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의 붉은 군대가 제3제국의 수도 베를린을 향해 돌격해 들어가던 1945년. 4월 30일인지 5월 초인지 날짜는 분명하지 않다. 영국 런던의 BBC 월드 서비스에서 청취 요원으로 근무하던 36세의 오스트리아 출신 남자는 독일 라디오방송을 듣던 중 심상치 않은 조짐을 발견했다. 그는 즉각 상부에 이를 보고한다.
“독일 방송에서 곧 모종의 발표가 있겠다며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 2악장을 내보내고 있다. 이 악장은 브루크너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죽음을 추모하며 쓴 것이다. 바그너는 히틀러가 경모했던 작곡가이기도 하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히틀러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누구보다 앞서 역사적 순간을 파악한 이 남자의 이름은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 1909-2001)였다. 오늘날 역사적 명저인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로 추앙받고 있는 미술사학자 곰브리치가 바로 그였다.
오스트리아 유대인 출신의 곰브리치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 <출처: Wikipedia>
정확한 순간에 정확한 정보를 뽑아낼 능력을 증명한 데서 나타났듯, 곰브리치가 BBC 월드 서비스에서 근무하게 된 데도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양 진영의 라디오방송은 정교한 전략과 상징을 동반한 고도의 심리전 도구였다. 겉으로 드러난 내용과 속에 숨은 내용, 선전하고자 하는 바와 감추고자 하는 바를 세밀하게 구분해내는 능력은 이 직무를 수행하는데 매우 중요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는 이와 같은 대중을 상대로 한 프로파간다(propaganda) 전략은 훨씬 제한적이었다. 반면 1차 대전 이후인 1920년대에야 비로소 출현한 라디오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즈음에 와서도 탄생 20여 년에 불과한 ‘신매체’였지만 이즈음엔 기존의 어떤 매체보다도 깊고 광범위한 프로파간다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영국에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출신의 수많은 유대인이 망명 또는 피난생활을 하고 있었다. 곰브리치 역시 오스트리아 수도 빈 출신의 유대인이었다. 수많은 영국 내 유대인 중에서도 그는 오스트리아-독일 문화의 정수를 호흡하고 자라난 인물이었다.
에른스트 한스 요제프 곰브리치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5년 전인 1909년 빈에서 유태인 변호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레오니 호크는 빈 음악원을 우등으로 졸업한 촉망받는 피아니스트였다. 젊은 시절 요하네스 브람스의 피아노 연주에서 악보를 넘기는 ‘페이지터너(page turner)’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동년배 연주자 중 대표주자’라는 상징성을 가진 일이었다. 호크는 또한 당대 최고 피아니스트 중 하나인 테오도르 레셰티츠키의 조교로 활동했으며, 구스타프 말러, 후고 볼프, 아르놀트 쇤베르크 같은 당대 최고 작곡가들과도 교류했다. 특히, 빈 음악원 시절 교향곡 작곡가로 인정을 넓혀가고 있던 안톤 브루크너의 수업을 듣기도 했다.
아돌프 부쉬가 이끄는 부쉬 4중주단이나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도 곰브리치 변호사 자택에 자주 출입하며 거실 연주회를 열었다. 어린 에른스트 곰브리치가 음악에 대한 애정과 지식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누나인 데아는 훗날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으며, 에른스트 역시 능숙하게 첼로를 연주할 수 있었다.
인접국인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고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면서 빈 유대인 사회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반 유대 운동도 점차 노골화되어 갔다. 일가족은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기 2년 전인 1936년 영국으로 기반을 옮겼다. 당시 27세였던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런던대학교 워버그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하다 전쟁이 일어나자 BBC로 자리를 옮겼다. 독일 문화에 정통한 그에게 더없이 적합한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오페라 작곡가를 경모한 교향곡 작곡가
히틀러 종말의 시기에 독일 라디오방송이 선택했던, 그리고 곰브리치가 듣는 즉시 바로 그 의미를 포획했던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은 어떤 작품일까. 먼저 그 작곡가인 안톤 브루크너(1824~1896)가 어떤 인물인지 들여다보아야 할 듯하다.
