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17세기 소신과 원칙 직언의 정치인, 조경

히메스타 2016. 7. 1. 11:19
일러스트

용주() 조경(, 1586~1669)은 선조에서 현종 시기까지 오랜 세월을 살아가면서 정치적으로 남인의 입장을 유지한 인물이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대내적으로 붕당정치가 치열하게 전개되던 때였고, 대외적으로는 명과 후금(후의 청나라)과의 사이에서 조선의 국제적인 긴장 관계가 지속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 조경은 84세까지 장수하면서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지만, 이제까지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요인으로는 조선 중기 이후 정치사ㆍ사상사 연구의 경향이 강성의 정치인이나, 학파의 수장이 되는 인물을 연구의 중심으로 삼았던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조경은 국내ㆍ외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살면서 자신의 정치적 소신과 원칙을 직언()으로 나타낸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광해군 시기의 은거 생활

조경의 자는 일장(), 호는 용주(), 본관은 한양이다. 1586년 10월 6일 한양의 숭교방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공조좌랑 조현()이며, 부는 사섬시 봉사 조익남()이었다. 어머니는 문화 유씨()로 유개()의 딸이었다. 1602년 17세 때 안동 김씨 김찬()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1남 3녀를 두었다. 약관에 문장을 잘하여 이항복과 차천로가 그의 재주를 인정하였으나, 과거 진출은 늦은 편이었다.

1612년(광해군 4) 27세의 나이에 사마시에 선발되었으나, 다음 해 4월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여묘살이(상제가 무덤 근처에서 여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를 하였다. 이 기간은 광해군대 북인의 핵심 세력인 이이첨(, 1560~1623)이 정국의 중심에 서서 공안정국을 조성했던 시대였다.

조경은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전개되자 거창()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출사 대신에 은거의 길을 택한 것이다. 거창에서 은거를 할 때 조경과 친분을 맺은 인물이 허목(, 1595~1682)이었다. “미수 허목이 그의 아버지를 따라 거창으로 왔으므로, 그와 더불어 종유()하면서 몹시 친하게 지냈다”고 연보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때에 모계() 문위(, 1555~1632)에게 학문을 배웠다. 문위는 산림의 학자로서 명망이 아주 높았다. 훗날 남인의 영수가 되는 허목과의 친분은 조경이 남인으로 인식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인조대의 강직했던 언관 활동

광해군 정권의 폭정을 피해 은거의 삶을 추구하던 조경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북인 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참여한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대내외 정책에 있어서 많은 변화가 수반되었다.

조경은 인조반정 이후 유일(: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를 대상으로 하는 인재 등용책)로 천거를 받아 오랜 은거 생활에서 벗어났다. 1624년에는 형조좌랑과 목천현감을 지냈다. 목천현감 재임 시에는 백성의 병폐를 물어보고 학교를 수리하니, 고을 사람들로부터 잘 다스린다는 평판을 받았다. 1626년 초시와 정시()에 연거푸 장원급제를 했고, 이후에는 주로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관직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627년에 건주 여진(후금)이 조선에 쳐들어와 연달아 평안도의 안주와 평양을 함락하는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정묘호란 때 인조와 소현세자는 분조()를 하여, 세자가 전주에 머물게 되었다. 조경은 세자를 따라가 전주에 머물다가 3월에 다시 강화도로 들어갔다.

1628년 조정에 돌아온 조경은 언관직을 주로 역임하면서 언론 활동을 해나갔다. 당시 조경을 가장 견제한 인물은 인조반정의 핵심이자 서인 세력의 중심 인물인 이귀(, 1557~1633)였다. 이귀는 서인 학문의 원류가 되는 이이와 성혼의 업적을 강조하면서, “조경은 경망스러운 신진으로 그의 재주와 학문, 덕망이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더 나은지는 모르겠으나 조정의 공적인 시비를 가지고 원훈()과 재신()들을 모욕하고 산림의 선비들을 헐뜯었으니 그가 조정을 무시하고 사림을 멸시한 것이 극심하다”면서 조경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는 조경이 이귀 등 훈신들을 강하게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1629년에 조경은 독서당에 선발되었고, 이후에도 수찬, 교리, 이조좌랑, 이조정랑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631년 이조정랑 재임 시에는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는 문제가 정국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광해군은 왕통에서 제외되고, 인조는 할아버지인 선조로부터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조를 추대한 세력들을 중심으로 비정상적인 왕통을 바로잡을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는 문제가 검토되었던 것이다.

