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영남 사림파의 영수이자 문장가, 관료, 김종직

히메스타 2016. 6. 24. 09:03

 

 

일러스트

1498년 무오사화()의 단서를 제공하고 부관참시를 당한 인물. 조선 전기 훈구파에 대항한 참신한 정치 세력이었던 사림파의 영수. 이처럼 김종직(, 1431~1492)에게는 ‘사림파의 영수’라는 명예가 늘 따라다녔고, 그래서인지 그에 대한 이미지는 꼿꼿한 선비이자 학자로만 이해되는 경향이 크다.

물론 김종직은 그 문하에서 후배 사림파들을 두루 배출하여 조선 전기 영남 사림파가 정치와 사상의 중심에 진입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김종직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문장가였고, 세조에서 성종대에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을 지낸 관료이기도 했다.

세조와 성종대, 관료로서 활약하다

김종직의 자는 계온(), 호는 점필재(), 본관은 선산()이다. 김숙자()의 아들로 어머니는 밀양 박씨이다. 1431년 6월 밀양부 서쪽 대동리()에서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김숙자는 선산에 은거한 길재(, 1353~1419)에게 성리학을 배우면서, 정몽주 - 길재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성리학의 도통()을 계승하는 기틀을 닦았으며, 김종직 또한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워 사림파의 학문적 전통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종직은 은거의 길을 고집하지 않고 출사의 길로 나섰다. 1446년 과거에 낙제하는 아픔을 겪었으나, 1453년 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겨울에는 창녕 조씨()와 초례()를 올렸다. 1456년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는 낙향을 하며 여묘살이를 하였다. 이 무렵 그의 인품과 학문에 감화를 받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459년의 연보에 ‘선생은 사문()을 진작시키고 후인()을 가르쳐 인도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으니, 쇄소()의 예를 행하고 육예()의 학문을 닦는 제자들이 앞에 가득하였다.’는 기록은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1459년 형의 권유로 문과()에 합격한 후 중앙 관직에 진출한 김종직은 승문원의 저작, 박사 등을 역임하였다. 세조가 집현전을 없애고 글 잘하는 선비 10명을 선발하여 예문()을 겸하게 할 적에는 형 김종석()과 함께 선발되기도 했다.

성종이 즉위한 후 집현전의 예에 의거하여 예문관의 인원을 늘려서 문학하는 선비를 선발하여 충당시켜 모두 경연관을 겸하게 하였는데, 김종직은 수찬()에 선발되었다. 이후 김종직은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지방 관직을 자처하였고, 함양군수()로 나가게 되었다. 1471년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은, 관내의 정자에 유자광(, 1439~1512)이 쓴 시를 걸어둔 것을 발견했다. 김종직은 “그 따위 자광()이 감히 현판을 걸었단 말이냐.”하고는, 즉시 명하여 거두어서 불태워버리게 하였다. 이 사건은 1498년 무오사화를 주모한 유자광이 김종직에게 복수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1475년 김종직은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승문원 참교()에 제수되었지만, 어머니가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선산부사(使)에 제수되었다. 함양군수, 선산부사 등 영남 지역에서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문하에는 김굉필(), 정여창() 등 훗날 사림파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몰려들었다. 1479년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고, 삼년상을 마치고는 금산()에 있다가, 1482년에 왕명을 받고 다시 중앙으로 올라왔다. 이후 성종의 깊은 신임 속에 승진을 거듭하여 홍문관 응교, 직제학, 부제학, 동부승지, 도승지, 이조참판 등 중앙의 요직을 두로 거쳤다. 당시 경연당상()은 다만 조강()에 참여하여 모셨을 뿐이었는데, 성종은 특별히 김종직을 주강()에도 참여하게 하였다. 1485년 55세로 이조참판으로 있던 중 남평() 문씨 문극정()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그때 부인의 나이 18세였으니, 그보다 무려 37살이나 어렸다. 새로 결혼한 이듬해에는 늦둥이 아들 숭년()을 얻는 기쁨을 얻었다. 1487년 전라도관찰사, 1488년 공조참판을 지냈고, 1489년 형조판서를 제수 받았으나, 신병이 심해져 사직을 하고 밀양의 옛집으로 돌아갔다가 이곳에서 1492년 6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성종실록]의 김종직 졸기()에는 ‘시호를 문간()으로 고쳤는데, 문학이 넓고 본 것이 많은 것이 문()이고 경()에 거()하여 간소()하게 행동함이 간()이다. 김종직은 자호()를 ‘점필재’라고 하였으며, 저술한 글이 몇 권이 있다. 찬집()한 [청구풍아()]ㆍ[동문수()]가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종직을 다시 불러낸 <조의제문>

