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토 고비 <출처: Wikipedia>
배우나 가수들은 무대에 섰을 때 실제 외모보다 더 크고 날씬하고 젊고 아름답게 보이는 게 보통이다. 조명과 분장, 그리고 객석에서 바라보는 무대의 높이나 각도에 따라 착시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페라 주인공이 공연을 마치고 사인을 해 줄 때 가까이서 보고는 외모에 실망하는 관객도 꽤 있다. 하지만 오페라 가수들 중에는 분장을 지우고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의 외모가 무대에서보다 훨씬 근사한 경우도 더러 있다. 원래 나이보다 나이든 역을 맡거나 ‘못생겨 보여야 하는’ 배역을 맡는 가수들이 그렇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베이스와 바리톤, 메조소프라노 같은 저음역 가수들이다.
오페라 가수의 연기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주어 모든 오페라 가수의 귀감으로 불렸던, 그리고 무대 위 실연(實演)뿐만 아니라 스튜디오 녹음에서도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최고의 목소리 연기력을 보여 준 이탈리아 바리톤 티토 고비(Tito Gobbi)는 빼어나게 잘생긴 외모를 감춰야 하는 ‘아버지 전문’ 또는 ‘악역 전문’ 가수였다. 50, 60년대 오페라 팬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고비의 대표적인 배역이 베르디의 [리골레토]와 푸치니의 [자니 스키키] 타이틀롤 아니면 [토스카]의 스카르피아 역, 또는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에서 꼽추 토니오 역이었으니, 고비의 수려한 외모로는 도저히 설득력이 없었던 것이다.
남아 있는 티토 고비의 영상물들을 보면 이 모든 오페라에서 그의 매끈한 코는 비뚤어진 매부리코이거나 주먹코로 변형되어 있다. 영화배우 지나 롤로브리지다(Gina Lollobrigida)가 여주인공 네다 역으로 출연한 1947년 영화 [팔리아치]에서 놀랍게도 고비는 토니오와 실비오 역을 동시에 맡아, 한편으로는 롤로브리지다에게 구애하다 멸시를 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롤로브리지다와 은밀한 사랑을 나눈다. 여기서 잘생긴 마을 청년 실비오 역으로 분해 여주인공과 사랑을 속삭이는 고비의 모습이 그의 원래 모습인데, 누구도 그 모습을 보고 티토 고비라고 짐작하지 못한다니 재미있는 일이다. 그처럼 철저하게 자신이 연기한 인물로 보였던 고비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1 베르디 [리골레토]에서 아버지 ‘리골레토’ 역으로 분장한 티토 고비. <출처: Wikipedia> 2 푸치니 [자니 스키키]에서 ‘스키키’ 역으로 분장한 티토 고비. <출처: Wikipedia> |
음반 속에서도 목소리로 연기한 ‘액팅 보이스’
바리톤 티토 고비는 1913년 10월 24일 이탈리아 바사노 델 그라파(Bassano del Grappa)에서 태어났다. 파도바에서 법학을 전공하는 동안 친지가 그의 뛰어난 성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성악 공부를 권유했다고 한다. 고비는 1932년 로마로 가서 당대의 명 테너 줄리오 크리미(Giulio Crimi)에게 배웠다. 1935년 벨리니의 [몽유병자] 중 로돌포 백작 역으로 이탈리아에서 데뷔했고, 1979년 은퇴할 때까지 100개가 넘는 오페라 배역을 노래했다.
고비는 오디션 때 피아노 반주를 해준 틸데 데 렌시스와 1937년에 스물넷의 나이로 결혼해 딸 체칠리아를 낳았다. 체칠리아 고비는 후에 ‘티토 고비 음악 협회’를 설립하고, 아버지의 음악적 유산을 보존하는 데 주력했다. 결혼한 해에 고비는 로마 아드리아노 극장에 [라 트라비아타]의 제르몽 역으로 데뷔했고, 그를 눈여겨 본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Tullio Serafin)은 1942년에 도니체티의 [사랑의 묘약] 벨코레 역으로 고비를 라 스칼라 극장 무대에 데뷔시켰다. 오페라의 연극적 본질을 꿰뚫고 있었던 세라핀은 극과 캐릭터를 제대로 이해하는 이 바리톤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고 그에게 다양한 오페라 배역을 준비시켰고, 고비는 오랫동안 세라핀과 수많은 공연 및 음반 녹음을 함께 했다. 세라핀을 통해 고비는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와도 불멸의 명반들을 남겼다.
42년에 고비는 빅토르 데 사바타의 지휘로 처음 [팔스타프]의 타이틀롤을 불렀고, 고비의 팔스타프는 이 후에 이 역할을 노래한 여러 바리톤에게 중요한 이정표가 되기도 했다. 같은 해에 그는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 타이틀롤을 맡았는데, 베르크 오페라가 이탈리아에서 처음 소개된 공연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화제가 되었고 고비도 이를 통해 유명해졌다.
