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적 우호의 감정을 엄격히 자제하더라도 조선 세종의 업적은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그 수준과 분량 모두 탁월한 성취를 거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국정 운영에서 특히 높이 살 부분은 문무 중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고 고루 뛰어난 성과를 거뒀다는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한글 창제를 필두로 수많은 서적의 편찬과 농업ㆍ과학기술의 발전, 공법(貢法, 조선 전기 토지에 대한 세금 제도)의 도입 등이 문치의 정수를 형성한다면, 4군 6진을 개척해 국경을 확장한 것은 무치의 핵심을 이룰 것이다. 이런 위업은 물론 세종 자신의 뛰어난 자질과 능력에 크게 기인했지만, 뛰어난 신하들의 보필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이 글의 주인공인 최윤덕(崔潤德, 1376〔우왕 2〕∼1445〔세종 27〕)은 그런 세종의 시대를 대표하는 무장으로 북방 개척과 방어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그의 이력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무과로 입신한 무반임에도 최고의 문반직인 좌의정까지 올랐다는 사실이다. 세속적 성공의 일차적인 관건은 물론 자신의 뛰어난 능력이겠지만, ‘지음(知音)’이라는 오래된 성어가 웅변하듯, 그것을 알아보고 후원하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절실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최윤덕의 현달(顯達)은 문반 중심의 사회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은 세종의 판단력과 실천력을 보여주는 한 증거가 될 것이다.
이제 보듯이 최윤덕은 70년의 긴 생애 동안 그야말로 ‘출장입상(出將入相)’이라는 표현에 걸맞은 활약을 펼쳤다.
무반 가문에서 태어나다
최윤덕은 본관이 통천(通川)이며 자는 여화(汝和)ㆍ백수(白修), 호는 임곡(霖谷),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그는 고려가 무너지기 직전인 우왕 2년(1376)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에서 최운해(崔雲海, 1347~1404)와 창원 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으로 최윤복(崔潤福), 최윤온(崔潤溫), 최윤례(崔潤禮)가 있는데 계모(안동 권씨)의 소생이다.
그의 가문은 대를 이은 무반 집안이었다. 우선 조부 최록(崔祿)은 호군(護軍, 정4품)을 지냈다. 아버지 최운해는 좀 더 현달했는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에게 협력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한 공로로 조선이 개창된 뒤 원종공신에 책봉되었으며, 태조 2년(1393)에는 강원도 통천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통천 최씨라는 다소 낯선 관향은 이때의 전공으로 하사받은 것이었다. 최운해는 서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 2품 이상)와 승추부사(承樞府事. 정2품)를 지냈으며 양장(襄莊)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가 태종 4년(1404)에 세상을 떠나자 사관은 높은 평가가 담긴 졸기를 실었다.
최운해는 20세 무렵부터 종군했는데, 용맹과 지략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순흥부사(順興府使)가 되었을 때 왜구가 들끓자 최운해는 자기의 즐거움을 물리치고 작은 물건까지도 남에게 나누어주어 사력(死力)을 다하게 했으며, 먼저 적진에 들어가 궤멸시켜 여러 번 크게 승리하니 이름이 알려졌다. 충주(忠州)ㆍ전주(全州)ㆍ광주목사(廣州牧使)와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는데, 마음을 다해 백성을 어루만지고 사랑하니 이르는 곳마다 인애(仁愛)의 덕이 넘쳤다. 위엄과 은혜가 함께 나타나 명장이라고 불렸다(태종 4년 7월 9일).
뛰어난 힘과 용기
예나 지금이나 군인의 삶은 안온하지 않다. 그리고 그 영향은 당연히 그 가족에게 미친다. 뛰어난 무장을 아버지로 둔 최윤덕도 그랬다. 최윤덕은 5세(우왕 7년〔1381〕) 때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그때 아버지는 변방을 지키느라 나가 있었기 때문에 같은 마을에 사는 양수척(楊水尺)에게서 양육되었다. 양수척은 사냥을 하거나 버드나무로 그릇 등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천민이다. 아버지가 무반이었으므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지는 않았겠지만, 양수척에게서 길러졌으니 일반적인 경우보다 거칠고 험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최윤덕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힘과 용기를 발휘했다. 야사에는 그런 일화가 여럿 기록되어 있다. 그는 특히 활을 잘 쏘았는데, 산에서 소와 말을 먹이는 도중에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자 화살 하나로 쏘아 죽이고는 돌아와 양수척에게 “얼룩무늬를 가진 큰 짐승이 나오길래 쏘아 죽였다”고 말했다. 호랑이라는 짐승을 몰랐다는 사실은 그가 상당히 어린 나이였음을 알려준다.
