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진천(仇珍川, ?~?). 그는 기계 활인 노(弩)를 만들던 신라의 기술자로, 너무나 뛰어난 기술을 가졌기 때문에 당나라로 불려 갔다. 당나라가 탐을 낸 기술자 구진천. 그는 누구인가?
6두품 기술자 구진천
구진천이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7세기 중엽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던시기 활약했다. 그의 최종 관등은 8위 사찬(沙飡)이었다. 신라 역사에서 또 다른구(仇)씨로, 668년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평양 남교다리 전투에서 제1의 공로자로 술간(述干)의 지위를 받은 군사(軍師)인 구기(仇杞, ?~?)란 자가 있다. 술간은 신라 시대 지방인에게 주는 관위(官位)인 외위(外位) 11등급 중 둘째 등급으로, 경위(京位)로 따지면 8위인 사찬(沙湌)에 해당된다. 구기와 구진천의 관등이 같은 셈이다. 두 사람이 모두 6두품에 오를 수 있는 사찬이 된 것으로 볼 때, 구진천의 신분은 6두품이었다고 하겠다.
강력한 무기 노(弩)
구진천이 만든 노(弩)는 방아쇠를 사용하여 화살을 발사하는 활이다. 활은 오랫동안 훈련을 받아야 제대로 활시위를 당겨 쏠 수가 있다. 반면 노는 발과 두 손을 이용해 활시위를 당겨 고정해 놓고, 화살을 걸고 방아쇠를 당겨 쏠 수가 있기 때문에, 훈련이 부족한 병사들이라도 쉽게 사용할 수가 있다. 물론 활에 비해 사격 속도가 느린 단점은 있다. 하지만 노는 활에 비해 화살을 더 멀리 날려 보낼 수가 있고, 목표물을 뚫는 관통력도 강하다. 연노(連弩)의 경우에는 간단한 동작 하나로 적에게 한꺼번에 연속해서 화살을 퍼 붇거나(연발식), 여러 개 화살을 동시에 발사(다발식)할 수가 있다. 또한, 상자노(床箱子)는 노를 대형화시켜 발사대나 차량에 탑재시킨 것으로 투석기, 대포와 같은 효과를 거둘 수가 있다.
노는 처음 누가 발명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미 기원전 5세기 중국에서 널리 사용된 바 있다. 7세기 당나라 군대는 전체 병사의 약 20%가 노로 무장을 하기도 했다. 고구려의 경우 408년에 만들어진 덕흥리 벽화무덤에서 노가 보인다. 신라의 경우는 진흥왕(眞興王, 534~576) 19년(558)에 나마(奈麻, 11위 관등) 신득(身得, ?~?)이 포노(包努)를 만들어 나라에 바쳤다는 기록이 처음이다. 포노는 상자노와 같이 성을 방어하기 위한 노로, 대포와 같이 멀리 활을 달려 보낼 수가 있다. 진흥왕은 신득이 만든 포노를 성 위에 비치하여 방어용 무기로 사용하게 했다.
신라는 고구려, 당나라에 비해 기병의 숫자가 부족하다. 기병을 상대할 때 효율적인 무기는 장창(長槍)과 노다. 노는 강력한 관통력으로 말을 쏘아 죽일 수가 있으므로, 기병을 상대해야 하는 보병의 무기로 사용될 수가 있다. 따라서 신라는 노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노 기술자가 우대받던 시대
삼국시대는 생존을 위해 각국이 치열한 경쟁을 하던 시기다.세 나라는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무기 개발에 열을 올렸다. 고구려는 6세기 말 수나라와의 전쟁을 예감하고 재물을 뿌려 수나라의 노수(弩手, 쇠뇌를 쏘는 군사)를 빼어 오기도 했다. 노를 만드는 기술자는 적국에서라도 스카우트해올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던 시대였다. 신라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에 기록된 장척(匠尺), 문척(文尺) 등의 기술자는 5~4두품에 해당되는 관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구진천은 6두품이고, 8위 사찬 관등을 갖고 있었으니, 신라에서 우대받은 기술자였다고 하겠다.
