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유자광에 관련된 이미지는 “고변과 음해로 정적을 숙청해 영달하다가 결국은 자신도 유배지에서 삶을 마친 간신” 정도로 요약될 것이다. 이 짧은 글에서 유자광의 다양한 면모를 온전히 서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긍정과 부정의 판단보다는 그에게 주어진 객관적 조건과 시대적 상황을 중시하면서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서자로 태어나다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이해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측면은 객관적 정황이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유자광에게 주어진 가장 일차적인 조건은 서자라는 태생적 오점이었다. 요즘 희극의 요소로도 쓰일 만큼 널리 알려진 홍길동의 한탄이 또렷이 보여주듯이, 그것은 자신의 실수나 선택과는 전혀 무관하지만 일생 전체를 좌우한 거대한 걸림돌이자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었다. 유자광도 물론 그랬다. 서자라는 사실은 유자광의 내면과 행동의 동기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 대응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홍길동처럼 반란과 망명을 선택하는 저항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좀 더 일반적인 양상이라고 생각되는데, 체제에 매우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써 그 장애를 뛰어넘는 순종의 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유자광도 이 길을 선택했다.
뒤에서 보듯이 유자광은 이런저런 관직에 임명되거나 승진할 때마다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래서 그는 두 번이나 1등공신(익대ㆍ정국)에 책봉되며 뛰어난 공로를 인정받았지만, 실제 관직에는 거의 임명되지 못한 특이한 경력을 남겼다. 그가 나타나는 많은 기록의 대부분에서 그는 ‘무령군(武靈君)’이나 ‘무령부원군’이라는 명예직으로만 기재되었다. 그런 반대의 거의 유일한 논거는 그가 서자라는 것이었고, 그 주체는 대부분 대간(臺諫)이었다. 그러므로 유자광은 자신의 출세를 가로막은 구체적 개인에게도 물론 깊은 원한을 품었겠지만, 대간이라는 집단에도 큰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이런 측면은 이 시기의 정치적 갈등을 ‘훈구’와 ‘사림’이라는 신구 지배층의 대립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이 무렵 중요하게 떠오른 대간(삼사)라는 관서에 좀 더 주목해야 할 필요성을 알려준다고 생각한다.
유자광은 경주부윤을 역임한 유규(柳規, ?~1473)의 서자로 세종 21년(1439)에 태어났다. 본관은 영광(靈光)이고 자는 우후(于後)다. 그의 집안은 상당한 명망을 갖고 있었다. 먼저 조부 유두명(柳斗明)은 대언(代言, 정3품)을 지냈으며 증조는 유언(柳漹)이다. 아버지 유규는 음서로 입사한 뒤 무과에 급제(세종 8년〔1426〕)해 단종 때 사헌부 장령(정4품)ㆍ집의(종3품)를 거쳐 세조 때 형조ㆍ호조참의(정3품)ㆍ황해도 관찰사ㆍ경주부윤(이상 종2품) 등을 역임했다. 중앙의 핵심적 요직은 아니지만 상당히 비중 있는 관직이었다고 인정할 수 있다. 정숙(貞肅)이라는 시호가 보여주듯 그는 중후한 인품과 청렴을 높이 평가받았다.
유규는 집에서도 엄숙해 자녀도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만났으며, 유자환과 유자광이 높이 출세했지만 말이나 태도로 나타낸 적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청렴하고 엄숙하다고 크게 칭송받았다. 상사(喪事)를 모두 주자가례에 따르라고 유언했다.- 성종 4년 2월 10일
이 졸기(卒記)가 알려주듯 유규의 적자이자 유자광의 이복형은 유자환(柳子煥, ?~1467)인데, 역시 현달했다. 그는 호가 기산(箕山)이고 시호 문양(文襄)으로, 처음 이름은 유자황(柳子晃)이지만 예종(睿宗)의 휘(諱)를 피해 고쳤다. 유자환은 문종 1년(1451) 문과에 급제한 뒤 세조의 찬탈에 협력해 정난3등공신ㆍ기성군(箕城君)에 책봉되었다. 그 뒤 그는 도승지(정3품)ㆍ대사헌ㆍ이조참판(이상 종2품) 등 요직을 거쳤다. 세조는 “정난할 때 유자환이 내게 ‘마음대로 군사를 소집할 수 없다’고 막았으니 송백(松栢) 같은 절개가 있다고 할 만하다”고 상찬했다. 졸기에서도 “유자환은 관대하고 아량이 있었으며 아랫사람에게 겸손하고 공근(恭謹)했다”고 높이 평가했다(세조 13년 2월 25일).