브루크너는 생의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음악계의 인정을 받았던, 대표적인 대기만성형 작곡가로 꼽힌다. 교향곡을 열한 곡 썼지만 초기 두 곡에는 번호를 붙이지도 않았고, 아홉 번째 교향곡인 제7번(1883)에서야 비로소 청중과 평단의 이해를 얻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나이 59세였고, 미완성작을 포함해 단 두 곡의 교향곡만을 남겨두고 있었으니 때늦은 성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만년에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작품이 가진 모순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브루크너는 독일 음악극의 중시조인 리하르트 바그너의 열렬한 예찬자였다. 그는 바그너의 음악을 닮은 두텁고 중후한 화음, 대규모의 오케스트라, 중세의 숲을 연상시키는 신비로운 세계의 묘사에 열중했고 이를 교향곡에 담아냈다.
그러나 정작 그가 경모한 바그너는 교향곡을 ‘수명이 다한 장르’로 여기고 있었으며 바그너 스타일로 교향곡을 쓰는 브루크너의 작업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브람스와 평론가 한슬리크(Eduard Hanslick)로 대표되는 당대 독일-오스트리아 음악계의 보수진영은 바그너와 달리 교향곡이라는 장르를 중요시했지만 바그너의 음악어법을 교향곡 세계로 가져오는 데는 맹렬한 혐오를 표시했다. 특히 브루크너가 1873년 작곡해 바그너에게 헌정한 [교향곡 3번]에서 바그너의 음악극을 명확히 연상시키는 부분들을 드러내면서 보수진영의 혐오와 외면은 명확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바그너의 예찬자들조차 브루크너를 ‘반 천재 반 바보’로 여겼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자신만의 작업에 몰두했던 브루크너는 바그너 진영이 그의 교향악 작업에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가운데도 바그너를 향한 경모의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다.
바그너에게 헌정한 [3번 교향곡]으로부터 10년이 지난 시점의 [7번 교향곡]은 그런 브루크너의 바그너 경모가 최고조로 표현된 작품이기도 했다. 특히 ‘아다지오’(느리게)로 표시된 두 번째 악장은 그가 바그너의 건강 악화를 전해 듣고 집필을 시작한, 일종의 영웅을 위한 장송음악과도 같은 악장이다. 특히 이 악장에서는 금관악기 ‘바그너 튜바’ 네 대가 깊고 풍성한 화음을 깔아주면서 전 악장의 악상을 지배한다. 바그너는 이 곡을 시작으로 이후 8번, 9번 교향곡에서도 바그너 튜바를 사용했다.
바그너 튜바란 바그너가 만년의 야심작인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음악극 시리즈를 위해 특별히 주문 제작한 금관악기다. 트롬본의 ‘단단한’ 음색과 호른의 ‘퍼지는’ 음색 중간 성격의 악기를 만들고자 한 그의 의도가 반영되었다. 특히 중간 음역의 화음을 깊게 깔아줄 때 이 악기는 바그너 악극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음향을 빚어낸다. 브루크너는 바그너를 애도하기 위해 쓴 [7번 교향곡]의 2악장에서 이 음색을 특별히 강조함으로써 바그너에 대한 오마주(homage, 감사, 존경의 뜻)를 더욱 깊게 한 것이다.
바그너 브루크너 히틀러, 3중의 경모
상기해보면 히틀러가 몰락한 날 선택된 곡이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이었다는 사실은 3중의 정신적 숭배 또는 ‘경모’를 그 바탕에 두고 있다. 하나는 바그너에 대한 브루크너의 경모, 또 하나는 바그너에 대한 히틀러의 경모, 그리고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브루크너에 대한 히틀러의 경모다. 단지 ‘퓌러(Fuhrer, 나치 독일의 총통)가 숭배한 작곡가의 죽음에 부쳐 작곡된 곡’이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총통이 숭배한 작곡가의 곡’이라는 점도 제3제국 종말의 기념곡으로 이 곡이 선택된 이유의 하나였던 것이다.
