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의 불모지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음악, 특히 오케스트라 지휘에 뜻을 두고 수련을 쌓았고, 열여덟 살 때 조국을 대표하는 청소년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23세 때는 저명한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쥐었고, 24세 나이에 최고 음반사인 도이체 그라모폰(DG)에서 데뷔 음반을 냈으며, 28세에는 미국 메이저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자리를 꿰찼다. 이 경이로운 스토리의 주인공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의 이름은 구스타보 두다멜! 이제 겨우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 이미 대단한 경력과 세계적 명성을 쌓아놓은 그는 이 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젊은 마에스트로이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레너드 번스타인, 클라우디오 아바도, 사이먼 래틀의 뒤를 이어 최고의 스타 지휘자로 등극한 베네수엘라 출신의 젊은 마에스트로이다.
타고난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은 1981년 1월 26일, 베네수엘라 북서부의 바르키시메토(Barquisimeto)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트롬본을 연주했고 어머니는 노래를 가르쳤다. 아기 때 너무 조용했던 그에게 의사는 ‘클래식 음악’을 권했고, 얼마 후 그는 오케스트라 콘서트에 다니기 시작했다. 어린 두다멜은 ‘소리 내지 않는 악기를 연주하는’ 지휘자에게 흠뻑 매료되었다.
유아원에 들어가기도 전인 네 살 때, 한 번은 꼬마 두다멜이 작은 장난감들을 방바닥에 펼쳐 놓고 이리저리 정렬을 시키고 있었다. 할머니는 아이를 보고 소꿉장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아이는 방을 나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청소할 때 내 오케스트라는 건드리지 마세요!” 아이가 일고여덟 살이 되자 할머니는 지휘봉을 선물해줬고, 아이는 음악을 틀어놓고 자신의 ‘장난감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걸 즐겼다.
한편 처음에 두다멜은 아버지처럼 트롬본을 연주하고 싶어 했지만, 아직 어린 그는 팔이 너무 짧았다. 그래서 대신 리코더를 불기 시작했고, 지역 음악학교에 들어가서는 선생님의 권유로 바이올린을 연주하게 되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두세 가지를 이해했고, 숙제를 세 개 내주면 대여섯 개를 해올 정도로 그의 진도는 빨랐고, 그 결과 1년 만에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리더가 되었다.
열두 살 때 한 번은 지휘자 선생님이 연습에 늦었다. 그는 장난삼아 지휘대에 올랐고, 친구들 몇몇이 웃었지만 진지하게 지휘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늦게 도착해서 그가 지휘하는 모습을 본 선생님은 깜짝 놀랐다. 그는 마치 몇 년 째 지휘를 해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주를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지휘자의 길로 들어섰고, 열다섯 살 때 ‘엘 시스테마(El Sistema)’의 창시자인 아브레우 박사(José Antonio Abreu)에게 발탁된 뒤로 본격적인 지휘자 수업을 쌓게 되었다.
엘 시스테마
‘엘 시스테마(El Sistema)’는 원래 영어의 ‘시스템(system)’과 뜻이 같은 스페인어지만, 이제는 ‘베네수엘라의 공공 음악교육 프로그램’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통한다. 정식 명칭은 ‘베네수엘라 국립 청년 및 유소년 오케스트라 시스템 육성재단’으로, 1975년 음악가이면서 경제학자, 교육자, 정치가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José Antonio Abreu, 1939~)가 제안하여 시작되었다.