출세의 시작
유자광과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은 그를 다룬 전기가 여럿 작성되었다는 것이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남곤(南袞)과 유몽인(柳夢寅)의 작품이다. 유자광의 어린 시절을 언급한 두 글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유자광은 부윤 유규의 서자인데, 몸이 날래고 힘이 세며 원숭이같이 높은 곳을 잘 타고 다녔다. 어려서부터 행실이 나빠 도박으로 재물을 다투고, 새벽이나 밤까지 길에서 놀다가 여자를 만나면 붙들어 강간하곤 했다. 유규는 유자광이 미천한 소생으로 이처럼 광패(狂悖)하므로 여러 차례 매를 때리고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남곤, <유자광전>, 허봉, [해동야언] 2
유자광은 감사 유규의 첩이 낳은 아들이다. 남원에서 살았는데 어려서부터 재기가 넘쳤다. 깎아세운 듯한 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시를 짓게 하자 즉시 “뿌리는 땅속에 기반을 두고 형세는 삼한을 누르네”라는 시를 지었다. 유규는 기이하게 생각하고 훗날 그가 크게 성취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유자광에게 매일 [한서]의 열전 하나씩을 외우게 하고 은어(銀魚) 1백 마리를 낚게 했는데, 암송에 막힘이 없었고 고기도 그 숫자를 늘 채웠다.- 유몽인, [어우야담] 권4
흥미롭게도 두 서술은 완전히 상반된다. 그 까닭은 지은이의 정치적ㆍ문학적 성향 등과 관련해 좀 더 깊이 살펴보아야할 주제지만, 유자광이 그만큼 논쟁적인 인물이라는 측면은 충분히 보여준다.
아무튼 두 기록을 종합하면 유자광은 신체와 정신의 능력 모두 상당히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은 사실로 여겨진다. 우선 뛰어난 용력은 여러 기록에 나타난다. 그 가장 대표적인 증거는 뒤에서 보듯이 그가 갑사(甲士)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다음으로 학문적 능력 또한, 어떤 가치 평가를 떠나, 무오사화에서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해석한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다. 성종 20년(1489) 장령 정석견(鄭錫堅)은 유자광이 장악원(掌樂院) 제조(提調)에 임명되자 “그가 비록 궁검(弓劍)과 문묵(文墨)의 재주는 있지만 전국시대(戰國時代) 협객(俠客)과 같다”면서 반대했는데, 부정적 맥락이기는 하지만, 유자광의 실체적 면모에 근접한 평가라고 생각된다(성종 20년 10월 28일).
방금 말했듯이 유자광의 첫 직업은 갑사였다. ‘으뜸가는 군사’라는 그 의미대로 갑사는 국왕 호위와 수도 경비를 맡는 정예병이었다. 그런 임무상 그들은 당연히 뛰어난 무예를 갖춰야 했으며, 의장대로도 활동했기 때문에 용모와 체격도 뛰어나야 했다. 그들은 대체로 부유한 지배층의 자제로 정규 무관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지위를 인정받았으며, 교대로 지방에 내려가 복무하기도 했다.
