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양지 - 신라 최고의 불교 예술 장인

히메스타 2018. 2. 1.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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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고의 불교 예술의 장인이라면 단연코 양지(, ?~?)를 들 수 있다. 그는 미술사학자들에게는 유명한 인물인지만,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 유럽에 미켈란젤로가 있었다면, 신라에는 선덕여왕(, ?~647)~문무왕(, 626~681) 시기에 활동했던 양지가 있었다고 할 만큼, 그는 서예, 조각, 기와 공예 등 다방면에 걸친 재능을 발휘한뛰어난 예술가이자 고승()이었다.

고승 양지

양지 스님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양지사석(使)’ 편이 그나마 자세한 편이지만, 그 기록에서조차 그의 출생과 죽은 연도,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고 있다. 그는 단지 신라 선덕여왕 시기에 등장했다고만 되어 있다.

[삼국유사]는 그에 대한 신비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가 지팡이 끝에 포대 하나를 걸어두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가 시주받을 집에 가서 흔들어 소리를 낸다. 그러면 그 집에서 이를 알고서 시주를 하며, 포대가 다 차면 지팡이가 다시 그에게로 날아온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 때문에 그가 거주한 사찰의 이름이 석장사()였다. 석장사는 경주시 석장동 동국대학교 뒤편 산 중에 있었다.1986년 동국대학교 박물관팀은 그가 창건했다는 석장사 터를 발굴하여, 그가 돌에 새겨 넣은 연기법송()의 글씨와 불탑·불상이 새겨진 전탑 벽돌 190여 점을 찾아내기도 했었다. 그가 전설적인 인물이 아니라, 실존했던 인물임이 발굴을 통해서 확인된 것이다.

그가 영묘사()의 장륙상을 만들 때에는 불교의 깨달음 경지에 이르러 부처님의 모양을 만드니, 성안의 여자들이 다투어서 진흙을 날라다 주며 양지 스님의 작업을 도우며 [풍요]라는 향가 노래를 불렀다.

오라 오라 오라. .
오라 인생은 슬프더라.
서러워라 우리들은,
공덕 닦으러 왔네

영묘사 장륙상은 단순히 손끝의 재주가 아니라, 종교적인 영감으로 갖고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그의 작품 활동은 일반 백성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았다.

다재다능한 양지

양지는 여러 가지 기예()에 두루 통달하여,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서화, 조각 등의 손재주에 뛰어나, 영모사 장육삼존상과 천왕상, 전탑의 기와, 천왕사 탑 하단의 팔부신장(사천왕사 녹유소조상), 법림사()의 주불() 삼존()과 좌우 금강신 등은 모두 그가 만들었다. 또한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을 썼으며, 벽돌을 조각해 작은 탑을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을 만들어 사찰의 탑에 봉안기도 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1206~1289) 스님은 양지 스님을 “재주가 구비되고, 덕이 풍부하였으며, 여러 방면의 대가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신의 실력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재주를 덜 드러냈다고 해도, 그가 남긴 작품만으로도 그의 놀라운 재능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공교명()에 충실한 승장()

양지는 불교의 진리를 깨달은 고승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조각 등의 기술을 익히고, 이를 적극 발휘했다. 불교 경전 가운데 [유가사지론()]에는 승려들이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오명() 즉 공교명(, ), 인명(), 성명(), 의명(), 내명()을 체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있다. 이 가운데 공교명은 수공업기술을 가리킨다. 즉 수공업기술로 많은 재보()를 만들어 여러 중생에게 베풀라는 것이다. 이런 불교의 사상은 승장의 출현을 만들었다. 양지 스님이 다양한 기술을 익히고 베푼 것은, 그 스스로가 공교명을 체득하여 중생에게 베풀자는 불교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라는 선덕여왕 이후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켰다. 선덕여왕은 자신의 약한 왕의 권위를 메우기 위해 불교적인 권위를 빌렸고, 문무왕은 전쟁에 지친 백성들의 민심을 달래고 국가의 안위를 부처님에게 의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때 황룡사(), 분황사(), 사천왕사 등 많은 사찰이 건축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지 스님은 많은 작품들을 만들 수가 있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작품들뿐만 아니라, 분황사 모전석탑의 인왕상, 문무왕 화장터로 추정되는 능지탑의 소조상, 금속공예의 극치로 꼽히는 감은사() 동서 쌍탑의 사리구 등도 양지스님의 손길이 미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의 대표작은 사천왕사의 탑 기단부를 장식했던 녹유소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천왕사 녹유소조상

사천왕사는 679년 완공된 통일신라시대 불교에 기대 국가의 안위를 비는 호국사찰이다. 1금당 2탑 양식의 절에는 대형 목탑이 2곳이 있었다. 이 탑 기단부에 한 면에 6개씩, 한 탑에 24개, 두 탑에 총 48개의 녹유소조상이 조각되어 있다.

