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선율

알프레도 카탈라니 - 푸치니가 가장 두려워했던 경쟁자

히메스타 2018. 1. 17. 13:30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는 29세 때이던 1896년 자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의 오페라 [라 보엠] 초연을 지휘했다. 음악사에 남을 두 예술가의 협력이 시작되는 계기였다. 토스카니니는 푸치니의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성 오페라인 [투란도트] 초연도 지휘했으며 이후 TV와 인공위성 시대에까지 살아남았다. 만년에 아들 왈터가 녹음한 대화에서 왈터는 부친의 오랜 친구였던 푸치니와 그의 예술세계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이 녹음은 이후 [직접 얘기하는 토스카니니(Toscanini in his own words)]라는 영화로 제작됐다) 토스카니니의 답은 의외였다.

“푸치니?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없었어. 직관적인 영감이 없었다고. 뭐든지 어디서나 빌려 쓴 거지.”

왈터는 그렇다면 토스카니니가 높게 평가하는 동시대 오페라 작곡가가 누구인지 물었다. 토스카니니가 내놓은 답은 오페라 [라 왈리](1892)를 작곡한 알프레도 카탈라니(Alfredo Catalani, 1854~1893)였다. 푸치니와 동향인 루카 출신의 오페라 작곡가다. 토스카니니는 이렇게 말했다.

“카탈라니는 가장 공감이 가는 영혼의 소유자였어. 푸치니도 그를 질투했어.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아름다운 멜로디를 쓸 수 있을까’라며 의아해하곤 했지.”


푸치니의 네 살 연상, 동향 선배였던 카탈라니

알프레도 카탈라니

오늘날 세계는 카탈라니의 오페라 [라 왈리]에 나오는 소프라노 아리아 [나 멀리 떠나리(Ebben? Ne andrò lontana)]를 자주 들어 알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CF나 드라마의 서정적 효과를 높이는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팬들이 평소 접할 수 있는 카탈라니의 작품은 이 짧은 아리아 하나에 한정된다. 반면 푸치니는 「오페라 아메리카」가 꼽은 북미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오페라 1위(라 보엠)와 3위(나비부인), 5위(토스카)를 써냈고, 전 세계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사랑받는 테너 아리아 [잠들지 말라](투란도트)와 소프라노 아리아 [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자니 스키키)를 내놓았다. 최소한 ‘흥행성’면에서 두 사람을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런 카탈라니를 토스카니니는 왜 그토록 사랑했을까? 더욱 흥미로운 것은 토스카니니의 증언처럼 푸치니도 생전에 카탈라니를 ‘가장 두려운 적수’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카탈라니는 어떻게 오페라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을까?

카탈라니는 중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토스카나의 루카에서 1854년에 태어났다. 그가 네 살 때, 이 도시 산 마르티노 성당의 오르가니스트 겸 성가대장으로 4대째 봉직하던 미켈레 푸치니의 집에서 첫 아들이 태어났다. 자코모 푸치니였다. 푸치니가 여섯 살 때 부친 미켈레가 사망했다. 어린 자코모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산 마르티노 성당의 음악을 책임지는 음악가로 키운다는 것이 루카 유지들의 계획이었다. 자코모는 주변의 뜻에 따라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했지만 성마르고 따분함을 참지 못하는 ‘주의산만’ 어린이였다.

음악적 대가를 기대할만한 재능은 네 살 위의 카탈라니에게서 먼저 나왔다. 명문 밀라노 음악원에서 안토니오 바치니(Antonio Bazzini)와 아미카레 폰키엘리(Amilcare Ponchielli)를 사사한 뒤 1880년 두 번째 오페라 [엘다]를 토리노에서 초연하면서 카탈라니는 음악계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바로 이 해, 밀라노 음악원에 동향 후배가 입학한다. 푸치니였다. 홀어머니 아래 가난하게 자라났고 간신히 장학금을 받아 밀라노 유학을 왔던 푸치니는 먼저 이곳 음악계에 자리를 잡은 카탈라니를 종종 찾아와 유익한 충고를 듣고 식사 대접을 받기도 했다. 그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관대한 카탈라니’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종종 보인다. 푸치니가 사사한 스승도 카탈라니와 같은 바치니와 폰키엘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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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의 루카시 전경