유명한 문학가 서거정은 자신이 쓴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이런 그의 재능을 꽃피워준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 서미성(徐彌性)이었다고 밝혔다. 서미성이 합포(合浦, 예전 경상남도 마산)를 지킬 때 최윤덕을 기르던 양수척이 찾아와 그의 뛰어난 무예를 극찬했다. 서미성이 “한번 시험해 보겠다”고 하고 함께 사냥을 나갔는데, 최윤덕은 이리저리 달리며 쏘아 맞히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감탄했지만, 서미성은 좀 더 날카로웠다. 그는 웃으면서 “이 아이가 손이 빠르긴 하지만 아직 사냥꾼의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한 뒤 활쏘기와 말 달리기를 가르쳤고, 그 결과 최윤덕은 명장이 되었다고 한다.
일정한 과장이나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런 기록들은 최윤덕이 어릴 때부터 힘과 용기, 무예의 재능이 출중했다는 사실을 공통적으로 알려준다. 청년으로 접어들면서 최윤덕은 이런 재능을 활짝 꽃피우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출세의 시작
무장으로서 최윤덕의 공식적인 경력은 태조 3년(1394) 18세로 소과에 급제하면서 시작되었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이때부터 최윤덕은 함경도 이성(泥城) 순무사ㆍ경상도 병마도절제사 등으로 있던 아버지를 따라 참전해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그가 본격적으로 출세한 것은 태종 때부터였다. 태종이 등극했을 때 최윤덕은 24세의 청년이었다. 최윤덕은 태종 2년(1402)에 낭장(郎將, 정6품)이 된 뒤, 호군ㆍ대호군(종3품, 태종 3)ㆍ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 태종 6)ㆍ상호군(정3품, 태종 10)으로 계속 승진했다. 태종 10년에는 무과에도 급제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당시의 주요한 무장으로 성장해갔다.
최윤덕이 본격적인 야전 지휘관으로 활약한 것은 태종 10~16년에 걸쳐 동북면 방어를 맡으면서부터였다. 당시 이른바 만주 지역은 여진족이 흩어져 점거하고 있었다. 그들은 압록강 일대의 건주(建州) 여진, 흑룡강 일대의 야인(野人) 여진, 지린성 장춘을 근거지로 한 해서(海西) 여진으로 나뉘는데, 그중 가장 강성했던 건주 여진은 나중에 청을 건국한 누르하치를 배출하기도 했다.
태종부터 세종 초반까지 여진족은 점차 남하해 연해주, 두만강, 압록강 유역은 물론 조선의 군사력이 미치지 못한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까지 넘나들었다. 그들은 조선에 복종하면서 평화롭게 지내다가도 갑자기 침략과 약탈을 자행해 변방의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가장 피해가 큰 곳은 최북방인 여연(閭延)과 경원(慶源)이었다.
첫 피해는 태종 10년 4~5월에 올량합(兀良哈) 등이 경원 등지를 습격해 군사 90여 명을 죽이고 남녀 80여 명과 말과 소 120여 마리를 빼앗아간 사건이었다. 최윤덕은 즉시 경성병마사(鏡城兵馬使, 정3품)에 임명되어 현지로 파견되었으며, 그 뒤 계속해서 경성절제사(鏡城節制使, 정3품)ㆍ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종2품, 태종 12년)ㆍ경성등처절제사(鏡城等處節制使, 태종 13년)로 재임하면서 야인의 습격을 효과적으로 퇴치했다.