구진천이 만든 노는 1천 보나 활을 날려 보낼 수 있는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이러한 노는 신라가 적과 상대할 때, 대단히 유용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신당서(新唐書)]에는 신라가 관문에 항상 노사(弩士) 수천 명을 주둔시켜 지킨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는 신라를 대표하는 무기를 노로 본 것이다. 669년 겨울 당나라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당황제의 명이라면서, 노사(弩師) 구진천을 당나라로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신라는 이때까지 당나라와 싸울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나라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가 구진천을 데려간 것은 장차 신라와 전쟁을 하기 위함이었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신라마저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신라 역시 당나라의 계획을 알고 고구려 유민들을 몰래 지원하기 시작했다. 670년 3월 신라가 당나라를 상대로 공격함으로써, 나당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진천은 당나라에 머물게 된다.
당나라에 협조를 거부한 구진천
당나라 고종 황제는 구진천을 만나자, 목노(木弩)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구진천은 어쩔 수 없이 노를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구진천은 엉터리로 노를 만들었다. 구진천이 만든 노는 30보 밖에 나가지 않았다. 고종은 구진천에게 따졌다.
“너의 나라에서 만든 노는 1천 걸음을 나간다고 들었는데, 지금 만든 것은 겨우 30보 밖에 나가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그러자 구진천은 대답했다.
“나무 재료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라의 목재로 만든다면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당나라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노를 만들 나무를 요구했다. 신라는 이번에도 대나마(大奈麻, 10위) 복한(福漢, ?~?)을 보내어 나무를 당나라에 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구진천은 노를 다시 만들게 되었다. 구진천은 쇠뇌를 다시 고쳐 만들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기술을 발휘하지 않았다.
당나라 황제는 다시 활을 쏘아보니 겨우 60보 밖에 나가지 않자, 구진천에게 이유를 물었다. “저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목재가 바다를 건너올 때 습기가 배어들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라고 구진천은 에둘러 대답했다. 그러자 당나라 황제는 그가 고의로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의심하고, 구진천에게 제대로 만들지 않으면 무거운 벌을 주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구진천은 끝까지 자신의 재능을 모두 발휘하지 않았다.
애국자 구진천
구진천에 관한 기록은 오직 [삼국사기] 기록에만 등장한다. 그가 당나라의 요구를 거절한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분명 비참하게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그가 변절을 해서 당나라에 협조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후 당나라가 1천 보나 나가는 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신라와 전쟁을 하면서, 대규모 기병을 동원했다. 675년 9월 신라군이 매초성에 주둔한 당군을 물리치고 3만여 필의 말을 포획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당나라가 동원한 기병은 돌궐, 거란, 말갈 출신으로, 말을 타는데 능숙했다. 신라는 672년 장창당(長槍幢) 부대를 창설하는 등, 당나라 기병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신라의 장창부대는 창만으로 구성된 부대가 아니다. 창은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며 속도를 줄이는데, 사용된다. 기병이 속도를 줄이면, 창병 뒤에 있던 노병과 궁수들이 화살을 날려 적을 죽이는 것이다. 실제로 법당감(法幢監) 부대 194명 가운데 45명, 법당두상(法幢頭上) 부대 192명 가운데 45명, 법당화척(法幢火尺) 259명 가운데는 45명, 법당벽주(法堂辟主) 부대 435명 가운데 135명이 노당(弩幢)에 속한 병사들이었다. 이렇듯 신라의 각 부대에는 많은 수의 노를 다루는 병사들이 있었다. 이들의 활약 탓에 신라는 당나라의 강력한 기병들을 물리칠 수 있었고, 마침내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다.
기술에는 조국이 없지만, 기술자에게는 조국이 있다. 신라의 쇠뇌는 당나라의 무서운 기병을 막는 최고의 무기였다. 만약 신라에 구진천과 같은 기술자가 없었다면, 과연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칠 수 있었을까. 신라의 삼국통일은 김유신(金庾信, 595~673),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04~661), 문무왕(文武王, 626~681) 3인의 공이 가장 컸다고 하지만, 이들에 못지않게 구진천과 같은 기술자들의 공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구진천은 자신의 출세를 버리고, 목숨을 버려가며 나라를 위해 신라의 기술을 지켜냈다. 구진천이 만든 뛰어난 성능을 가진 노를 당나라 병사들이 손에 쥐었다면,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구진천은 자신이 만든 노에 의해 신라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음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는 신라에게 비수가 되어 되돌아올 수도 있는 자신의 기술을 끝내 감추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국가적 기밀, 산업의 노하우가외국에 유출되고 있다는소식을 쉽게 접하게 되는 오늘,신라의 기술자 구진천과 같은 사람들이 더욱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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