‘엘 시스테마’는 음악을 통해서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베네수엘라는 남미 최대의 산유국이면서도 고질적인 빈곤과 범죄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브레우 박사는 조국의 빈민가 아이들에게 총이나 마약 대신 악기를 안겨주고 음악을 가르쳐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도록 함으로써, 범죄를 예방하는 한편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을 심어주고 협동·질서·소속감·책임감 등의 덕목과 가치를 심어주고자 했다. 처음에 수도 카라카스(Caracas)의 한 빈민가 차고에서 11명의 단원으로 출발한 ‘엘 시스테마’는 2010년 기준으로 베네수엘라 전국에 190여 개의 본부, 26만여 명의 가입자를 보유한 거대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두다멜은 이 ‘엘 시스테마’가 배출한 최대의 인재이자 최고의 스타이다. 그는 10세 때 엘 시스테마의 수혜자가 되어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어 하신토 라라 음악원에 진학해서 연주, 작곡, 지휘 등 체계적인 음악수업을 쌓았다. 무엇보다 엘 시스테마는 그에게 훌륭한 지휘자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잠시 그의 말을 들어보자.
“지휘자에게 경험은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악보를 통해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케스트라 앞에 선다는 것은 뭔가 다른 경험입니다. 연습과 실제 지휘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주 많거든요.” 구스타보 두다멜
‘엘 시스테마’ 산하에는 연령대와 실력 수준이 다양한 단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넘쳐났고, 두다멜은 악보와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바로바로 실습해볼 수 있었다. 그런 풍부한 경험과 출중한 재능을 바탕으로 두다멜은 2004년 독일에서 열린 ‘구스타프 말러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국제적인 화제의 중심에 서면서 자신을 길러준 ‘엘 시스테마’의 저력을 전 세계에 각인시키고 전파하는 일등공신 역할을 해왔다.
현재 ‘엘 시스테마’는 미국, 영국 등 ‘클래식 음악 선진국’들로 역수출되어 음악교육의 새 장을 열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그와 비슷한 취지의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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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엘 시스테마’에 참가한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구스타보 두다멜 2 ‘엘 시스테마’를 시작한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와 아이들 |
시몬 볼리바르
아직 젊기에 단언하기 다소 이르긴 하지만, 두다멜의 프로 지휘자 경력은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Simón Bolívar Symphony Orchestra of Venezuela)’와 함께 시작되었고 또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된다. 두다멜은 1999년,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청소년 관현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그가 지휘자가 되기 위한 수업을 충분히 이수하고 본격적인 지휘자로 나설 채비를 마쳤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다만 거기까지는 제한적 이슈에 그쳤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그 후 사이먼 래틀과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이 악단을 지휘하러 가서 두다멜의 존재를 주목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세계적인 거장들의 인정과 지원에 힘입어 그와 악단은 국제무대로 진출했고, 그 지점에서부터 ‘두다멜과 시몬 볼리바르의 전설’은 시작되었다. (※ 참고로, ‘시몬 볼리바르’는 남미 5개국을 스페인 지배로부터 해방시킨 베네수엘라의 전설적 혁명가의 이름이다.)
2003년 베를린과 잘츠부르크에서 사이먼 래틀의 조수로 일한 두다멜이 2004년 ‘말러 콩쿠르’에서 우승하자, 바야흐로 그와 악단의 눈앞에는 드넓은 탄탄대로가 펼쳐졌다. 이 젊은 지휘자와 악단은 세계 각지, 저명한 악단 및 음악제들로부터 쇄도하는 러브콜에 행복한 비명을 질렀고, 2005년에는 마침내 클래식 음악계 최고의 음반사인 도이체 그라모폰(DG)에서 데뷔 음반을 발매하는 기염을 토했다. 더구나 그 음반은 베토벤 교향곡 5번과 7번이라는, 신인 지휘자와 악단으로서는 대단히 이례적이고 모험적인 레퍼토리로 승부를 걸어 더욱 화제를 모았다.
이후 단원들의 나이가 ‘청소년기’를 넘어섬으로써 악단의 명칭은 ‘시몬 볼리바르 심포니 오케스트라’로 바뀌었지만, 이들 콤비는 지금도 여전히 음악감독과 오케스트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두다멜은 ‘지휘자 역시 오케스트라의 일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오늘이 있게 해준 ‘엘 시스테마’에 대한 고마움과 그것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믿음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다.