이런 동북면 근무는 태종 17년 3월에 도성으로 돌아오기까지 6년 넘게 이어졌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 지역이 생활하기 매우 힘든 곳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을 여러 조건을 감안하면 무척 고된 복무였을 것이다. 그러나 뒤에서 보듯이 최윤덕은 고관이 된 뒤에도 평안도와 함경도에 빈번히 파견되었으며, 나아가 그런 무장의 직무를 기꺼이 자임했다. 본연의 직무에 투철한 40대의 강직한 무장은 이제 세종 때의 국방 정책을 주도해나갔다.
북방 개척과 국방 정책을 주도하다
최윤덕이 도성으로 돌아온 1년 뒤 중앙 조정에는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되고 충녕대군이 새로 책봉되는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태종 18년 6월). 태종의 여러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이것은 조선의 국운을 좌우한 결정이었다.
세자를 교체한 두 달 뒤 태종은 전격적으로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지만, 승하하기까지 4년 동안 인사와 국방에 관련된 사안은 직접 처결하면서 갑작스럽게 시작된 세종의 치세가 안정되도록 도왔다. 태종의 인정을 받은 장수로서 최윤덕은 이 시기에 추진된 여러 국방 사안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았다. 우선 그는 세종이 즉위한 직후―다시 말해서 태종이 인사와 군사권을 갖고 있을 때―참찬 겸 삼군도절제사에 임명됨으로써 무반을 넘어 고위 문반직에 오르는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세종 1년〔1419〕 4월).
두 달 뒤에는 세종 초반의 가장 중요한 전역(戰役)인 쓰시마 정벌―이것 역시 태종이 주도한 것이었다―에 참여했다. 1만 7천여 명이 출전해 적 100여 명을 죽이고 적선 109척과 가옥 2천 여 호를 불태우고 귀환한 이 작전에서 최윤덕은 삼군도절제사로서 삼군도통사 유정현(柳廷顯), 삼군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와 함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그 뒤 그는 공조판서로 서울 성곽 보수를 주도하고(세종 3년) 정조사(正朝使,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 새해를 축하하러 중국으로 가던 사신)로 명에 파견되기도 했다(세종 3년 10월~4년 2월).
세종의 진정한 치세는 재위 4년(1422) 5월에 태종이 승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때 최윤덕은 참찬과 판서(정2품)를 지낸 46세의 원숙한 관원이었다. 최윤덕은 세종의 북방 개척을 주도했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는 여진족이 자주 침입했고, 그 때문에 경원에 있던 도호부를 용성(지금의 함경북도 청진 남쪽)으로 후퇴시키자는 의견까지 적지 않게 제기되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그런 퇴영적 타협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경원 일대가 조선의 발상지이므로 결코 내줄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오히려 그 지역을 조선의 영토로 확보하는 역공을 선택했다. 최윤덕은 7세 아래의 김종서(金宗瑞, 1383~1453)와 함께 북방 개척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우선 최윤덕은 세종 5년 평안도 병마도절제사에 제수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세종 7년(1425) 7월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어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2년 넘게 변방에서 복무했다. “경이 변진(邊鎭, 변방을 지키는 군영)에 간 것이 거의 두 돌이 되었으니 당연히 교대되어야 하지만 장수의 적임자를 얻기란 참으로 어렵다. 또 지금 북쪽 국경에 사변이 있으니 경을 더 머무르게 해 변방의 안정을 기대하려고 한다. 짐의 지극한 뜻을 이해하라(세종 6년 12월).”는 세종의 당부에는 그에 대한 미안함과 깊은 신뢰가 묻어난다.
중앙으로 복귀한 최윤덕은 사복시 제조(정2품, 세종 8년)ㆍ판좌군부사(判左軍府事, 세종 9년 1월)를 거쳐 병조판서(세종 10년 윤4월)에 임명됨으로써 국방 정책을 주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최윤덕의 국방 정책에서 특징적인 부분은 축성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했다는 것으로 지적된다. “예로부터 안위(安危)란 때를 타고 서로 바뀌는 법입니다. 오늘은 편안하다고 해도 훗날 위태로울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도랑을 깊이 파고 성을 높이 쌓아 방어를 견고히 하면 만대라도 의외의 사변이란 없을 것입니다(세종 17년 3월 28일).”는 발언은 그런 생각을 압축하고 있다.