유자광이 출세하게 된 첫 계기는 세조 13년(1467) 5월에 일어난 이시애(李施愛) 난 이다. 그때 그는 28세의 갑사로 그동안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建春門)을 지키다가 남원으로 내려가 복무하고 있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시애 난은 세조 치세의 맨 끝머리를 뒤흔든 큰 변란이었다. 이시애 난이 일어나자 유자광은 즉시 도성으로 올라와 상소를 올렸다. 그 글에서 그는 “식사를 하다가 수저와 젓가락을 버리고 올라왔다”면서 “갑사에 소속된 뒤 항상 변방에서 공을 세우고 나라를 위해 한번 죽으려고 했다”고 아뢨다. 그때 전황은 관군이 상당히 고전하고 있던 상태였다. 유자광은 “함길도가 험하지만 그런 조건은 적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라면서 과감한 결전을 주장했다. 그는 “신이 미천하더라도 한 구석에서 싸워 조속히 이시애의 머리를 베어 바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적극적인 주장으로 긴 상소를 마쳤다.
세조는 유자광의 글을 보고 경탄했다. “이 글은 내 뜻에 매우 합당하다. 참으로 기특한 재목이니 곧 임용해 그의 옳은 뜻을 시행하겠다.” 서자로 태어나 28세까지 갑사로 복무하던 유자광의 삶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계속해서 세조는 유자광을 불러 이시애를 잡을 방략을 물었는데, 대답이 모두 뜻에 합치했다. 국왕은 그를 크게 포상하고 겸사복(兼司僕, 정3~종9품)에 임명했다. 효용(驍勇)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시험하니, 앞서 나왔던 것처럼, 몇 계단을 한번에 뛰어넘고 큰 기둥을 원숭이처럼 올랐다(세조 13년 6월 14ㆍ16ㆍ30일).
유자광의 방략 덕분이었는지 이시애 난은 석달 만에 진압되었다. 세조가 유자광을 더욱 총애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우선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허통(許通)하고 병조정랑(정5품)에 임명했다. 병조정랑은 병조의 실무를 담당하면서 삼사 관직의 임명에 동의할 수 있는 권한(통청권〔通淸權〕)과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자대권〔自代權〕)을 가진 요직이었다. 놀랄 만한 인사였다.
앞서 유자광은 일생에 걸쳐 관직에 제수될 때마다 대간의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고 말했는데, 그 긴 대립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서자를 허통할 수 없다고 대간이 강력히 반대하자 세조는 단호히 제압했다. “너희들 가운데 유자광 같은 자가 몇 사람인가? 이미 허통한다고 했으니 무슨 관직이든 못하겠는가? 나의 특별한 은혜를 너희가 저지할 수 있겠는가? 나는 절세의 재주를 얻었다고 생각하니 다시 말하지 말라.” 실록은 서얼이 육조 낭관에 임명된 것은 유자광부터 시작되었다고 적었다(세조 13년 7월 14일ㆍ9월 22ㆍ25ㆍ28일).
유자광에 대한 세조의 신임은 더욱 깊어졌다. 재위 마지막 해 세조는 세자와 함께 온양으로 행차했는데 유자광은 총통장(總筒將)으로 수행했다. 거기서 행차를 기념해 별시를 치렀는데, 문과 초시의 대책(對策) 중에 유자광의 답안이 낙방하자 세조는 시험을 주관한 신숙주에게 물었다. “유자광의 답안이 좋은 것 같은데 어째서 합격시키지 않았는가?” 신숙주는 “고어(古語)만 사용한 데다 문법도 소홀해 합격시키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세조는 “고어를 썼더라도 묻는 본의에 어그러지지 않았다면 괜찮다”면서 유자광을 1등으로 삼고 즉시 병조참지(兵曹參知, 정3품)에 제수했다. “조정이 놀라워했다”는 기록대로 파격적인 지시였다(세조 14년 2월 15일). 그러니까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을 계기로 세조에게 발탁된 지 8개월 만에 갑사에서 정3품 당상관에 오른 것이다. 이때 그는 29세였다.