독일 중세의 전설적 영웅. 로엔그린. <출처: Wikipedia>
히틀러가 바그너에 가슴 깊이 심취됐던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히틀러는 12살 때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보고 가슴 깊이 심취했다. 백조를 탄 기사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온다는, 중세를 배경으로 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몽상가 소년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이후 히틀러는 평생 바그너의 지지자를 표방했다. 아울러 바그너의 판타지적 몽상 세계에서 자신이 그리는 국가와 이념의 근간을 찾아냈다. 그와 비슷하게 바그너 생전 바이에른의 군주였던 루트비히 2세(Ludwig Ⅱ)도 소년 시절 [로엔그린]에 심취했고 망명 중이던 바그너를 바이에른 궁정에 초청했으며 바그너 음악극을 전문적으로 무대에 올리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건립에 역량이 닿는 한 후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바그너는 결과적으로 두 명이나 되는 통치자를 홀려 역사의 방향을 바꾼 셈이다.
히틀러가 바그너를 마음속 깊이 경모한 이유는 바그너가 선택한 소재가 ‘게르만 신화이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이는 어쩌면 정밀하지 못한 시각일 수도 있다. 바그너 만년의 역작인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이 라인강을 배경으로 한 신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히틀러가 깊이 경도한 바그너 오페라의 전체 소재들은 게르만어권을 넘어 스페인(파르지팔), 영국의 콘월(트리스탄과 이졸데)에까지 걸쳐 있다. 그러나 무대가 어디이든 중세와 기사도, 깊은 숲과 굽이치는 강물이 등장하는 바그너의 신화 세계에서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바람직한’ 원형을 발견해냈다.
더욱 문제가 되는 사실은, 히틀러가 바그너의 반유대주의까지 이어받았던 점이다. 바그너가 당시 유럽 사회의 일반적 경향 중 하나였던 반유대주의에 깊이 물들게 된 데는 중세 독일문화에 대한 깊은 공감이 근원적인 이유이겠지만, 작곡가로서의 성장과정 중 유대인 음악가들과의 잦은 마찰도 한 이유로 꼽힌다. 그는 젊고 패기만만하던 시절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던 오페라 작곡가 자코모 마이어베어를 찾아가 자신의 작품을 평가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외면당했다. 유대인 작곡가 마이어베어에 대한 증오는 유대인 일반에 대한 증오로 이어졌다. 결국 바그너는 37세 때 「음악에 있어서의 유대성」이라는 논문을 내놓는다.
이 논문에서 당대의 인기 오페라 작곡가였던 마이어베어와, 절대음악 분야에서 천재성을 인정받은 멘델스존의 작품들을 예로 들며 바그너는 “유대인들은 독일인의 깊이 있는 세계에 결코 다다를 수 없으며, 독일 음악을 본받는다고 해도 외면적인 피상성의 모방에 이를뿐”이라고 주장했다. 음악팬으로 자처했던 히틀러도 그의 주장에 공감했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가 바그너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최소한 바그너의 반유대주의가 히틀러의 인종적 확신을 절대적인 차원으로 강화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 유럽 사회 내부의 반유대주의는 그 뿌리가 깊다. 종교적으로 균질한 기독교 체제 속에서 유일하게 고립된 신앙과 전통을 이어간 부류가 유대인이니 계몽주의 이전 시대에 이들에 대한 이질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840년대 말 유럽 전역을 휩쓴 미완의 시민혁명 이후 인종과 계급에 따른 차별이 잇따라 철폐되었지만 유대인에 대한 공직 제한은 독일과 프랑스를 위시한 각국에 남아있었다.