푸치니 부친이 오르가니스트로 연주했던 산 마르티노 성당

베르디를 이을 새로운 오페라의 제왕을 찾다

1880년대 이탈리아 오페라는 큰 위기의식에 처해있었다. 베르디와 푸치니를 오페라의 대명사로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의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계는 구노(Gounod)와 들리브, 특히 마스네(Massenet)로 대표되는 프랑스 오페라의 파상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애국적 오페라로 이탈리아 통일(1866)의 표상이 되었던 베르디는 시간이 흐를수록 신작 발표 횟수가 뜸해졌다. 1860년대에는 두 작품밖에 내놓지 못했으며, 1871년 초연된 [아이다]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으로 사람들은 여겼다. 이런 상황에는 당시 이탈리아 문화계를 휩쓸었던 ‘스카필리아투라(scapigliatura․봉두난발)’ 운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시인 겸 작곡가 아리고 보이토(Arrigo Boito)와 시인 겸 화가 아리고 프라가가 의기투합해 일으킨 ‘스카필리아투라’는 당대 이탈리아 문화예술을 수구적이고 퇴행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한편 ‘알프스 북쪽’의 프랑스와 독일에서 혁신의 영감을 찾자는 문화운동이었다. 베르디로 대표되는 기존 음악계와, 알레산드로 만초니(Alessandro Manzoni)로 대표되는 문학계는 이들에게 배척 내지는 혁신해야 될 대상으로 여겨졌다. 베르디는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자기 작품이 시대의 흐름이나 요구에 순조롭게 따르고 있지 못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의기소침해진 베르디의 펜이 주춤한 동안 구노와 마스네의 프랑스 오페라는 전 유럽을 넘어 이탈리아 시장까지 잠식했다. 1850년대에 이탈리아 오페라 극장에서 베르디와 도니체티 등 동시대 이탈리아 작곡가의 작품 상연 비율은 90%를 웃돌았다. 그러나 1880년대에 이르러 이 비율은 40%대로 내려갔다. 빈자리를 주로 구노와 마스네의 작품을 비롯한 ‘알프스 북쪽’ 오페라들이 채웠다.

이탈리아 작곡계에서 위기감은 심각했다. 그리고 가장 큰 위기의식은 악보 출판사이자 흥행사인 리코르디사의 사주 줄리오 리코르디의 몫이었다. 선대 조반니 리코르디 시대부터 베르디 작품의 흥행을 떠맡아 황금기를 구가했던 리코르디사에게 베르디의 위상 하락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베르디의 뒤를 이을, 이탈리아 오페라의 새로운 제왕을 찾아 널리 알리는 일이 시급했다. 그런 리코르디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1884년 밀라노 달 베르메 극장에서 오페라 데뷔작 [빌리]를 성공시킨 26세의 청년 작곡가 푸치니였다. 그를 지도했던 오페라 [라 조콘다]의 작곡가 폰키엘리와, 밀라노 주변의 스카필리아투라 회합에서 그를 소개받았던 여러 문화계 인물들이 푸치니의 재능을 칭송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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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오페라를 대표하는 작곡가들. 좌로부터 ‘샤를 구노’, ‘쥘 마스네’, ‘레오 들리브’

이탈리아 오페라의 제왕 ‘푸치니’의 경쟁자들

리코르디의 탄탄한 지원을 받은 푸치니는 1893년 [마농 레스코]의 성공에 이어 1896 [라 보엠], 1900년 [토스카]에서 완벽한 성공을 거둠으로써 베르디의 뒤를 이을 이탈리아 오페라 제왕 자리를 튼튼히 다졌다. 그러나 [라 보엠] 이전, 또는 그 후에도 푸치니의 지위를 위협할 인물은 없었을까?

우선 꼽을 만한 인물이 피에트로 마스카니(Pietro Mascagni, 1863~1945)다. 공교롭게도 그는 밀라노 음악원 재학시절 푸치니와 그의 동생 미켈레와 함께 하숙을 했다. 1890년, 그의 단막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가 손초뇨 출판사의 신작 오페라 공모에서 우승하고 흥행에서도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그는 단숨에 이탈리아 오페라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이후에도 이듬해 [친구 프리츠] 등 성공작을 계속 내놓았고 죽기 10년 전인 1935년까지 푸치니보다 많은 16편의 오페라 또는 오페레타를 발표했다.