남이의 모반을 고변하다
첫 머리에서 유자광은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더 체제와 밀착되는 협력의 길을 실천했고, 그 동기는 서자라는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노력이었다고 말했다. 그런 협력 중에서 가장 크게 인정받을 수 있는 행동은 고변일 것이다. 변란을 고발하는 그 일은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가장 중대한 범죄를 사전에 진압하는 매우 훌륭한 공헌이기 때문이다.
유자광은 예종이 즉위하고 한 달 뒤, 자신의 첫 고변을 감행했다. 그것은 유명한 남이(南怡, 1441~1468)의 모반이다. 유자광은 남이가 한명회(韓明澮)ㆍ김국광(金國光) 등을 죽이고 임금을 바꾸려 한다고 고변했고, 짧은 심문을 거쳐 남이를 비롯해 강순(康純)ㆍ조경치(曺敬治)ㆍ변영수(卞永壽) 등이 가혹하게 처형되었다.
유자광은 당연히 크게 포상되었다. 우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책봉되었던 적개공신에서 2등으로 추록되고, 남이의 옥사로 책봉된 익대(翊戴)공신에서는 1등 및 무령군에 녹훈된 것이다. 공신 명단의 가장 첫 머리에 그의 이름이 기재되었다는 사실은 이 사건에서 세운 그의 공로에 대한 평가를 웅변한다(예종 즉위년 10월 24ㆍ27ㆍ28ㆍ30일).
이제 유자광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이때부터 성종 8년(1477) 무렵까지 그는 안정된 지위를 누리면서 조정의 여러 현안에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성종 7년 정희대비(貞熹大妃)의 수렴청정 중단을 한명회가 반대하자 즉각 탄핵한 것은 유자광의 견고한 지위와 기민한 정치적 판단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성종 7년 2월 19일). 그는 이듬해 도총관(都摠管)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대간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성종 8년 윤2월 27일).
첫 번째 유배
순탄하던 그에게 첫 위기가 닥쳐왔다. 발단은 성종 8년 7월 도승지 현석규(玄碩圭)와 우승지 임사홍(任士洪, 1445~1506)의 대립이었다. 그 해의 간지를 따라 ‘무술옥사(戊戌獄事)’로도 불리는 이 사안은 한 간통 사건을 놓고 승지들의 의견이 갈라지면서 시작되었다. 현석규는 강간으로 결론지은 의금부의 판결에 찬성했지만, 임사홍을 비롯한 그밖의 승지들은 거기에 반대했다. 일단 결론은 현석규와 의금부의 판단이 옳다는 쪽으로 내려졌다. 그러나 현석규가 다른 승지들과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그들을 ‘너’라고 부르는 등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 사간원의 탄핵이 제기되면서 문제는 확대되었다.
매우 복잡하게 전개된 이 사건에서 유자광은 문제를 촉발시킨 현석규를 계속 승진시킨 성종의 조처에 반대하다가 이듬해 5월 결국 동래(東萊)에 유배되었다. 그는 4년 뒤 직첩을 돌려받을 때까지 침체의 시간을 보냈다(성종 8년 8월 23일;9년 5월 8일;13년 7월 23일).
재기와 무오사화의 발발
통일신라시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함양학사루(咸陽學士樓). 김종직이 이곳 군수로 있을 때,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의 시를 보고 철거를 명했다고 한다. 경남 함양군 함양읍에 있으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유자광은 성종 16년(1485) 5월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 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로 임명되어 7년 만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이때도 품계는 높았지만 실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이제 그는 46세의 장년이었다.
그 뒤 그는 중종 2년(1507)에 두 번째로 귀양가 최후를 마치기까지 20년 넘게 확고한 지위를 지켰다. 우선 성종 후반에는 두 번이나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왔다(17년 10월 정조사, 18년 10월 등극 하례사). 그러나 이 기간에도 실직에 임명되는 데는 계속 실패했다. 한성부 판윤(성종 18년 6월)과 황해도 관찰사(성종 22년 12월)에 제수되었지만 대간의 반대로 모두 무산되었다.
