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선율

드뷔시, 첼로 소나타/플루트와 비올라, 하프를 위한 소나타/바이올린 소나타

히메스타 2018. 4. 25. 11:34

드뷔시, 첼로 소나타/플루트와 비올라, 하프를 위한 소나타/ 바이올린 소나타

[백과 흑], [연습곡]과 같은 피아노 작품 이후 드뷔시는 말년에 접어들며 다시금 실내악 장르로 돌아왔다. 그가 19세기에 작곡했던 현악 4중주 이후 실내악 작품의 명맥이 완전히 끊겨있던 상황에서 그의 결심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암에 걸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상태였고, 게다가 1914년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우울증까지 겹쳤다. 드뷔시는 이렇게 극한 상황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혹은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문화적 자존심을 곧추세우고자 프랑스의 정신이 담긴 실내악 작품을 작곡하고자 결심했다. 그는 1915년 친구에게 보낸 한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일을 하고 싶다네. 나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독일군들이 프랑스 고유의 사상을 결코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일을 하고 싶단 말일세.”

의자에 앉아있는 드뷔시 <출처: Wikipedia>

이러한 애국적 감정이 고조된 작곡가의 최초의 계획은 라모 (Jean Philippe Rameau)의 [콩세르]를 모델로 하여 여러 악기를 위한 여섯 곡의 실내악 소나타를 작곡한 뒤 ‘클로드 드뷔시, 프랑스의 음악가’라는 서명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건강이 계속 악화된 탓에 세 곡만을 작곡할 수밖에 없었다. 그 첫 번째 작품이 [첼로를 위한 소나타 D단조](1915년)이고 두 번째가 [플루트와 비올라, 하프를 위한 소나타 F장조](1915년), 마지막이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G단조](1916~17년)다. 드뷔시는 이들 소나타를 통해 자신이 제창한 인상주의 음악과 프랑스 바로크 시대의 위대함을 통합하고자 했다.

“프랑스 음악은 어디에 있는가? 음악에 그토록 진실했던 옛 클라브생 연주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우아함의 비밀을 알고 있었으며 과장되지 않은 감정을 체득하고 있었는데!”

라모가 [콩세르]에서 악기들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준 것처럼, 드뷔시 또한 소나타 형식을 통해 이러한 자연스럽고 귀족적이며 프랑스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 음악적 유희를 창조해내고자 했던 것이다.

   
   
   
   


첼로 소나타

이 가운데 [첼로를 위한 소나타 D단조](1915)가 첫 번째 작품으로서, 자유롭고 환상적인 이 짧은 소나타의 2악장에서는 만년의 드뷔시가 시도했던 세분화되고 단편화된 채 갑자기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독특한 음악적 표현력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드뷔시는 이 작품에 “달을 보고 화를 내는 피에로(Pierrot fâché avec la lune)"라는 제목을 붙이고자 했다고 한다. 소나타는 다음과 같은 구성을 가지고 있다.

I. Prologue: lent (프롤로그)
II. Sérénade: modérément animé - vivace (세레나데)
III. Finale: animé - lentovivace (피날레)

프랑수와 쿠프랭(François Couperin)의 영향을 받아 18세기적인 단일 주제 양식으로 작곡된 이 소나타는 5음계와 온음계를 사용하여 전형적인 드뷔시 후기 스타일을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고, 첼로의 왼손 피치카토나 스피카토, 플라우탄도 보잉, 포르타멘토 등과 같은 확장된 첼로 테크닉이 다양하게 사용


플루트와 비올라, 하프를 위한 소나타 

두 번째 작품인 [플루트와 비올라, 하프를 위한 소나타]는 드뷔시의 만년의 이상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1915년 8월에 [첼로를 위한 소나타]를 완성하자마자 바로 작곡을 시작하여 그해 10월 12일에 완성한 이 곡은 신비로운 음색과 낯선 악기 구성, 소나타 형식을 벗어난 자유로운 변형을 갖고 있다. 특히 장식적인 아라베스크 풍의 음형과 즉흥적인 양식, 특징적인 리듬의 나열 등등은 그가 얼마나 간결한 형식을 통해 새로운 색채의 감수성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드뷔시와 딸 엠마, 1916년 <출처: Wikipedia>

I. Pastorale(전원풍으로)는 세련된 음색과 명료한 강약 대비, 몽상적인 반음계적 화성의 혼합을 통해 전원적이면서도 바로크적인 느낌을 강조했다 II. Interlude(간주곡)는 일종의 미뉴엣풍의 간주곡으로서 콩세르적인 악기들의 즐거운 대화와 슬픈 느낌의 선법이 강조되었다. 한편 비올라가 멜로디와 트레몰로를 통해 전체를 주도하는 한편 반주를 하며 역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지막 III. Finale(피날레)는 역동적이고 이국적인 악장으로서 1악장의 기본 요소가 다시 제시되며 통일감을 강조한다. 그는 이 소나타를 자신의 딸 클로드-엠마에게 헌정했고 초연은 1917년 4월 12일에 이루어졌다.


  

  


  


  


바이올린 소나타

앞선 두 개의 소나타가 단시간 내에 작곡된 것에 비하여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는 죽음이 임박한 드뷔시가 대단히 힘들게 작곡, 완성한 작품으로, 결국 이 소나타는 그의 백조의 노래(작곡가의 마지막 작품을 지칭)가 되었다. 1916년 10월에 작곡을 시작하여 1, 2악장은 1917년 2월에 완성되었지만 훌륭한 아이디어를 이미 확보해놓은 상태였던 3악장만큼은 그 작곡 속도가 더뎌 그해 5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5월 5일 파리의 가보 홀에서 자신의 피아노 반주와 바이올리니스트 가스통 뿔레(Gaston Poulet)의 연주로 초연되었고, 이후 그해 9월 드뷔시가 살던 생-장-드-뤼즈에서 다시 한 번 연주되었다. 이것이 작곡가가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인 마지막 연주회로서, 1918년 1월 25일 아직 전쟁이 프랑스에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던 상황에서 드뷔시는 10여 년 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암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파리에 있는 드뷔시 무덤 <출처: Wikipedia>

드뷔시는 고전적인 소나타를 다룸에 있어서 형식적인 음의 설계나 다이내믹의 상호작용보다 멜로디의 선율미, 화성의 뉘앙스, 악기의 질감, 음향의 쾌락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이는 드뷔시 이후 러시아 작곡가들이 사용했던 것보다 훨씬 선구적인 업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1904년 친구에게 보낸 한 편지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프랑스의 음악적 천재성은 어쩌면 관능적인 꿈과도 같다... 음악은 일체의 과학적 장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음악은 겸허하게 쾌락만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아름다움은 아마 이러한 한계 안에서만 가능하지 않을까.”

바로 이러한 원리에 대한 깨달음을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에서 현실화시켰다.

I. Allegro vivo(매우 빠르게)에서는 고전적인 소나타 양식의 원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얼핏 순환주제와 같은 기법을 사용한 것처럼 보이는데, 작곡가는 이 가운데에서도 규칙보다는 유연성을, 설명보다는 암시를, 경직된 조성보다는 한층 애매한 조성을 선호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II. Intermède. Fantasque et léger(막간곡. 환상적이고 가볍게)는 앞선 작품에서와 같은 일종의 간주곡으로서 두 악기 사이의 재치 있는 유희를 통해 소나타 형식에 환상적인 자유로움을 부여하고 있다. 마지막 III. Finale. Très animé(매우 생기있게)는 전통적인 빠른 악장으로서 시적 환상과 정묘한 음색이 만들어내는 비정형적인 움직임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