흔히 조선 성리학의 학통은 정몽주에서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과 정여창, 조광조로 이어지는 학맥으로 공식화되었다. 이들은 사림파 혹은 도학파로 불리는데, 길재와 정몽주의 학문을 이은 인물들이다. 김종직에 대해서는 사림파의 영수로서, 평생 재야에서 은거의 삶을 선택했을 것 같은 선입견을 갖지만, 실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세조, 성종대에 관료로서의 삶을 살아간 관료학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영남 사림파의 중심 역할을 하는 것은 부친인 김숙자가 길재의 학문을 이어받았고,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 영남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김종직의 문하에서 활약했기 때문이다. 김종직의 사림파적인 입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소학]의 이념이었다.

조선 전기 사림파 학자를 특징짓는 요소 중 하나가 성리학의 실천이며 그 중심에 [소학]이 있었다. 김종직은 제자들에게 늘 [소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소학동자’로 평가 받는 김굉필의 문집인 [경현록()]에는 ‘일찍이 점필재 김 선생에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소학]을 가르치며 말하기를,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두려면 마땅히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광풍제월()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니 김굉필이 마음에 간직하여 잊지 않고 게을리 하지 않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김종직을 사림파의 영수로 확실하게 기억시켜준 것은 그의 사후에 일어난 1498년의 무오사화()였다. 사관()으로 있던 그의 문인 김일손(, 1464~1498)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수록하였고, 이것이 연산군 대에 필화 사건으로 이어진 것이다.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이름 석 자에 ‘영남 사림파의 영수’라는 칭호가 늘 따라붙게 하는 대표적인 근거가 되었다. <조의제문>은 1457년, 김종직이 27세가 되던 해에 쓴 글이었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4년(1498년) 7월 17일에 기록된 내용을 보자.

지금 그 제자 김일손이 찬수한 사초() 내에 부도()한 말로 선왕조의 일을 터무니없이 기록하고 또 그 스승 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었다. 그 말에 이르기를, ‘정축(1457년) 10월 어느 날에 나는 밀성()으로부터 경산()으로 향하여 답계역()에서 자는데, 꿈에 신()이 칠장()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양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나라 회왕() 손심()인데, 서초 패왕(西)에게 살해 되어 빈강()에 잠겼다.” 하고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생각하기를 “회왕은 남초() 사람이요, 나는 동이() 사람으로 지역의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역시 천 년이 휠씬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정녕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하고, 드디어 문장을 지어 조문한다.’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 오상()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라서 풍부하고 이적이라서 인색한 바 아니거늘,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을손가. 그러기에 나는 이인() 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하노라. ……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쓴 것은 초나라 회왕(), 즉 의제의 죽음을 조문하기 위해서였는데, 숙부인 서초패왕 항우에게 희생당한 어린 조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의제를 조문하는 내용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제자인 김일손은 스승의 이 글이 사림파의 의식을 가장 잘 반영했다고 판단하여 사초()에 실었다. 그러나 이 사초 문제는 1498년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었고, 결국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는 화를 입었다. 그러나 이 희생은 역설적으로 사림파 영수 김종직의 이름을 후대까지 널리 기억하게 만들었다.

김종직은 관료로 활약하면서도 사림파로서의 입장을 수시로 피력하였다. 세조 때에는 잡학()을 비판하다가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다음은 [세조실록](1464년 8월 6일)에 실린 당시의 정황이다.