그의 성공에는 손초뇨사의 후원도 큰 역할을 했다. 1874년 문을 연 손초뇨사는 잊혀졌던 옛 오페라를 다시 흥행시키는 사업으로 출발해 1880년대에는 프랑스 오페라의 수입 제작으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조국의 문화계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비난이 일자 이 회사는 신진 작곡가들을 대상으로 단막 오페라 공모제도를 시행했다. 푸치니의 첫 오페라인 [빌리]도 이 공모에 응모하기 위해 작곡했다가 낙방한 작품이었다. 7년 뒤인 1890년의 공모에서 우승한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자, 손초뇨는 푸치니의 대항마로 마스카니를 밀기로 결정한다. 푸치니와 마스카니의 경쟁관계는 따라서 사실상 리코르디사와 손초뇨사의 대항 관계였다.

손초뇨 진영에 선 인물로는 루제로 레온카발로(Ruggiero Leoncavallo, 1857~1919)도 있었다.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본 그는 어릴 때 들은 동네 살인극 얘기를 떠올리고 곧바로 첫 오페라 [팔리아치]의 대본을 직접 쓴 뒤 곡을 붙여 1892년 대성공을 거둔다. (이 작품이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같은 해 손초뇨 공모에 응모했다가 떨어졌다는 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후 그도 마스카니와 나란히 손초뇨사의 후원을 받게 된다. 푸치니와 레온카발로는 프랑스 작가 뮈르제의 [라 보엠]을 나란히 오페라로 만드는 경쟁을 펼치기도 했다. 1896년 초연된 푸치니의 [라 보엠]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1년 뒤 베네치아에서 초연된 레온카발로의 작품은, 푸치니 측근들의 표현에 따르면 ‘베네치아 앞 해상에 가라앉고 말았다’. 손초뇨에 대한 리코르디의 승전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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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로 마스카니. 1890년

루제로 레온카발로

마스카니와 레온카발로 외에, [안드레아 셰니에]를 푸치니의 [라 보엠]과 같은 해 성공시킨 움베르토 조르다노(Umberto Giordano, 1867~1948)도 잠재적인 푸치니의 경쟁자로 꼽혔다. 그러나 그는 1898년 [페도라] 외에는 이후 뚜렷한 성공작을 내놓지 못 했다.

오늘날엔 잊혀지다시피 했지만 알베르토 프랑케티(1860~1942)도 푸치니의 경쟁자군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일찍이 독일에 유학해 바그너풍의 중후한 스타일에 익숙했던 그는 1902년 [제르마니아]를 성공시켜 주목받았지만 1차 대전 중에 이 작품은 잊혀져 버렸다. 이탈리아 작곡가가 적국인 독일의 주인공들을 등장시킨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리코르디사의 무관심 속에 잊혀진 카탈라니

‘베르디의 후계자이자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표자’를 옹립하기 위한 이 같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줄리오 리코르디는 시종일관 흔들림 없이 푸치니의 손을 들어주었다. 카탈라니는 바로 이런 리코르디의 확신 속에서 희생된 주인공이었다.

카탈라니도 초기에는 ‘푸치니의 리코르디’ 못지않은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다. 여성 출판업자이자 흥행사이며, 카탈라니와 푸치니의 고향 이름을 성()으로 가지고 있던 조반니나 루카였다. 루카의 후원 아래 카탈라니는 [엘다], [데자니스], [에드메아] 등 초기 세 작품을 순조롭게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1888년 건강이 악화된 루카는 사업을 라이벌인 리코르디에게 매각하고 은퇴해버렸다. 카탈라니는 졸지에 ‘적’이었던 리코르디 소속이 되었다.

이제 그는 리코르디의 푸치니에 대한 편애를 감수해야 했다.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이제 현실적으로 흥행이 되는 출판사는 단 하나인데, 이 사람이 푸치니 말 밖에는 듣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왕조가 예술계를 지배하는데”라고 투덜거렸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제 푸치니가 베르디의 후계자가 맞다. 베르디는 종종 ‘선한 왕’ 같은 모습으로 자기의 ‘황태자’를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

회사 합병 당시 카탈라니는 회심작 [로렐라이]를 거의 완성한 단계였지만 리코르디는 푸치니의 [에드가]를 내놓는데 힘을 기울이느라 [로렐라이] 초연을 1년이나 미루었다. [에드가]가 초연에서 낙제점을 받았지만 리코르디는 [로렐라이]로 눈을 돌리지 않고 대신 베르디의 힘을 빌려 라스칼라 극장에 [에드가]를 재상연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공동묘지(Cimitero Monumentale). 이 곳에 카탈라니의 무덤이 있다.