당시 예론의 대가인 김장생은 정원군을 백숙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고, 박지계는 정원군을 아버지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지계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인조가 원했던 방향이었기 때문에 왕의 측근 공신인 이귀, 최명길 등이 주로 찬성했다. 1631년 4월 인조는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원군 추숭의 뜻을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대신들이 이에 극력 반대하자 인조는 명나라 황제에게 주청하여 허락을 받지 못하면 그때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 논의가 끊이질 않았고, 유생들의 반대 상소 또한 빗발쳤다.

조경 역시 원종(정원군) 추숭을 강하게 반대했다. 인조는 “조경, 장유()의 무리는 허명(: 실속 없는 헛된 명성)을 얻고자 하여 분주히 배척한다”면서 불편한 심정을 피력했지만 조경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조경은 원종 추숭을 주도한 박지계를 벌레에, 이서를 쥐에, 그리고 이귀에 대해서는 그 고기를 먹고 싶다고 표현했다1). 결국 조경은 외직인 지례현감으로 밀려났고, 1632년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거창 등지에서 보냈다. 1633년 8월 이조정랑이 되면서 조경은 다시 중앙 관직에 복귀하였다.

언관으로서 조경의 강직했던 면모는 1636년 6월 사간으로 있으면서 구언(: 임금이 신하의 바른말을 구함)에 응하여 올린 봉사(: 상소)에서 당시 권력의 실세인 좌의정 홍서봉()의 뇌물 수수 사건을 강하게 비판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조경이 홍서봉의 부정과 비리를 조목조목 비판하자, 인조는 오히려 조경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조경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신이 홍서봉에 대해서 분개하는 것은, 국가를 편안히 하고 사직을 이롭게 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 집을 부유하게 하기에만 힘쓰고 있으며, 음양을 다스리고 사시를 순하게 할 것은 생각하지 않은 채 오직 자신만 살찌우기에 힘써, 오욕스런 말을 달갑게 받으면서 허물을 고치고 뉘우칠 줄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면서 국왕인 인조에게도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였다. 재상이라면 무엇보다 사익()보다 공익()을 추구해야 함을 지적한 것이었다.

세자빈의 사사를 반대하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12월 14일 외적의 경보가 아주 급하다는 소식을 들은 조경은 부인과 처자식을 동생인 후() 및 사위 이유정()에게 맡기고, 두 종과 함께 말 한 마리를 타고 길을 떠났다. 당시에는 남한산성이 이미 청군들에게 포위되어 있어서 조경은 성 안으로 가지 못하고 과천의 관악산으로 들어갔다. 637년 조경은 인조를 남한산성에서 모시지 못한 것에 대해 스스로 탄핵을 하고, 거창으로 들어가 머물렀다.

1638년 4월에는 사간으로 복귀하여 국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이지만 명과의 사대 외교를 추진해야 한다고 건의하면서 척화론의 입장을 견지했다. 1643에는 통신부사로 임명되어 일본을 다녀오면서 기행문을 남겼다. 1645년에는 소현세자가 귀국 후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세자의 상사에 분곡()하였다. 11월에는 대사간에 제수되어 시폐(: 시대의 잘못된 폐단)를 지적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조경의 연보에는 “민생의 곤궁하고 초췌함, 재이가 겹쳐 일어남, 궁금()이 엄하지 않음, 시조(: 조정에 나아가 정사를 보는 일)를 아주 뜸하게 함, 절약과 검소함을 먼저 하고 폐단의 근원을 막을 것을 말하였으며, 심술을 바르게 하라는 것으로 본론을 삼고, 동궁을 잘 보도하라는 것으로 결론을 삼았는데, 거의 수천 마디나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2). 직언하는 정치인 조경의 면모가 잘 드러난 부분이다.