앞서 공조판서가 되었을 때도 도성 성곽을 보수했지만, 병조판서에 제수되자 그는 관련 사업을 더욱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우선 국방의 요충지인 동북면 일대에 성을 쌓았다. 그런 지역은 남방으로도 확대되었다. 최윤덕은 세종 11년 12월 충청ㆍ전라ㆍ경상 삼도 도순문사에 임명되자 해당 지역에서 보수하거나 신축할 성을 아뢰게 했고, 그 보고에 따라 경상도 영일ㆍ곤남(昆南, 지금 경상남도 사천)ㆍ합포, 전라도 임피ㆍ무안ㆍ순천, 충청도 비인ㆍ보령 등지에 성을 새로 쌓거나 수축했다. 이때 대간은 비용과 시점 등의 여러 이유를 들며 강력히 반대했지만, 세종은 최윤덕의 판단을 재가했다.
이런 결정에서 보듯이 이 시기 최윤덕에 대한 세종의 신임은 매우 깊었다. 국왕은 그가 “곧고 착실해 거짓이 없으며, 근신(謹愼)해 직무를 봉행하니 태종께서 인재라고 생각해 의정부에 등용하셨다. 고려와 개국 초기에 무신으로 정승에 제수된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 모두 어찌 최윤덕보다 뛰어나겠는가? 그는 수상도 할 만하다.”고 높이 평가했다(세종 14년 6월 9일).
8년 가까이 중앙에서 재직한 최윤덕은 다시 북방으로 나가게 되었다. 세종 14년(1432) 12월 건주 여진의 추장인 이만주(李滿住)가 함길도 여연을 침범해 조선군 50여 명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이듬해 1월 57세의 최윤덕은 함길도 도절제사에 임명되어 기병 1만 명, 보병 5천 명을 거느리고 출정했다. 최윤덕이 지휘한 조선군은 적군 180여 명을 죽이고 230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마소 80여 마리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5월 초에 귀환했다. 아군의 피해는 전사 4명, 부상 25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 승전은 침범한 여진족을 응징했다는 표면적 의미를 넘어 4군 개척을 시작했다는 역사적 무게를 갖고 있다고 평가된다. 즉 여진족이 점거하고 있던 압록강 상류 지역의 4군을 영토로 편입시키기 시작함으로써 조선은 국토 확장과 함께 강력한 방어 체계를 구축하는 이중의 목표를 추진한 것이다. 또 하나의 주요한 성과인 6진(경원ㆍ온성ㆍ종성ㆍ회령ㆍ부령ㆍ경흥) 개척은 널리 알 듯이 그 뒤 김종서가 이끌었다.
출장입상의 생애
“수상도 할만하다”는 국왕의 평가대로 최윤덕은 출정을 마친 직후인 세종 15년(1433) 5월 우의정에 임명됨으로써 마침내 정승에 올랐다. 열 달 뒤에는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의 후임으로 좌의정에 제수되었다(세종 16년 2월). 58세 때의 일이었다.
최고의 문반직에 오른 노년의 대신이었지만 그는 변방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체 없이 출동했다. 우의정이 된 지 한 달 만에 야인이 다시 침범하자 평안도 도안무찰리사(都安撫察理使)로 나갔고, 세종 27년(1445) 7월에도 서북면 변경에서 야인의 침범이 발생하자 평안도 도안무찰리사로 출정했다. 이때 그는 69세의 완연한 노령이었다.
이런 행동 자체가 가장 뚜렷한 증거겠지만, 그는 오직 국방에만 전념하는 무장으로 자처했다. 우의정에 임명된 직후 그 자리를 사직하면서 올린 상소는 그런 견결한 자세를 또렷이 보여준다.
“의정의 직책은 본래 용렬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경륜하고 음양을 조화시키는 일은 무신이 의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신은 늘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외적을 막아 북방을 안정시키는 일이라면 신은 이 몸이 다할 때까지 마음과 힘을 다할 것입니다(세종 16년 2월 5일).”