카탈라니의 최후작이자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라 왈리]는 아예 리코르디에 대한 기대를 접고 계약서를 쓰지 않은 채 작곡했지만 결국 흥행에 리코르디의 힘을 빌지 않으면 안되었다. 리코르디는 푸치니에게라면 꿈도 꾸지 못할 터무니없는 불공정 계약서를 제시했다. 60회 공연이 이루어지고 난 이후에야 작곡가에게 보수를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카탈라니는 일기에서 분통을 감추지 않았다. “오 리코르디, 나쁜 녀석! 이제 겨우 서른몇 번 공연했을 뿐인데 60회가 넘어야 돈을 준다고?” 결국 그는 돈을 받지 못 했다. 평소 병약했던 그를 죽음이 데려간 것이다. 1893년 8월 7일. 사인은 폐결핵이었다. 이듬해 3월,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고향인 루카에 뿌려졌다. 푸치니도 이 의식에 참여했다.

토스카니니, 카탈라니의 여주인공 이름으로 딸의 이름을 짓다.

카탈라니의 사망은 이탈리아와 특히 고향 루카에게 애통한 일이었지만, 가장 상실감이 컸던 사람은 [로렐라이], [라 왈리] 등 그의 작품을 소개하는데 큰 열정을 보인 지휘자였다. 바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이다. 우상이자 친구였던 카탈라니를 떠나보내고 실의에 잠긴 그에게 다른 작곡가가 손을 뻗쳐왔다. 푸치니였다. 1896년 1월 토리노에서 열린 [라 보엠] 초연을 위해 두 사람은 처음 손을 잡았다. 그리고 평생에 걸친 둘의 애증 관계가 시작되었다.

작품 해석과 프로모션 방향을 놓고 ‘열혈한’ 토스카니니의 언성이 높아질 때는 있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대체로 평화로웠다. 두 사람 사이에 깊은 금이 간 것은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이었다. 푸치니는 전쟁에 간여하기를 망설였다. 반면 토스카니니는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전선에 가서 위문공연을 펼쳤다. 토스카니니에게 푸치니의 모호한 태도는 ‘독일인들을 의식한 매국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거듭된 화해 요청을 토스카니니는 푸치니의 최후작인 [투란도트]에 이르러서야 받아들였다. 이 작품의 초연을 지휘하기로 한 것이다. 1924년 11월 9일, [투란도트]는 마지막 막의 일부를 빼고 완성된 단계였고 토스카니니는 밀라노 라스칼라에서 이 작품을 리허설하고 있었다. 대본작가 아다미가 푸치니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그에게 달려갔다. 토스카니니는 아다미의 얼굴만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챘다. 그는 분장실로 가서 소파에 몸을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투란도트]의 초연은 1년 연기됐다. 토스카니니는 푸치니가 완성한 부분까지 지휘한 뒤 지휘봉을 내리고 청중들에게 돌아서서 ‘마에스트로 푸치니는 여기까지 작곡하셨다’고 말한 뒤 퇴장했다. 다음날부터 그는 프랑코 알파노(Franco Alfano)가 마무리한 3막 뒷부분까지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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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니니.

푸치니. 1908년

토스카니니는 카탈라니가 죽은 뒤 64년, 푸치니가 죽은 뒤 33년을 더 살았다. 만년까지 그는 [라 왈리]를 비롯한 카탈라니의 작품과, [라 보엠], [투란도트]를 비롯한 푸치니의 작품을 널리 알리는 데 힘을 쏟았다. 일찌감치 푸치니를 선택한 ‘세상’은 그 결정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토스카니니는 만년의 인터뷰에서 나타나듯 세월이 갈수록 카탈라니에게 더욱 확고한 지지와 신뢰를 보냈고, 그의 너무 이른 죽음을 못내 아쉬워했다.

토스카니니는 카탈라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녹음테이프에서 “내가 딸 이름을 왈리로 지었지 않은가”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바로 카탈라니 최후의 야심작 [라 왈리]의 여자주인공 이름이다. 이 대화를 녹음한 토스카니니의 아들 이름 ‘왈터’도 같은 오페라의 남자 배역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