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성종 - 고려시대, 유교사회의 기틀을 확립하다.

히메스타 2018. 1. 17. 15:54

 이미지 1

고려 성종(, 960~997, 재위 981∼997)대는 혜종·정종·광종·경종대의 정치적 혼란이 수습되어 국가체제 정비가 요구되는 시기였다. 고려는 불교를 신봉한 사회였지만, 여전히 정치적 지배 이념에 있어서는 공백 상태나 다름없었다. 고려는 성종대에 들어와 비로소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채택하여 합리적인 국가 운영 체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유교 사회를 표방하여 그 기틀을 확립한성종은,왕인(, ?~?),조선의 성종(, 1457~1494)과도 비교되곤 하는데, 수성기에 접어든 고려사회를 합리적인 유교사회구조로 개편하고자 했던 왕으로서 그 업적을 인정받고 있다.

부인의 후광으로 왕이 되다

고려 제5대왕 경종(, 955~981)이 세상을 떠날 무렵 그에게는 아들 송(, 목종)이 있었으나 겨우 2살에 불과했다. 때문에 경종은 당시에 학덕있고 현명하기로 이름 높은 종제 개녕군 치()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가 바로 제6대 왕 성종이며 이 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성종은 적장자로 왕위를 계승한 인물이 아니었다. 960년 태조(, 877~943)의 아들 대종 욱(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과 태조의 딸인 선의왕후(, ?~?) 유씨(제6비 정덕왕후 유씨 소생)와의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성종에게는 이미 형 효덕태자와 아우 효경태자가 있었다. 사실 경종이 이들을 제쳐 놓고 굳이 성종에게 양위를 한 것은 현명하기로 이름이 높아서만은 아니었다.

성종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제1비가 된 문덕왕후(, ?~?) 유씨는 광종(, 925~975)의 딸이다. 광종은 성종의 아버지 대종과는 이복형제간이고 또 대종의 누이는 광종에게 출가하여 대목왕후(, ?~?)가 되었다. 그러므로 광종은 조카이면서 동시에 처조카가 되는 성종에게 자신의 딸을 준 것이다.

사실 성종과 결혼한 문덕왕후는 초혼이 아니었다. 이미 홍덕원군에게 출가하였는데 그만 이별하고 성종과 재혼한 것이다. 홍덕원군은 태조의 손자로 제7비 헌목대부인(, ?~?) 평씨 소생 왕자인 수명태자의 아들이다. 문덕왕후는 성종과 결혼하기 전에 이미 4촌과 혼인을 하였다가 다시 종형제인 성종에게 출가한 것이다. 더욱이 문덕왕후는 대목왕후의 소생으로 선왕인 경종과는 남매지간이었다. 성종은 문덕왕후와 혼인함으로써 광종의 사위가 되는 동시에 경종과는 사촌지간에다 처남 매부사이가 된 것이다. 이는 왕위계승권을 보장받게 된 것이다.

이에 반해 제2비 문화왕후(, ?~?)는 김원숭의 딸로 성종의 첫번째 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주 출신의 문덕왕후에 밀려 평생 둘째부인 대우를 받은 여성이었다. 마지막 제3비 연창궁부인(, ?~?)은 유학자 최행언의 딸인데 최행언은 성종 2년에 과거에 합격한 유학자로 일찍이 고려왕실과 혼인한 적이 없었던 경주 최씨 가문 출신이었다. 성종은 기왕의 왕실혼 관습을 충실히 지키면서 한편으로 유학자 집안과도 혼인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새로운 혼인 양태는 유교정치를 표방한 그의 정치적 이념과 일견 부응하는 면이 있는 것이었다.

새로운 유교사회의 건설

성종은 어머니 선의왕후가 일찍 죽어 할머니 신정왕후 황보씨에 의해 길러졌다. 그런 이유로 경종과 마찬가지로 외가인 황보씨 가문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경종이 성종에게 호감을 가진 것도 같은 황보씨 외가를 두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성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유학에 밝고 인품이 뛰어나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광종 이후 형성된 유교적 분위기에서 자라난 그는 유교적 정치이념을 실현한 왕이었다. 성종은 숭유억불정책을 노골화하면서 왕권 확립을 위한 새로운 통치체제를 구현하는 데 주력하였다.

981년 성종은 즉위와 동시에 유교사회 건설을 표방했다. 그리고 이듬해 정5품 이상의 모든 관리에게 시무와 관련한 상소를 올릴 것을 명하였다. 이 때 종2품 정광행선관어사상주국으로 있던 최승로(, 927~989)는 5대왕에 대한 평가와 함께 장장 28조에 달하는 장문의 시무책을 올렸다. 이것이 곧바로 성종에게 채택되어 고려사회는 또 한 번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최승로의 시무책이 고려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했던가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이 그 전문을 모두 수록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상소문을 올린 982년 당시 최승로의 나이는 56세였다. 학문으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원숙하고도 남을 나이에 자신을 인정해 주는 성종을 만나자 그 동안 갈고 닦았던 모든 학문적 역량과 정치적 식견을 시무 28조에 담아 올렸다. 이 때부터 최승로는 젊은 성종을 보좌하는 노련한 정치보좌관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꽃피웠다. 최승로의 성공은 호학의 군주이자 유교를 신봉하는 성종의 절대적인 신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승로의 유교적 정치이념이 성종대에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그렇게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광종이 이미 그 길을 터주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광종대 실시된 과거제의 영향으로 유교적 문풍이 유행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호족세력들이 제거됐기 때문에 유교적 정치이념이 비로소 구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승로는 성종에게 서슴지 않고 일의 잘되고 못됨을 지적했다. 성종은 종래 군주들과 달리 개방적인 인물이었다. 최승로의 건의를 그대로 받아 들였고, 힘을 실어 주고자 정2품 문하시랑평장사에 임명하여 유교 정치이념을 제도적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에 돌입하게 했다. 12목()의 설치와 2성 6부제를 바탕으로 한 중앙관제의 정비는 모두 유교사회를 표방한 성종과 최승로의 합작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울러 불교 행사인 팔관회와 연등회를 폐지하여 고려사회는 한층 더 유교사회로 향하게 되었다.