1646년 2월에는 형조참판에 이어 대사헌에 올랐다. 당시 정국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소현세자빈 강씨의 사사() 문제였다. 조경은 강빈의 사사를 극력 반대하였다. 결국 강빈이 사사되고 그녀의 세 아들이 제주도로 유배되자 조경은 세 아들의 해배(: 귀양을 풀어줌)를 거듭 청하였다.

정치적 사안마다 인조의 처사를 비판했지만 조경에 대한 인조의 신임은 각별했다. 그가 원칙과 소신에 입각하여 비판할 것을 비판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1646년에는 양관 대제학에 이어 이조참판, 대사간,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1647년에는 62세의 나이로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제수받았다. 이 무렵 조경은 관노 출신으로 청나라 역관이 되어 조선에 갖은 악행을 일삼던 정명수(, ?~1653)와 이형장(, ?~1651)에 대해서도 강력히 대처할 것을 주장하였다. 연보에는 “정명수가 끝까지 선생을 원수처럼 보면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었다”고 기록하고 있다3).

효종대의 정치 활동과 계속되는 직언

1649년 인조의 뒤를 이어 효종이 즉위한 후 조경은 이조판서에 올랐다. 이때 조경을 탄핵하는 이유태(, 1607~1684)의 상소가 올라왔다. 조경이 일찍이 사헌부에 있을 적에 원두표()가 당을 세우고 권력을 요구함에 대해 논핵(: 잘못을 논하여 꾸짖음)했었는데, 이유태가 그것을 꼬투리 잡아 공격했던 것이다. [당의통략]에는 “조경이 사헌부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여러 남인들과 함께 모든 당을 엎으려고 하였다4)”고 하여 당시 서인들에 대해 정치적인 견제를 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조경은 자신에 대한 탄핵 상소가 올라오자 세 번 상소하여 이조판서에서 물러났다.

1650년 조경은 청나라 사신과 갈등을 일으키면서 의주의 백마산성에 갇히는 수난을 겪었다.

청나라의 칙사가 서울에 들어와 남별궁()에 머물렀다. 다음날 새벽에 서청(西)에 나와 앉아 있으면서 삼공과 육경과 승지와 양사의 관원들을 불러들여 죽 늘어앉게 하였다. 청나라 사람들이 타락죽〔漿〕을 여러 신하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먹게 하였는데, 조경은 홀로 물리치고 받아먹지 않았다. 이후에도 청나라 칙사의 무례한 요구에 대해 조경은 당당한 입장을 보였고, 결국에는 척화를 했다는 이유로 이경석과 함께 백마산성에 안치되게 되었다.

1651년 2월 백마산성에서 서울로 돌아온 조경은 포천으로 들어가 작은 집을 짓고 ‘관거재()’라는 편액을 달았다. 관거재 시절에는 백로주()ㆍ삼부락()ㆍ화적연()ㆍ백운동() 등지를 주로 노닐었다. 1652년 11월에는 구언() 전지(: 승정원 담당 승지를 통하여 전달되는 왕명서)에 응하여 민생의 곤궁함과 사치의 성함과 수신의 요체에서부터 성삼문에게 정려를 내리고, 정온(, 1569~1641)에게 시호를 추증할 것을 요청하였다. 사육신과 정온에 대한 포상은 절의와 척화를 지킨 인물에 대한 국가의 보상을 요청한 것으로, 조경의 삶에서 일관된 것이었다. 1653년에는 부모의 봉양을 청원하여 회양부사(使)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봄에 풍악산(금강산)을 유람한 다음 이어 사은하고 돌아왔다.