1494년에 연산군이 즉위했을 때 유자광은 55세였다. 유자광은 그 위험한 12년의 치세를 무사히 넘겼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입지를 더욱 부각시켰다. 그 중요한 계기는 연산군 4년(1498) 7월에 일어난 무오사화였다. 널리 알려졌듯이 유자광은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사초로 촉발된 그 사건에서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의 숨은 뜻을 밝혀내 그 사화가 확대된 규모로 종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연산군일기]에서는 그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유자광은 옥사를 처벌하는 일이 점차 느슨해지자 자기 뜻을 다하지 못할까 걱정해 일을 진전시킬 방법을 밤낮으로 궁리했다. 하루는 소매 속에서 책 한 권을 내놓았는데, 바로 김종직의 문집이었다. 그는 그 문집 가운데서 <조의제문>과 <술주시(述酒詩)>를 지목해 추관(推官)들에게 보이면서 “이것은 모두 세조를 가리킨 것이다. 김일손의 악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서 이뤄진 것”이라고 말하고는 즉시 스스로 주석을 만들어 글귀마다 풀이해 국왕이 쉽게 알도록 했다.- 연산군 4년 7월 29일
그 해석의 타당성이나 사화의 의미를 여기서 깊이 논의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유자광은 그동안 위기 때마다 보여준 기민한 정치적 감각과 과감한 행동을 이 사건에서 가장 극적으로 연출했다고 생각된다. 거기에는 함양 학사루(學士樓)에 걸린 유자광의 시판을 김종직이 철거한 사건과 관련된 개인적 감정도 개입했을 것이다(참고로 함양은 유자광의 처가인데, 장인이 그곳의 향리였다. 김종직은 성종 6년〔1475〕에 함양군수의 임기를 채우고 자리를 옮겼다). 뒤에서 보듯 그를 간신이자 악인으로 규정하게 만든 결정적 굴레 또한 무오사화를 계기로 씌워졌다.
중종반정에 참여하다
수많은 폭정을 자행하던 연산군은 결국 재위 12년 만에 최초의 반정으로 쫓겨났다. 하룻밤 만에 간단히 성공한 반정은 그 역사적 의미만큼이나 무거운 현실적 문제를 남겼다. 가장 큰 문제는 처벌―적어도 자숙이나 퇴진―의 대상이어야 할 연산군 때의 주요 신하들이 대부분 그대로 남아 요직을 장악하고 공신에도 책봉된 것이다.
물론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폭정은 그야말로 극한적인 수준까지 치달았고, 거기에 협력한 인물은 매우 소수였다. 대부분의 신하는 목숨을 지키려고 그저 순종한 측면이 컸다. 이런 상황적 정황을 감안하더라도 그때까지 가장 많은 인원인 120명에 가까운 공신을 양산한 것은 반정 세력의 탐욕과 몰염치가 분명했다. 이런 문제의 불씨는 14년 뒤 기묘사화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유자광은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적극 가담했다. 그는 궁궐 문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진을 쳤고, 그 공로로 정국1등공신에 책봉되었다(중종 1년〔1506〕 9월 2ㆍ8일). 그러나 두 차례나 1등에 책봉된 공신은 여전히 실직에는 나아가지 못했다. 얼마 뒤 그의 품계를 ‘대광(大匡, 정1품)’으로 올리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대간의 반대로 실패했다(중종 2년 윤1월 4일). 이때 그는 68세였다. 아마 유자광은 평생 이어진 대간의 반대가 참으로 집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유배지에서의 최후
정국1등공신에 책봉되었지만 유자광의 몰락은 곧 닥쳐왔다. 연산군 때 두 사화의 원흉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중종 2년(1507) 윤정월에 조광보(趙光輔)라는 인물이 핵심 대신인 박원종(朴元宗)ㆍ노공필(盧公弼) 등을 죽이려고 한 사건이 발각되었는데, 그는 국문을 받으면서 유자광이 무오사화를 일으킨 소인이라고 비판했다. 유자광은 “김종직의 남은 무리가 비밀히 중상하려 하니 마음놓고 서울에 있을 수 없다”면서 시골로 물러가겠다고 밝혔다(중종 2년 2월 2일).
