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조선 초기 음악을 정리한 음악이론가이자 문화예술 행정관료 - 박연

히메스타 2017. 1. 10. 11:04

 

박연 이미지 1

흔히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악성으로 알려져 있는 박연( , 1378.8.20~1458.3.23)은 음악가 이전에 꽤 높은 자리까지 오른 문화 행정 관료이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해준 훌륭한 임금 세종을 만난 덕에 역사 속에 묻혀간 흔한 고위관료에 머물지 않고 조선의 음악을 정리 정돈하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피리를 잘 부는 전도양양한 청년

박연은 고려 우왕 때 삼사좌윤 박천석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은 현재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이다. 본관은 밀양, 초명(- 아이 때 부르던 이름)은 연()이고 자는 탄부(), 호는 난계()인데 그의 집 정원에 난초가 유난히 많아서 이런 호가 붙었다고 한다.

그의 가문은 고려시대부터 관료를 지낸 가문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중앙의 주요 관직을 역임했다. 박연은 어렸을 때 한양이 아니라 영동에서 자라면서 영동향교에서 학문을 닦았다. 이 시절 박연은 좋은 가문의 전도양양한 수재로 소문이 났고, 더불어 어린 나이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산소를 오랫동안 지킨 효자로도 그 명성이 자자했다. 그의 효성에 대해서는 호랑이도 어린 박연의 시묘살이(산소 옆에 오두막을 지어놓고 탈상 때까지 3년 동안 산소를 지키는 일)를 지켜주었다는 민담이 전해질 정도이다.

이 시절부터 박연은 음악적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특히 피리를 잘 불었다고 한다. 한편으론 그가 가야금을 연주할 때면 새와 짐승들이 와서 그 소리에 맞춰 춤을 추었다는 다소 과장된 민담이 전해지기도 한다. 박연의 음악적 재능은 조선초기 학자인 성현의 [용재총화]에도 나오는데, 특히 그가 피리불기를 배우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대제학() 박연()은 영동()의 유생이다. 젊었을 때에 향교()에서 학업을 닦고 있었는데 이웃에 피리 부는 사람이 있었다. 제학은 독서하는 여가에 겸하여 피리도 배웠다. 이에 온 고을이 그를 피리의 명수()로 추중(- 높이 받들어 귀하게 여김)하였다.

제학이 서울에 과거를 보러 왔다가 이원( 장악원)의 피리 잘 부는 광대를 보고 피리를 불어 그 교정()을 청하니, 광대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소리와 가락이 상스럽고 절주(- 리듬)에도 맞지 않으며, 옛 버릇이 이미 굳어져서 고치기가 어렵겠습니다."고 하였다. 제학이 말하기를, "비록 그러하더라도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라고 하고, 날마다 다니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수일 후에 광대가 제학의 연주를 듣고는 말하기를, "규범(- 법도)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장차 대성할 수 있겠습니다."고 하였다.

이처럼 박연은 어렸을 때부터 피리를 불며 음악에 심취하였고, 더욱이 음악적 성취를 위해서는 신분이 미천한 광대에게도 배움을 청할 만큼 소탈한 성격에 음악적 열망이 가득 찬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피리뿐 아니라 비파, 거문고 등도 익혀서 매우 수준급으로 연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상, 음악적 재능은 관료로 나아가는 데에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박연은 음악적 재능과 열망을 누그러뜨린 채 관료의 길을 걷고자 하였고, 이는 28세의 나이에 과거 급제라는 성과를 내면서 순탄하게 시작되었다.

세종과의 만남

관직에 오른 박연은 음악적 재능은 잠시 접어두고 관료로서 승승장구한다. 집현전 교리를 거쳐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 출세가도인 청요직()을 두루 섭렵하던 박연이 다시금 음악적 재능을 발휘할 길을 찾은 것은 당시 세자 자리에 있던 세종의 세자 시강원 문학직을 맡으면서부터였다. 박연의 재능을 알아본 세종은 임금으로 즉위한 뒤 박연을 관습도감(조선 초기 음악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 제조로 임명하여 음악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당시 조선은 개국 초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가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던 때였다. 그러한 때에 성군이면서 각 분야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가득하던 세종은 각종 국가 행사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새롭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고려 때까지 국가행사에서 사용하던 음악은 정형화된 바 없이,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하여 이용되었다. 그래서 궁중음악은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던 향악과 당나라의 당악, 송나라 때 전해온 아악 등등이 혼재되어 있었다. 세종은 박연에게 명하여 이들 음악을 일관성 있게 정리하도록 하였고, 송나라에서 시작된 성리학을 국가의 기본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던 조선이었던 만큼 국가 행사에 이용되는 공식 음악의 기본을 아악1)으로 정리하고자 하였다.

조선의 궁중음악을 정비하다

세종의 명령과 배려로 음악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얻은 박연은 우선 이전까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악보를 편찬하고 필요한 악기를 만들어 제각각이던 악기의 음을 제대로 조율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향악, 당악, 아악의 율조를 조사하고 악기 보법(- 악보의 원칙) 및 악기의 그림을 실어 악서()를 만들었다. 또 많은 아악기를 제작하였는데, 석경을 비롯하여 생포, 방경, 훈축, 토악, 대고, 영고, 뇌고, 노고, 죽독, 건고, 편종 등을 모두 옛 제도에 맞도록 제작, 혹은 개조하였다. 그리고 이 악기들의 음을 모두 정확히 조율하여 연주 시에 깨끗한 화음을 낼 수 있도록 하였다.