강력한 메신저
현재 두다멜은 시몬 볼리바르 심포니와 더불어 미국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겸하고 있다. 또 독일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필하모닉, 스위스의 취리히 톤할레, 스웨덴의 예테보리(고텐부르크) 심포니 등 유럽 유수의 오케스트라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아울러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루체른 페스티벌 등 최고의 음악제에 꾸준히 출연하고 있으며, 밀라노 라 스칼라, LA 오페라 등 오페라 무대에도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 가운데 LA 필하모닉은 그가 베네수엘라 밖에서 두 번째(첫 번째는 스웨덴의 예테보리 심포니, 2007~2012)로 맡은 상임직인데, 취임 당시 악단 역사상 최연소(28세) 음악감독이라 하여 또 한 번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은 베네수엘라와 미국은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있는 나라들이라는 점인데, 이 점만 감안해도 작금의 음악계에서 두다멜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명실상부 최정상의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이 곧 선출하게 될 차기 음악감독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것 또한 그의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실상 구스타보 두다멜은 이 시대에 클래식 음악, 그중에서도 오케스트라 음악의 매력과 가치를 가장 웅변적으로 설파하는 강력한 메신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종종 지나친 열광을 유발하곤 하는 ‘두다멜 현상’에 거부감을 내비치는 이들도 있고, 그의 지휘에 대해서 아직은 경험과 깊이가 부족하다는 등의 비판이 가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특유의 정열과 감흥을 한껏 실어 폭발적으로 발산하는 에너지와 그 경이로운 몰입의 열기, 나아가 그의 손에서 완전연소에 이르는 듯한 음악의 눈부신 절정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쾌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겠다.
다만 아직 그는 젊기에 그에 대해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제해야 할 일이리라. 우리는 그에게서 들어야 할 것이 많고, 그도 우리에게 들려줘야 할 것이 많다. 아무쪼록 아직 지휘자로서는 젊디젊은 그가 진정한 ‘마에스트로’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부단히 노력하고 수련하는 자세를 꾸준히 견지하기를, 그리고 경력상 중요한 갈림길에서 올바른 선택을 이어나가기를 바랄 따름이다.
주요 음반 및 영상물
1) 시몬 볼리바르 유스/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 음반
- 베토벤 : 교향곡 제5번, 제7번 * 역사적인 데뷔 음반
- 피에스타 * 앙코르로 연주하는 라틴계 레퍼토리로 채워진 음반
- 차이콥스키 : 교향곡 제5번
- 스트라빈스키 : 봄의 제전 외
- 차이콥스키와 셰익스피어
- 베토벤 : 교향곡 제3번 ‘영웅’
- 말러 : 교향곡 제7번
- ‘엘 시스테마’ 40주년 기념 편집음반
2) 다른 악단을 지휘한 음반
- 브루크너, 시벨리우스, 닐센 / 악단 : 고텐부르크(예테보리) 심포니 오케스트라
- 말러 : 교향곡 제9번 / 악단 : LA 필하모닉
- R.슈트라우스 :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외 / 악단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3) 영상물(콘서트)
- 교황 베네딕트 16세 생일 기념 콘서트(모차르트, 드보르자크 외) / 악단 :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
-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라이브(베토벤, 무소륵스키 외) / 악단 :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 * 잘츠부르크 대학 대강당 공개 리허설 장면 수록
- LA 필하모닉 취임 기념 콘서트(애덤스, 말러 외) / 악단 :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음악감독’ 두다멜에 관한 다큐멘터리 수록
- 2012년 빈 필 쇤부른 궁전 여름반 콘서트 실황 ‘춤과 물결’ / 악단 : 빈(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말러 : 교향곡 제8번 / 악단 : LA 필하모닉 & 시몬 볼리바르 심포니
- 베를린 필의 2012년 유러피언 콘서트 실황(장소 : 빈 궁정 승마학교) / 악단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베르디 : 레퀴엠 / 악단 : LA 필하모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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