그러나 대간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두 달 가까이 탄핵을 지속했고, 마침내 유자광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중종은 일단 유자광을 파직시켰다. 그러나 대간은 만족하지 않았고, 갑자사화도 그가 주모했다는 죄목까지 추가했다. 결국 당시의 가장 핵심적인 실세인 좌의정 박원종도 대간에 동의함으로써 유자광은 두 번째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중종 2년 4월 13ㆍ16ㆍ22ㆍ23일).
유자광은 처음에는 평해(平海, 지금 경상북도 울진)로 유배되고 정국공신에서도 삭훈되었으며, 자손들도 멀리 귀양갔다. 그때의 사평(史評)은 유자광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압축하고 있다.
유자광은 무오년의 옥사를 주창하고 다시 갑자년의 사화를 일으켜 사대부가 다 죽고 종사가 거의 뒤집어질 뻔했는데도 목숨을 보전해 천명대로 살게 되었으니, 유배지에서 죽더라도 나라를 그르친 자의 경계가 될 수 있겠는가?- 중종 2년 5월 1일
이 사평대로 유자광은 5년 뒤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73년에 걸친 파란 많은 인생이었다. 야사([음애일기〔陰崖日記〕] 등)에 따르면 그는 유배된 뒤 눈이 멀어갔다고 한다. 이듬해에 “익대공신은 그 자신이 애쓴 공로이니 되돌려주라”는 조치가 내려졌지만(중종 8년 11월 12일) 그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철회되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강고하게 이어지고 있다.
내면의 한 모습
끝으로 그의 내면을 비쳐준다고 생각되는 모습을 하나 살펴보려고 한다. 그것은 그가 어머니에게 많은 효성을 쏟았다는 사실이다. 대수롭지 않은 내용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평생 그를 따라다닌 서자라는 낙인과 결부해 그의 내면을 비쳐주는 한 거울로 여겨진다.
유자광은 이시애 난으로 세조에게 발탁된 직후부터 어머니를 챙겼다. 그는 남원으로 어머니를 문안 갔고, 조정에서는 약품과 휴가와 역마를 지급했다(세조 13년 12월 14일). 동래로 첫 유배를 갔을 때에도 어머니에 대한 생각은 가시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기구한 가정사를 밝히면서 자신을 어머니가 계신 남원으로 옮겨달라고 간청했다. “올해 제 어미의 나이가 71세입니다. 신의 어미는 세 아들을 낳았지만 유자형(柳子炯)은 지난 계사년(성종 4, 1473)에 병들어 죽었고, 신이 동래에 유배된 뒤에는 유자정(柳子晶)이 모시고 있었는데, 집안의 화변(禍變)이 가시지 않아 그도 지난해에 병들어 죽었습니다.”(성종 11년 10월 28일)
그러나 유자광의 효성은 점차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성종 21년(1490) 그는 남원에 있는 어머니를 모셔오려는데 연로해 말을 탈 수 없으니 가마꾼을 지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윤허는 받았지만 사평은 그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했다. “유자광은 서얼에서 일어나 지나치게 주상의 은혜를 입어 1품에 이르렀다. 어미의 병을 칭탁하고 1년에 두세 번씩 고향에 가니, 그가 지나는 주현(州縣)은 접대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으며, 그가 살던 고향에서 일으키는 폐단도 말할 수 없이 많았다. 지금 또 가마꾼을 달라고 주청하니 그가 은혜를 의지하고 총애를 믿어 이처럼 꺼리는 바가 없었다(성종 21년 2월 9일).”