김종직이 아뢰기를, “지금 문신()으로 천문ㆍ지리ㆍ음양ㆍ율려()ㆍ의약()ㆍ복서()ㆍ시사()의 7학()을 나누어 닦게 하는데, 그러나 시사()는 본래 유자()의 일이지만, 그 나머지 잡학()이야 어찌 유자들이 마땅히 힘써 배울 학()이겠습니까? …… 그 능통()하는 데에 반드시 문신이라야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학()을 하는 자들이 모두 용렬한 무리인지라 마음을 오로지하여 뜻을 이루는 자가 드물기 때문에 너희들로 하여금 이것을 배우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김종직은 경박()한 사람이다. 잡학()은 나도 뜻을 두는 바인데, 김종직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은가?……파직을 시키라.”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파들은 [소학]을 중심으로 하는 도()의 개인적 실천과 교육 활동에 힘쓰게 되고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향촌 교화의 노력으로도 이어진다. 김종직은 [주례()]의 향사례ㆍ향음주례의 시행 보급을 목적으로 유향소() 제도를 부활할 것을 주장하고, 학규를 만드는 등 평생을 도학 이념의 전파와 그것의 일용에서의 실천을 보급하는데 힘썼다. 김종직이 사림파 학자로서 지방민을 위해 애쓴 모습은 [점필재집] 연보 45세(1475년)의 다음 기록에서도 볼 수가 있다.

함양성()의 나각()이 모두 243칸()이었는데, 한 칸마다 세 가호()가 함께 출력()하여 볏짚으로 지붕을 이어왔다. 그런데 해마다 비바람에 지붕이 걷힐 때면 비록 한창 농사철이라 할지라도 백성들이 반드시 우마차에 볏짚과 재목을 싣고 와서 수리를 하곤 하였다. 역대에 걸쳐 계속 이렇게 해오다 보니, 백성들이 매우 괴롭게 여기었다. 그래서 2월 어느 날에 선생이 부로()들과 상의하여 다시 전지() 10결()을 비율로 삼아 한 칸마다 거의 열 가호씩을 배정해서 그 썩은 재목을 바꾸고 또 기와를 이게 하였더니, 한 가호에 겨우 기와 10여 장씩만 내놓아도 충분하였고, 일도 5일이 채 못 가서 마치게 되었다. 백성들이 처음에는 졸속하게 경장()시키려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으나, 일이 완성된 뒤에는 모두 기뻐하며 좋다고 일컬었다.

함양군수 시절 김종직이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개발하고 이를 실천하는데 힘을 쏟은 점은, ‘김모()는 군을 잘 다스려서 명성이 있으니, 영전()시키라.’고 할 만큼 성종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문장가 김종직

점필재문집책판() 및 이존록(). 무오사화로 소실된 원고를 모아 김종직의 조카 강중진()이 중종 12년(1517)에 선산에서 [점필재문집]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책판은 1789년 이관하여 현재 예림서원에 소장되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5로 지정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흔히 사림파 학자라고 하면 경서나 성리학 이론에 해박하고 문장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사림파와 훈구파를 구분할 때도 사림파는 경학을 중시한다고 해서 경학파(), 훈구파는 문장을 중시해서 사장파()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종직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구분이 잘 적용되지 않는다. 김종직은 어린 시절부터 문장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으며, 세조~성종대의 대표적인 문장가이기도 했다.

[점필재집] 연보에 의거하면, 김종직은 기억력이 좋고 글씨를 잘 썼으며, 일찍부터 시()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날마다 수만 마디의 말을 기억하여 약관이 되기도 전에 신동이라 알려졌다. 15세에 이미 시문에 능하여 많은 문장을 지었으며, 20세가 못 되어 문장으로 이름을 크게 떨쳤다. 그의 나이 16세 때 과거 시험에서 지은 <백룡부()>는 낙방이 되었으나, 이를 본 태학사() 김수온()이 “이는 후일에 문형()을 맡을 솜씨이다.”라며 크게 감탄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30세에 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을 때 승문원의 선배였던 어세겸()은 그의 시를 보고 탄식하며 “나보고 말 채찍을 잡고 하인이 되라 해도 달게 받아 들이겠다.”라고 한 기록도 있다.