유난히 교육열이 높고 성취동기가 높은 유대인들은 신분의 상승을 포기하는 대신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활발히 보급되기 시작한 방적기 등을 이용해 상공업 분야에서 부를 쌓기 시작했다. 이렇게 부를 축적한 유대인 가문은 음악을 필두로 한 문화예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는 이런 현실에 대한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는 독일 예술가 사회의 불만이 표출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독일민족 시대정신의 표현
바그너에 대한 히틀러의 뿌리 깊은 경외를 고려할 때, 집권 후 히틀러가 가장 먼저 손을 내민 곳이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축제극장이 있는 곳이었다는 사실은 어색하지 않다. 특히 바그너의 며느리였던 위니프레드 바그너는 나치 시대에 축제극장의 감독으로 재직했고, 남편 지크프리트가 죽은 뒤 한때 히틀러와의 결혼설이 돌 정도로 히틀러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 후 극장의 운영권을 빼앗긴 그는 스스로 나치의 지지자가 아니었다고 말했지만, 1950년대 이후에도 나치 고관 미망인들의 모임을 주선할 정도로 나치 시대의 추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 했다.
좌로부터 위니프레드 바그너, 아돌프 히틀러, 빌란트 바그너. 바그너 후손들이 바이로이트 축제에 참석한 히틀러를 맞이하고 있다. <출처: Wikipedia>
히틀러의 브루크너에 대한 경모 또한 깊었다. 브루크너의 고향인 ‘안스펠덴’과 히틀러의 고향인 ‘브라우나우 암 인’은 모두 오스트리아의 린츠 근교의 소도시였다. 1937년, 독일 레겐스부르크의 ‘발할라 사원’에서 히틀러는 브루크너의 흉상 제막식을 직접 집전했다. 이 모습은 나치 시대 내내 선전도구로 활용됐다. 나치는 중세와 바그너의 분위기가 묻어나는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독일 민족 시대정신의 표현’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1937년 6월 히틀러는 안톤 브루크너의 흉상 제막식에 직접 참여하였다. <출처: Wikipedia>
히틀러가 사랑한 바그너의 음악은 2차대전 직후 한동안 전 유럽과 미국에서 경원시됐다.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페스티벌도 중지되었다가 1951년에야 재개되었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가 일부 또는 상당 부분 바그너에게 기원을 둔다는 사실은 유럽인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바그너 공포’를 낳았다. 유대인들이 건국한 이스라엘에서는 현재도 바그너 연주가 금기로 남아있다.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아랍권 화합에 힘을 쏟아온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이 2001년 한 콘서트의 앙코르곡으로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을 연주하는 등 바그너 금기를 깨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아직은 외로운 외침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2차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막을 내린 이후에도 전 세계에서 브루크너의 음악이 가진 위상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스라엘에서도 브루크너는 계속 연주되었다. 브루크너는 히틀러라는 인물을 알지도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 물론 이 점은 바그너와 히틀러의 관계에서도 공통된다. 그러나 히틀러는 반유대주의라는 바그너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반면 브루크너는 바그너의 반유대주의에 영향을 받았다는 아무런 정황도 없다. 유태인이었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빈 대학 청강생으로 브루크너의 수업을 들었으며 브루크너의 [교향곡 3번]을 피아노로 편곡하는 등 줄곧 브루크너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포퍼, 하이에크와 교유한 곰브리치
브루크너의 교향곡에서 히틀러의 죽음을 가장 먼저 알아챘던 곰브리치는 2차대전 이후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영국에 남아 역사학자 칼 포퍼,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등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국 망명자들과 교류했으며 포퍼의 명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펴내는데도 핵심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가 전쟁 5년 뒤인 1950년 펴낸 『서양미술사』는 16판을 펴냈으며 한국어를 포함한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개별 작가와 작품의 나열에 불과했던 미술사를 당당한 역사의 영역에 올려놓은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곰브리치는 새 밀레니엄이 도래한 2001년 92세로 런던에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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