이런 문제는 연산군 1년(1495) 어머니가 별세하면서 마지막으로 불거졌다. 사간원은 유자광이 사치스럽게 초상을 치렀다고 탄핵했다. 그러자 유자광은 긴 상소를 올려 반박했다. 그 내용과 어조는 주의 깊게 읽어볼 만하다.
그러나 의례를 뛰어넘어 상여(喪轝)를 만들었다고 탄핵한 것은 마음속으로 원통하게 생각합니다. 무명과 보통 명주로 꾸미고 먼 길에 부러지고 상하기 쉽기 때문에 틀나무[機木]를 튼튼하게 만들어 조금 무거웠을 뿐인데, 어째서 의례를 뛰어넘었다고 하는지 마음속으로 원통하게 생각합니다. 66명이 상여를 메고 갔는데 어째서 1백여 명이라고 했는지 마음속으로 원통하게 생각합니다. 방상씨(方相氏, 악귀를 막는 목적으로 탈을 쓰고 상여를 이끄는 사람)는 상례에서 으레 사용하는 것인데, 어째서 사용할 수 없다고 하는지 마음속으로 원통하게 생각합니다. 신은 경기에서 남원에 이르는 길의 역참마다 미리 양곡을 모아놓았으며, 양성(陽城)ㆍ공주(公州)ㆍ연산(連山)ㆍ은진(恩津)ㆍ여산(礪山)ㆍ임실(任實)에는 신의 전장(田莊)이 있어서 유숙하는 곳에서는 노복(奴僕)들이 필요한 물품을 각자 마련하되, 그래도 중도에 비용이 넉넉지 못할까 해서 두 수레로 잡물과 쌀ㆍ콩ㆍ소금ㆍ장(醬)을 싣고 갔습니다. 추종(騶從)은 상여를 호행(護行)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일가 권속이 모두 갔으니 그 수효가 많기는 했지만, 거리가 먼데 가난한 고을에서 어찌 다 접대했겠습니까? 약간의 곡물과 마초(馬草)를 주거나 일부 인원에게 접대했으며, 길가에 제물을 배설하고 애도한 자까지 있었는데 그것을 물리치지 않은 것은 신의 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사대부가 어버이의 영구를 모시고 가는 곳마다 모두 그러합니다. 이것은 모두 아들로서의 정리와 다른 사람의 상사를 애도하는 뜻에서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실정이 이런데, 신이 추종을 많이 데리고 가서 각 고을에 식사를 대게 한 듯이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지 신은 원통하게 생각합니다.- 연산군 1년 5월 3일
“원통하게 생각한다”는 거듭된 표현이 보여주듯, 이 상소에서 유자광은 강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그 불만의 핵심은 통용되는 관행임에도 자신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다. 여기서 밝히진 않았지만 그 까닭은 그가 서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어머니를 모시는 데 많은 마음을 쓴 것은, 효심의 발로이기도 하겠지만, 서자라는 자신의 서러운 처지를 극복하려는 몸부림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앞서 보았듯 유자광은 이미 당대에 간신이자 악인으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그런 평가는 지금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가 여러 정치적 고변―가장 결정적으로는 무오사화―을 감행해 사건을 확대시킨 것은 사실로 판단된다. 친일파의 행태에서 가장 잘 보이듯이, 그가 민감한 정치적 국면에 적극 개입한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서자라는 신분의 낙인을 감추고 출세하려는 욕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이나 1등공신에 책봉된 사실이 보여주듯 그는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실직에 거의 임명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 출세에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는 측면 또한 보여준다. 그가 ‘원통하다’고 되뇌인 궁극적 원인은 자신의 신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분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학연’이나 ‘지연’ 등을 고리로 한 ‘순혈주의’가 적지 않게 잔존해 있다. 짧고 성글게나마 유자광에 관련된 글을 쓰면서 그 시대에 서자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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