고비의 국제적 명성은 2차 대전 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48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 진출했고, 1950년에 처음으로 런던 코벤트가든 무대에 섰으며, 1954년에는 시카고 리릭 오페라에 데뷔해 20년간 이 무대에서 노래했다. 1974년의 고별무대에 이르기까지 고비는 코벤트가든에서 꾸준히 관객의 사랑을 받으며 수많은 역을 노래했지만, 1955년에는 리허설에 지각했다는 이유로 지휘자 라파엘 쿠벨릭(Rafael Kubelik)에게 쫓겨나 그 시즌에 예정되었던 모든 배역을 다른 바리톤 가수에게 빼앗기기도 했다. 당시 쿠벨릭은 리허설에 진지하게 참여하지 않는 스타 성악가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려고 고비를 택한 것이었지만 여론은 ‘쿠벨릭이 지나쳤다’는 쪽이었고, 파티에서 쿠벨릭의 사과를 받은 고비는 다시 코벤트가든 무대로 돌아왔다.
마치 현실 같은 연기로 관객을 무대에 몰입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그는 마리아 칼라스와 마찬가지로 천 가지 음색을 지닌 가수로 유명해 ‘연기하는 목소리(the acting voice)’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가 목소리에 연기를 담으려 노력한 것은 음반을 녹음하면서부터였다. 워낙 영화배우로도 활동하며 연기에 자신이 있었던 고비는 언제나 무대 위의 연기로 관객을 쉽게 몰입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음반 녹음을 시작해보니 자신의 연기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는 음반 감상자들에게 인물의 감정과 상황을 전달해야 하는 절실한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그때부터 고비는 목소리에 천 가지 뉘앙스를 담는 방법에 골몰했고, 최선을 다한 연구는 성공이었다. 그의 음반을 듣는 감상자는 오늘도 티토 고비의 생생한 무대 연기를 눈앞에 보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연기하고 싶은 배역이 아니면 노래하지 않는다
1965년 코벤트가든에서 [토스카]를 열연하는 마리아 칼라스와 티토 고비 <출처: Wikipedia>
그가 마리아 칼라스와 함께 1958년 파리 국립오페라에서 공연했던 [토스카]의 스카르피아 역은 연기력 면에서 최고로 꼽힌다. 그리고 1965년 프랑코 제피렐리 연출로 코벤트가든에서 공연한 [토스카]는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무대에서의 유연함과 여유로도 유명했던 고비는 [토스카] 2막 공연 중 촛불이 자신의 머리카락에 옮겨붙은 줄도 모르고 몰입해 노래하던 마리아 칼라스에게 침착하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는 척하며 불을 꺼 준 일화로도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고비는 관객들의 뇌리에 특히 악역 바리톤으로 각인되었고,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토니오 역, [오텔로]의 이아고 역, [리골레토]와 [자니 스키키]의 타이틀 롤 등으로도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저마다 개성이 확연히 다른 배역들인데도 고비가 무대에서 연기하는 이 배역들에서는 공통점이 묻어난다. 그건 바로 감출 수 없는 인간적 매력이다. 꼽추 광대든 모사꾼이든 배척당하는 외지인이든 악명 높은 비밀경찰이든 그가 연기하면 세상에서 유일한 바로 그 인물이 된다. 고비의 딸 체칠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대조적인 성향을 동시에 지니는 인간 본성의 본질을 정확히 집어내셨어요. 이를테면 고귀함과 비참함, 상냥함과 폭력성, 교활함과 오만, 친밀감과 열정 같은 서로 다른 성향의 공존이죠. 아버지가 예술가로서 작품에 접근하고 관객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극중 인물의 깊이 있는 진실을 자신이 제대로 파악 못했다고 판단하거나 자신의 인물 해석에 확신이 없을 때면 아버지는 그 배역을 바로 거절하셨죠. 오페라 속의 그 배역이 자신의 음역이나 음색에 아주 잘 맞는 역이더라도 말예요. 아버지의 표현을 빌자면, ‘연기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배역’은 아버지에게 맞는 배역이 아니라는 것이었죠.”
“일단 그 인물을 탐구해 영혼의 밑바닥까지 이르고 나면 아버지는 그 인물을 육체를 가진 현실적 존재로 상상해보기 시작했다“고 딸은 기록한다. 그의 얼굴과 몸, 자세와 동작을 상상해보는 것이었다. 화가의 재능을 타고난 고비는 자신이 상상한 인물을 종이 위에 스케치했다. 스카르피아는 먹이를 낚아채려는 독수리 같은 포즈로 그렸고, 리골레토는 뒤틀린 몸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다. 그리고 자니 스키키의 자신만만한 미소는 새로 피렌체 시민이 된 그의 자부심을 보여준다.
고비는 1939년부터 1959년까지 영화배우로 활약했고, 그 가운데는 1946년에 촬영한 오페라 영화 [세비야의 이발사]도 있다. 1957년에 갈리에라의 지휘로 녹음한 [세비야의 이발사] 전곡반에서 피가로 역을 노래한 그는 로지나 역을 맡은 칼라스와 매혹적인 호흡을 보이며 감상자에게 의외의 기쁨을 선사한다. 고비는 평생 25편의 영화에 배우로 또는 노래로 출연했다. 노래하는 목소리만 제공한 대표적인 오페라 영화는 배우 앤서니 퀸이 알피오 역으로 출연한 1953년작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였다.
60년대에 고비는 오페라 연출로 활동 범위를 넓히기 시작했다. 1965년 코벤트가든에서 연출한 베르디의 [시몬 보카네그라]에서는 스스로 타이틀 롤을 노래했고, 이해부터 1982년까지 모두 10작품의 오페라를 연출했다. 1984년에 향년 70세로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단어 하나하나가 그 의미와 함께 마음에 꽂히게 만드는 명징한 발음과 표현력으로 그는 여전히 수많은 오페라 팬들을 울고 웃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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