거란의 침입

우리 나라 역사에서 외적의 침입을 겪지 않은 시기는 거의 없지만 그 가운데서도 고려시대는 정도가 특히 심했다. 고려는 전 역사를 통해 북쪽의 거란과 몽고, 심지어는 홍건적의 침입에 시달렸으며 남쪽의 왜구마저 고려를 가만두지 않았다. 외침에 관한 한 고려시대는 우리 민족사상 가장 혹독한 시련기였다.

외적 가운데 고려를 가장 먼저 괴롭힌 것은 거란이다. 태조가 창업한 지 백년도 채 못된 성종대부터 거란의 침입은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고려와 거란이 사이가 좋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태조 초기에 고려는 거란과 통호하였으나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켜 버리자 ‘구맹()을 저버린 무도한 자들’이라 생각하여 국교를 끊어 버렸던 것이다.

그 뒤 거란은 국호를 요()라 바꾸고 중원마저 위협하는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중국에서는 송()나라와 요(거란) 사이에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는 송나라와 손을 잡고 북진 정책의 교두보 확보에 나서려 했다. 고려의 야심에 거란은 제동을 걸 필요가 있었다. 또한 송나라를 제압하기 위해서 고려를 정복하여 배후의 세력을 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거란의 고려 침공의 명분이었다.

993년(성종 12) 거란이 고려 침공의 포문을 열었다. 고려 조정은 사태가 급해진 것을 알고 각 도에 병마제정사(使)를 파견했다. 그리고 10월에 시중 박양유(, ?~?)를 상군사(使)로, 내사시랑 서희(, 942~998)를 중군사로, 문하시랑 최량(, ?~995)을 하군사로 각각 임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북방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때는 거란의 동경(요양)유수 소손녕(, ?~?)의 군대가 이미 압록강을 건너 온 상태였다. 중군사 서희는 급히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쪽으로 달려갔다. 서희가 도착하자 소손녕은 항복하라는 말로 거드름을 피우며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계속된 소손녕의 위협은 협박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소손녕이 몰고 온 군사는 소수에 불과한데다가 그 당시 거란은 고려의 군사력을 상당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소손녕의 본심을 간파한 서희는 ‘화해가 가능할 것 같다’고 성종에게 알렸다. 성종은 즉시 어전회의를 열어 대책을 강구하도록 했다. 회의에 참석한 대신들은 화친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가 일찍이 서경을 중시하며 북진정책을 펴 온 것에 비하면 이 날의 어전회의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화친론이 대세를 이루자 성종은 하는 수 없이 서경 이북의 땅을 내주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때 성종은 서경 창고에 있던 쌀을 모두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거란이 이용할 수 없게 대동강 물에 버리라고 명령했다. 이 같은 명령에 대해 혹자는 성종이 서경 땅보다 창고에 있는 쌀을 거란에게 빼앗길까 더 두려워했다고 지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대체로 호학의 군주는 전쟁을 피하려는 성향이 강하고, 다만, 군량미를 적군이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조처였을 뿐이다. 여하튼 주전파였던 서희의 강력한 반대로 성종은 대동강에 쌀을 버리라는 명령을 취소시켰다. 거란의 침입을 계기로 신라 6두품 계열의 정치적 영향력은 줄어들고 서희를 중심으로 한 서경 세력으로 정치 세력의 교체가 일어나고 있었다. 화친파에 대항해 서희는 고구려의 옛 땅을 거란에게 내줘서는 안 된다며 끝까지 싸울 것을 주청했다. 곁에 있던 전 민관어사 이지백(, ?~?)도 서희를 거들고 나섰다.

“함부로 땅을 잘라 적국에게 내주는 것보다는 선왕 때의 연등회나 팔관회, 화랑 등을 다시 시행하여 국가를 보전하고 태평을 이루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지백의 지지로 서희는 힘을 얻었지만, 사실 이지백과 서희의 주전론은 약간 내용이 다른 것이었다. 성종은 중국문화를 매우 선호한 왕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부 여론은 그러한 성종의 취향에 대해 은근히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이지백은 국난을 기회로 삼아 성종의 중국 경도에 제동을 걸고자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서희와 이지백의 간언으로 서경 이북땅을 내주려는 주장은 철회되었다.

선왕의 은혜를 지키다

997년 10월, 38세의 성종이 재위 16년 만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죽기 전 경종의 장자인 개령군 송()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이 때 개녕군 송의 나이 18세, 이가 제7대왕 목종(, 980~1009)이다. 성종이 목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은 아들이 없고 딸만 두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아들이 없었던 성종은 송을 궁궐에서 양육하여 개령군에 봉하는 등 아들처럼 길렀다. 선왕인 경종이 비록 2살이지만 왕자 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선위해 준 은혜를 저버리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목종을 낳은 헌애왕후(, 훗날의 천추태후)는 성종의 친동생이었다. 고려의 왕위계승에서 성종이 외조카 목종에게 선위를 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고려사회에서 여형제는 남형제 못지 않았고 왕녀일 경우에는 더욱 밀접했다. 고려왕실에서 왕손보다 부마가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곤 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