양지 스님은 기와를 만드는 제작기법을 활용해, 높이 90㎝, 너비 70㎝, 두께 7~9㎝ 크기의 녹색 유약을 입힌 벽돌판() 위에 갑옷 차림에 화살, 칼 등을 든 수호신이 악귀를 짓밟고 부처님의 나라를 지키는 신장의 자태를 묘사했다. 신장은 다채로운 얼굴 표정, 화려하고 정교한 갑옷, 세련된 신체 표현자세까지 뛰어난 생동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흙으로 빚어 유약을 발라 거푸집으로 찍어 구워 만든 것이다. 그런데 거푸집만으로는 손발톱까지 생생하게 드러나게 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거푸집으로 만든 작품에 다시 정성을 다해 조각을 더한 작품인 것이다. 이 작품에는 세밀함과 역동적 입체감이 생생히 살아 있다. 이런 정교한 작품은 고도의 경험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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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지에서 발굴된 녹유소조상 조각. <출처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녹유소조상 3D 복원도. <출처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양지는 세계인

석장사의 탑상문전()은 전탑()에 사용되는 벽돌에 탑과 불상을 새긴 문양전을 말한다. 양지 스님은 전돌 제작에 7가지 이상의 틀을 만들어 기와를 찍듯 찍어서 만들었다. 탑상문전은 문양이 새겨진 면이 6×43cm의 크기에 4구의 불상과 탑이 번갈아가며 새겨져 있다. 이 전돌에 새겨진 불상이 [삼국유사]에 기록된 삼천불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불상은 정교하고도 사실적 표현, 입체감을 강조하여 형상만을 부각시킨 추상적 표현, 선으로 묘사된 음각상() 등 3가지 표현방식을 갖추고 있다.

표현방식의 특이함 뿐만 아니라, 독특한 불상도 눈에 뜨인다. 연화좌()가 생략된 채 가슴 안쪽에 갈비뼈를 3단으로 새긴 불상은 우리나라의 고대 불교조각 가운데 유일한 부처님의 고행상()이다. 석가모니가 아직 깨달음을 얻기 전에 모습을 표현한 고행상은 인도에서 많이 발견되지만,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양지가 만든 것이 유일하다. 석장사 탑상문전은 인도에서 유행하던 것이다.

양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감은사 사리함의 외면에는 사천왕상이 표현되어 있다. 사천왕상은 굳은 얼굴에 수염이 난 모습이 서역인의 용모이며, 갑옷 역시 기원을 서역에 두고 있다. 신강 위구르 지역에서 출토된 천왕상과 유사한 점이 보인다. 게다가 인도, 중앙아시아에서 유래된 사실적 묘사기법은 중국에서도 7세기 중반에 겨우 유행하기 시작하는데, 양지는 거의 동일한 시기에 독창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어떤 연구자들은 [삼국유사]에 그의 조상이나 고향이 자세하지 않다는 점과 그가 중앙아시아의 기법에 익숙하다는 점을 들어, 그가 중국이나 중앙아시아 등에 유학을 갔다 왔거나, 외국인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출신이 어디이든, 양지 스님은 신라인으로, 신라인의 사랑을 받은 스님이고, 예술가였다. 그의 작품은 해학이 넘친다. 이러한 특징은 중국이나 인도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다. 양지의 작품은 신라에서 처음 보는 대단히 새로운 양식을 갖추고 있어, 한국 고대 미술사에서 있어서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만든 천재적인 예술가였다.

양지가 등장한 배경에는 개방적인 나라 신라가 있었다. 신라는 강대했던 고구려, 당과 전쟁을 하면서, 신라는 타국의 문화와 기술을 빠르게 흡수했다. 그것이 당시 신라의 강점이었다. 신라의 개방성이 양지 스님과 같은 위대한 예술가를 탄생시켰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