1654년 10월 전 판서 조경은 김홍욱(, 1602~1654)의 장살(: 형벌로 매를 쳐서 죽임) 사건에 대하여 그 잘못을 지목하였다. 김홍욱은 강빈의 신원과 소현세자 셋째 아들의 석방을 요청하는 직언으로 효종을 격분시켰고, 결국 장살을 당한 인물이다. 김홍욱 장살 사건은 당시 정국의 뜨거운 감자였다. 조경은 “지금 인사의 잘못을 하나하나 셀 만큼 두루 알지는 못하나 김홍욱 옥사에서부터 대신은 광보(: 잘못을 바로잡으며 도움)하는 도리를 상실했고, 대간은 입을 다물고 있는 습관이 조장되었으며, 언로가 막히고 아첨하는 풍조를 이루었습니다” 면서 김홍욱 장살 문제로 언로가 막힌 문제점을 강하게 직언하였다.

1655년 조경은 70세로 기로()가 되었다. 효종은 쌀과 고기 및 월봉()을 하사하였는데, 조경은 사양하고 이를 받지 않았다. 1657년에는 상소하여 윤근수ㆍ정경세의 시호에 대해 논한 일을 말하고, 심대부ㆍ유계의 죄를 너그럽게 용서해 줄 것을 청하였다. 김육이나 윤근수, 정경세, 유계 등을 변호하고 추숭한 사례에서는 그가 서인이나 남인의 당파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능력이 있는 인물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음을 볼 수 있다.

1658년 가을에는 기로소(: 조선시대에 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에 오로회()를 두었는데, 영의정 김육(, 1580~1658)은 79세, 판중추 윤경은 92세, 해은군 윤이지는 80세, 조경은 73세, 판서 오준은 72세였다5). 효종대 조경은 국가 원로로 인정을 받았는데, 김육이나 조경과 같은 원로의 존재감은 매우 컸다. 조경은 중요한 사안마다 국왕에 대해 엄격한 직언을 하였고, 이를 통해 이 시기 언로 확보에 중요한 공헌을 한 것으로 보인다.

윤선도의 예론을 지지하다

조경의 초상. 그는 선조에서 현종대까지 84년을 장수하면서 국가 원로로서 소임을 다한 정치인이었다. 대내적으로는 광해군의 즉위와 몰락, 인조반정과 서인 정권의 수립, 효종의 즉위와 북벌 정책, 예송논쟁 등 붕당정치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대외적으로는 두 차례의 호란을 겪으며 국제 관계의 긴장이 지속되었던 이때 그는 정치인으로서 소신 있는 모습을 보여왔다.

1659년(효종 10년) 5월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였다. 현종의 즉위 때 조경은 73세로, 산전수전 다 겪은 국가 원로가 되어 있었다. 1660년 나라에 큰 기근이 들자 조경은 상소문을 올려 기근을 진휼하는 일을 말하고, 명나라 신하 도융이 지은 [황정고()]를 올리면서 기근에 대처하는 방법들을 적극 모색할 것을 건의했다. 1661년에는 현종이 가뭄이 심해 구언 상소를 올리자 이에 응하였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가 효종의 상에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의 문제로 서인과 남인 간의 치열한 정치적 대립이 전개된 기해예송의 여파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서인 쪽에서는 송시열, 숭준길 등이 중심이 되어 1년복을 주장했고, 남인 쪽에서는 허목, 윤휴 등이 나서서 3년복을 주장하였다. 상복이 서인 측의 주장대로 1년복으로 정해지자, 남인 윤선도(, 15287~1671)는 상소를 올려 서인 송시열의 논리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6). 결국 윤선도는 함경도 삼수로 유배길에 올랐는데, 조경이 구언 상소에 응하면서 윤선도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였다. 남인이기는 했지만 당파적 입장이 그리 강하지 않았던 조경이었지만, 소신에 의해 윤선도 구원 상소를 올린 것이다.