세조, 성종 시기에 김종직은 왕명을 받들어 세조의 왕세자빈 한씨()의 애책문()을 비롯하여, 성종대에는 인수대비의 옥책문(), 예종의 시책문() 등 주요 문장을 짓는데 두루 참여하였다. 성종은 특히 김종직을 총애하여 왕명으로 수많은 글을 짓게 하고, [동국여지승람]의 수정을 맡기기도 했다. 당시 사관의 평가에서도 ‘김종직이 문장을 잘 짓기 때문에 특별히 지우를 입어, 승정원에 들어가 좌부승지로 옮겼다가 차례를 뛰어넘어 도승지에 제수되니, 사림()이 다 눈을 씻고 그가 하는 일을 바라보았다.([성종실록] 성종 15년 8월 6일)’고 하여 김종직이 문장력으로 승진을 거듭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김종직의 행적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되는 것은, 훈구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고 있는 신숙주(, 1417~1475)의 문집 서문을 쓴 점이다. 사림파와 훈구파의 영수로서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대립했을 것만 같지만, 실제 세조, 성종대의 편찬 사업에 함께 참여했고 문집의 서문을 써준 것에서 두 사람의 친분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점필재집]에 기록된 신숙주 문집의 서문인 <신문충공문집서()>에서 김종직은 무엇보다 신숙주가 자신을 이끌어준 데 대해 깊은 고마움을 표현하였다. ‘종직()은 궁벽한 시골의 만진()으로서 처음 괴원(, 승문원)에서부터 공의 알아줌을 입었었다. 그리하여 공이 [병장설()]을 주석할 적에 내가 외람되이 속관()으로 있었는데, 하루는 내가 문병()에서 공의 명령을 받들고 있을 때, 공은 막 손들과 술을 마시면서 한 마디 말로 온 좌중에 나의 장점을 칭찬해 주었으니, 나를 개발시키고 성취시켜 준 그 은혜를 어찌 감히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 신숙주에 대한 찬사는 이어진다.

공(신숙주)은 국량이 넓고 크며 재식()이 매우 해박하여 벼슬을 시작한 이후로 재상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평소 가슴속에 온축된 것들이 발산되어 경세제민()의 용도가 되었다. 공은 모든 사물이 앞에 이르면 기미를 맞아 응접()하여 좌우로 수작()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온축된 것이 나오면 나올수록 더욱 끝이 없어 그 한계를 도무지 헤아릴 수 없음을 탄복하였다. …… 사업에 시용()한 것만 이러할 뿐이 아니다. 문장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모두 인의()와 충신()에 근본하여, 여유 있고 화창하며 탁월하고 광대하여 번거롭게 법칙을 가하지 않아도 절로 법도가 있다.

사림파의 영수가 훈구파의 영수를 평가하는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찬사가 넘치는 문장을 보면,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 구도가 당대에는 그리 심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대개 김종직은 영남 사림파의 영수로 평가를 받지만, 15세기 세조~성종대의 관료 학자이자 문장가로서의 면모도 다분히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문장가, 관료, 사림파라는 그를 대변해주는 키워드 중에서 ‘사림파’가 그를 대표하는 용어로 자리를 잡은 것은 연산군대에 사화()가 본격화되고, 그가 피화()의 중심에 섰던 점이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유호인, 남효온과 같은 쟁쟁한 사림파 제자들을 배출한 점은 ‘사림파의 영수’로서 김종직을 기억하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김종직은 조선 전기 영남 출신의 사림파 학자였고, 김굉필과 정여창 등 많은 제자를 길러낸 교육자였다. 또한 뛰어난 문장 능력을 인정받은 문장가였으며, 대부분의 생애를 관직에 종사한 관료였다. 사림파의 영수로만 알려진 김종직에게 이렇듯 여러 측면이 나타나는 것에서 조선 전기 지식인의 다양한 모습들을 살펴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