 연경에 나가게 되자, 김익훈에게 김환을 부탁하였다. 김익훈은 스스로 공을 세우고자 하여 김환을 급하게 재촉하였다. 이에 김환은 전익대를 자주 찾아갔고, 전익대에게 “다만 유명견이 일찍이 활을 만드는 것을 보았는데 가히 의심이 될 뿐입니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김익훈은 김환을 불러 이 사실을 급히 고변하도록 시켰다. 김환은 밤에 전익대를 가두고 고변할 것을 협박하였다. 전익대는 유명견을 차마 무고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러자 김환은 김익훈에게 허락을 받아 전익대를 가두어 놓고, 먼저 허새와 허영을 모반하였다고 고하였다. 허새와 허영은 굴복하였고, 김환은 드디어 훈신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전익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김환은 전익대가 도리어 자기의 공에 누가 될까 두려워 다시 전익대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김익훈은 이미 가두어 놓은 전익대를 사사로이 풀어놓을 수 없어 답답해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해결사로 나타난 게 바로 정치 공작의 달인 김석주였다. 마침 연경에서 돌아온 김석주는 장계()의 초안을 잡아주고, 이를 바탕으로 김익훈에게 비밀히 계사(: 논죄()에 관하여 임금에게 아뢰는 글)를 올리게 하였다. 이를 본 숙종은 곧 전익대를 잡아 신문하게 하였다. 전익대는 김환이 벼슬에 앉은 것을 보고 유명견이 반역을 모의했다고 고하였다8).

이외에도 김중하()가 민암()을 고변했으나 증거가 없었는데, 이 사건의 기획자 역시 김석주와 김익훈이었다. 1682년 서인이 남인을 정치적으로 몰락시키기기 위해 기획한 이 사건을 모두 합해 ‘임술삼고변()’의 옥사라고 하는데, 이 고변의 총감독이 김석주인 점을 고려하면 그가 얼마나 정치 공작에 능했던 인물인가를 알 수가 있다.

정치 공작으로 마감한 생애

김석주는 음험한 수법으로 여러 차례 남인을 타도할 계책을 세워 같은 서인의 소장파로부터 심한 반감을 사게 되면서, 정치적으로 서서히 몰락했다. 김석주의 몰락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는 데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은퇴해 있던 김석주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러운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1684년(숙종 10),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1세였다. 정국의 고비마다 탁월한 지략으로 정치 공작을 행하여 한때는 왕도 두려워할 만한 막강한 권세를 가졌던 김석주. 그러나 그도 자신의 몸을 갉아먹는 병마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실록에 기록된 그의 졸기 기록은 정탐(), 음유(), 밀고(), 교활() 등의 표현에서 보이듯 정치 공작으로 살아간 그의 한평생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청성부원군 김석주가 졸()하였다. 김석주는 바로 명성왕후의 종부제()인데, 침의()하고 과감()하여 기국과 도량이 있었으나, 권모술수를 숭상하였다. 왕이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여 대비에게 도움을 받아 이루었는데, 탁룡()의 근친()으로 청현()한 자리에 있는 자는 오로지 김석주 한 사람뿐이므로, 드디어 차례를 밟지 아니하고 뛰어올라서 조정 정사에 참여해 들었다. 김석주가 본래 사()와 화목하지 못하여 갑인년의 번복()에 혹은 몰래 알선한 바가 있음을 의심하였으나, 흉당(: 남인)의 세력이 이루어지자, 김석주가 그 사이에 끼어 이미 서로 알력의 혐의로움이 없지 아니하였고, 이남()ㆍ허견() 등의 역모가 처음 싹틀 때에 김석주가 또 그 정상을 정탐해 얻어서 묵묵히 심기()를 운용하며 은밀히 정탐을 일삼다가, 마침내 예단()을 도와 흉얼()을 소탕하니, 종사()를 보존한 공을 사류()가 모두 인정하였다.

그러나 역적을 토벌하고 공을 논할 즈음에 김석주가 임의로 올리고 낮춘 것이 많이 있어서 청의()가 진실로 이미 이를 병통으로 여겼다. 또 김석주가 처음에는 비록 흉당을 제거하는 데 급급하여 한결 같이 정도로 나가지 못하였다 하나, 성공한 뒤에는 오로지 옛 자취를 일변시키고 물러가서 본분을 지켰어야 마땅한데, 도리어 자기의 공을 과대()하여 조정의 권한을 장악하고, 유음(: 어둡고 음험함)한 길과 밀고()하는 문을 만들어 농간을 부리는 것이 이미 익숙해졌고, 수단이 더욱 교활해져 은연중에 한편을 제거할 뜻이 있었다.- [숙종실록(보궐정오)] 1684년(숙종 10) 9월 20일

김석주는 사후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공신의 호()와 관작을 박탈당했다. 이때, 아들 김도연()이 자살하고, 부인 황씨()는 유배당하는 가족사의 비극도 이어졌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복관되었으나, 허새의 옥사가 무고로 드러나면서 남인은 그를 탄핵, 부관참시를 기도하였다. 다행히 숙종의 완강한 반대로 부관참시는 모면하였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가 출향되었으나, 1886년(고종 14) 다시 복권되면서 숙종묘에 배향되었다. 변화무쌍한 정치 공작처럼 그의 사후 운명도 기구했음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