그러나 이 상소문은 결과적으로 조경을 확실한 남인 정치인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당의통략]의 “판부사 조경은 노성한 이로서 중망이 있었고, 수찬 홍우원은 맑은 선비로 이름이 났었다. 그러나 이때에 와서 이들은 모두 윤선도를 구원한 까닭에 금고를 당하고 쓰이지 못하니 남인들이 더욱 불쾌히 여겼다7).”는 기록에서는 윤선도 구원 상소를 계기로 조경이 남인 정치인들에게 동류로 인식되는 경향을 볼 수가 있다.

1665년 조경은 80세로 ‘자급을 올려주고 월봉을 지급하라’는 현종의 명으로 숭록대부에 올랐다. 1668년 가을에는 백운산에 들어갔다가 현종이 온천에 거둥한다는 말을 듣고 곧 돌아왔다. 1669년(현종 10) 2월 4일, 조경은 8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부음이 알려지자 현종은 이틀 간 조회를 보지 않고 골목 시장을 쉬게 하였다고 한다. 1669년 4월 선영이 있는 무덤 북쪽 10리 녹문(鹿)의 동쪽 기슭 남향한 곳에 조경의 장지가 조성되었다.

조경을 기억해야 하는 까닭

조경이 활동한 시기는 선조대에 시작된 붕당정치가 극심했던 때였다. 당파 간의 치열한 정치적 대립이 있었고, 후금의 성장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전통적인 대외 관계에 있어서도 큰 혼란이 있던 시기였다. 이 시기 조경은 84세까지 장수하면서 현종대까지 국가 원로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였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또한 정치적으로 격변기였다. 광해군의 즉위와 몰락, 1623년의 인조반정과 서인 정권의 수립, 1627년 정묘호란, 1636년의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 효종의 즉위와 북벌 정책, 현종 대의 예송논쟁 등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던 시대였다.

조경은 당파상으로 남인에 속한다고 볼 수 있지만, 남인의 정치적 입장을 강하게 내세우기보다는 원칙과 소신에 입각하여 자신의 정치관을 피력하였다. 특히 언관직을 수행하면서는 권력의 실세에 대한 강한 비판을 멈추지 않는 강직한 정치인의 표상이 되었다. 사안에 따라서는 국왕의 처사에 대해서도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면서 권력에 굴하지 않는 면모를 보였다. 인조가 생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하자 이에 적극 반대하였고, 소현세자빈 강씨의 사사()나 소현세자 아들의 처벌에 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강빈()의 신원을 청한 김홍욱을 변호하고, 서인의 중심 송시열에 맞선 윤선도의 예론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청나라의 권력을 빙자해 조선에 오만하게 굴던 정명수의 위세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조경은 당파적 입장이 강하지 않았기에, 김육, 이경석, 정경세, 윤선도 등 서인과 남인을 막론하고 당대의 명망가들과 두루 교분을 유지하였다. 그가 교유 관계를 맺은 일차적 기준은 국익을 추구하는 능력 있는 정치인이자 학자였다. 그러나 현종대 예송논쟁으로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할 때, 남인 윤선도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남인 정치인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84세까지 장수하면서 선조 이후 현종대까지 격동의 역사를 살아간 정치인 조경은 한결같이 원칙과 소신에 입각한 정치 행보를 보였다. 당리당략만을 앞세우고, 보스의 눈치만 보는 오늘날의 정치 현실 때문일까? 왕과 권력에 굴하지 않고 직언()을 한 ‘소신의 정치인’ 조경의 모습은 지금의 시대에도 많은 울림을 주고 있다.

신병주 이미지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사의 대중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 KBS <역사추리>, <역사스페셜>, <한국사 > 등의 자문을 맡았고, 현재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 고정적으로 출연하고 있다. 쓴 책으로는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조선 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조선 중, 후기 지성사 연구],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이지함 평전], [조선평전],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이 있다. 최근에는 조선 시대 사학회 연구이사, 남명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외교통상부 외규장각도서 자문포럼 위원으로 활동하며 조선 시대의 왕실 문화와 기록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