악기 조율에 대해서는 역시 성현의 [용재총화]에 박연의 절대 음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세종이 일찍이 석경()을 만들고 제학(박연)을 불러 교정하게 하였더니...
제학이 말하기를, “어느 음률()은 일분() 높고, 어느 음률이 일분 낮습니다.”고 하였다. 다시 보니 음률이 높다고 한곳에는 찌꺼기가 붙어 있었다. 세종이 찌꺼기의 일분을 떼어내라고 명령하였다. 또 음률이 낮다고 한곳에는 다시 찌꺼기 일분을 붙였다. 제학이 아뢰기를, “이제 음률이 바르게 되었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그의 신묘()함에 탄복하였다.

여러 악기의 조율에 필요한 것은 편경이란 악기였다. 이 편경은 돌로 만든 것이어서 쇠로 만든 종같이 더운 온도에 영향을 받지 않아 음이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편경의 소리는 다른 여러 악기를 조율할 때 기준이 되었다. 편경은 중국의 악기였고, 당시에는 편경을 만들 돌이 우리나라에 없다고 생각해 쇠로 편경과 비슷한 것을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에 음의 기준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세종 시기 편경을 만들 경석이 화성에서 발견되었고, 또 편경을 조율할 율관 제작에 필요한 거서(곡물의 일종으로, 도량형기 제작에 쓰임)가 웅진에서 나 박연은 조선의 실정에 맞은 편경을 제작할 수 있었다. 박연의 감독하에 세종 8년 가을부터 세종 10년 여름까지 종묘와 영녕전 및 제사에 쓸 편경과 등가에 쓸 편경, 특경 등 528매가 만들어졌다. 이 편경은 중국의 경보다 음이 더 잘 맞았다고 한다.

박연이 정비하여 궁중 아악에 사용해온 악기들. 왼쪽부터 편경, 편종, 특종, 방향()이다. 현재도 종묘제례악에 쓰이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악보와 악기가 마련되자 박연은 본격적으로 궁중음악으로 아악을 연주하도록 하였다. 1431년(세종13) 박연은 아악에 맞는 악기를 제작하여 왕에게 올렸고, 이 악기로 정월하례에 새로 제정된 아악이 처음으로 연주되었다. 세종은 국가 공식 행사에 쓰일 음악의 기준을 만든 박연에게 안마(- 안장을 얹은 말)를 하사할 정도로 매우 흡족해 했다고 한다. 이후 박연은 옛 문헌 등을 참고하여 잘못된 부분을 점차로 고쳐나갔고, 마침내 세종 20년대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음악으로 정통적인 아악을 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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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에 위치한 난계사. 난계 박연을 모신 사당이다.

박연의 글을 모아 엮은 시문집 난계유고(稿). 여기에 실려있는 상소문 39편은 대부분 악기, 음률, 악제 등 음악에 관련된 것으로 조선 전기 음악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의 음악을 성리학에 입각하여 정리해가면서 왕의 총애를 받던 박연에게 시련이 닥쳤다. 그것은 어쩌면 왕과 밀착된 그에 대한 세간의 질투와 경계로 인한 사건이었다. 박연은 승문원(- 외교문서를 처리하던 관서) 자리에 대해 호걸이 날 자리라고 별 의미없는 말을 하였다가 큰 모함을 받기에 이른다. 왕조에서 호걸이 왕가가 아니라 다른 데서 난다는 것은 역성혁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연의 말을 들은 자가 이를 고해바치자 조정은 들끓었다. 결국 박연은 유언비어 유포죄로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적 재능은 누구도 따라 올 자가 없었기에 음악 정리 사업은 계속 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고 그마저도 곧이어 복직되었다. 이후 박연은 음악과는 다소 거리가 먼 관직을 거치게 되는데, 공조참의·중추원첨지사()를 거쳐 중추원동지사를 지냈으며 1445년에는 성절사(使- 중국으로 보내던 사절단)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부윤()·중추원부사를 역임한 후 예문관 대제학()에까지 올랐다.

세종이 죽고 난 뒤 박연은 문종과 단종을 모시며 고위직 관료의 길을 걸었지만 말년에 상당히 큰 불운을 겪게 된다. 그것은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때문이었다. 그의 막내 아들 박계우가 세조에게 반대하다가 처형된 것이다. 아들은 잔혹하게 죽음을 당하고 며느리는 정난공신 홍윤성 집안의 노비로 전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가운데 박연 또한 연루되어 죽을 위기가 닥쳤지만, 그가 3조에 걸친 원로라는 점이 인정되어 파직으로만 그쳤다.

막내 아들을 잃고 관직마저 박탈당한 박연은 고향인 영동으로 낙향하였다. 임금의 총애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했던 젊은 날을 뒤로 하고, 박연은 하인 한 명만을 거느린 채 한양을 떠났다. 그가 한강에서 배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갈 때, 작별인사 차 나온 지인들을 위해 불어준 피리소리는 듣는 이의 애간장을 녹일 정도로 슬펐다고 한다.

낙향한지 4년 만에 박연은 81세의 나이로 쓸쓸히 세상을 등졌다. 그의 유해는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에 안장되었으며 영동의 초강서원()에 제향되고, 영조 43년에 문헌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박연이 죽은 뒤 세조는 악학도감이 된 성임에게 ‘배워서 박연을 따를 수 있겠느냐’고 물을 정도로 박연의 재능을 높이 샀다. 중국 순()임금 시대의 유명한 음률가인 기()에 비견되기도 했던 박연은 조선시대 내내 대표적인 음악가로 그 이름을 남겼으며, 지금도 영동에서는 해마다 그의 호를 딴 ‘난계음악제’를 열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