모든 사람이 선망하는 최고의 자리에, 그것도 문반 위주의 사회에서 무반으로 올랐지만, 자신에게 더욱 합당한 직무가 있다는 이유로 사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방금 보았듯이 69세에도 평안도로 출정했다는 사실 등은 이때의 발언이 허구가 아니었음을 충분히 보여준다. 좌의정일 때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변방 방어와 군비 강화를 건의한 24개항의 비변사의(備邊事宜)는 그의 국방 정책이 집약된 문건으로 평가된다(세종 17년 4월 13일).
일흔의 노장이자 재상은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인 궤장(几杖, 나라에 큰 공로를 세운 70세 이상의 대신에게 하사한 의자와 지팡이)을 하사받은 직후인 세종 27년 12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실록의 졸기에서는 그가 “순진ㆍ솔직ㆍ간소ㆍ평이한 성품에 용략(勇略)이 많아 한 시대의 명장이 되었다”고 상찬했다(세종 27년 12월 5일). 세종 때 그의 위상과 공로는 영의정 황희(黃喜), 좌의정 허조(許稠)ㆍ신개(申槩), 이조판서 이수(李隨)와 함께 세종 묘정에 배향되었다는 사실이 웅변한다.
진정한 무장의 자세
최윤덕 장군의 묘. 묘 아랫부분은 커다란 화강석을 사용하여 2단으로 쌓고 그 위에 흙으로 둥글게 봉분을 만들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21호로, 경남 창원시 북면에 위치해 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방금 인용한 졸기의 평가는 아마도 무장에게 바쳐진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무장도 복잡한 내면과 생각을 가질 수 있지만, 생사를 걸고 승패를 겨루는 냉엄한 전투를 기본 업무로 삼는다는 특징상 그들이 가진 삶의 자세는 문신보다 상대적으로 간결하고 소박하기 쉬울 것이다.
최윤덕은 ‘순진ㆍ솔직ㆍ간소ㆍ평이’하다는 졸기의 평가에 합당한 일화를 여럿 남겼다. 이를테면 태안군수로 있을 때(태종 6년) 화살통의 쇠장식이 헐어 떨어지자 공인(工人)이 관가의 쇠를 사용해 고쳤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도로 떼어내게 했다(<행장>).
이런 청렴하고 검박한 성품은 오래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찬성으로 평안도 도절제사 판안주목사(判安州牧使)를 겸임할 때 그는 공무가 끝나면 관청 뒤 빈 땅에 오이를 심고 손수 가꿨다. 하루는 어떤 백성이 소송하러 왔는데 농부의 행색을 한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대감은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다. 최윤덕은 “아무 곳에 있다”고 대답하고는 들어가 옷을 바꿔 입고 판결에 나섰다.
백성을 사랑하는 의분(義憤)도 컸다. 최윤덕은 어떤 아낙의 남편이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는 사실을 알자 그 호랑이를 추적해 쏘아 죽인 뒤 그 배를 갈라 유해를 꺼내 예우를 갖춰 매장해주었다. 그 아낙은 물론 그 고을 백성들이 그를 부모처럼 사모했다고 한다(이륙〔李陸〕, [청파극담]).
어느 정도 과장되었을 수는 있어도 이런 일화들이 허구는 아닐 것이다. 생계를 유지하려는 절박한 노동은 아니지만 어떤 지위의 인물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행색을 하고 일하는 소박함이나 자신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호랑이를 잡아 원수를 갚아준 헌신은 예나 지금이나 드물고 고귀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이 패기 넘치는 젊은 날의 일화가 아니라 고관에 오른 노년의 일들이라는 사실은 더욱 드물고 고귀하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의 임무는 자신과 관계없는 일들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특히 우리 사회에서, 그 ‘관계없는 일’들은 권력이나 재화처럼 세속적으로 탐스러운 가치들이기 쉽다. 최윤덕은 그런 세속적 가치에 흔들리지 않고 70년의 긴 생애 동안 거친 무장의 삶을 오롯이 걸어간 한 전범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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