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학(算學)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목받다
오늘날의 우리들 대부분은 달력을 일정표 또는 시간표 정도로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농업 생산이 경제 활동의 핵심이었던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천체의 규칙적인 운행 주기와 질서를 측정하고 계산하여 만드는 달력은, 단순한 시간표나 일정표를 뛰어넘는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다. 더구나 왕조국가 시대의 달력은 왕조와 국가의 안위를 내다보기 위한 점성적(占星的) 성격을 지닌 것으로도 매우 중시되었다. 전통 사회에서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과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 사이에 일종의 상응 관계, 즉 천인상응(天人相應) 관계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천문은 곧 인문(人文)이기도 했다.
천문의 이러한 중요성과 필요성에 따라 왕조국가들 대부분이 천문학(기상학과 일종의 점성학을 포함한)을 중시하면서 보다 정확한 천문 관측과 계산을 위해 노력했다. 어떤 군주와 국가가 하늘의 질서를 보다 잘 파악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그 군주와 국가가 권력과 정치적 정당성을 보다 튼튼하게 확보한다는 것을 뜻했다. 농업 생산 증대, 왕조와 국가의 길흉 예측, 정치적 정당성 강화. 세종대왕이 기울인 천문기상학 발전에 대한 노력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세종대왕을 보필한 대표적인 인물로 이순지(李純之, 1406~1465)가 있다. 이순지는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조선 초 자주적 역법을 이룩하면서 우리 천문학을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은 천문학자’라는 평가와 함께, ‘명예로운 과학기술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되어 있다. 이순지의 자는 성보(誠甫), 시호는 정평(靖平)이며 관찰사, 호조참의, 중추원부사 등을 지낸 이맹상(李孟常)의 아들로 태어나 1427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외교 문서 관련 업무를 맡았다. 당시 세종대왕은 역법(曆法)이 정밀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문신(文臣)들 가운데 재능있는 사람들을 선발하여 역법에 필요한 산법(算法)을 익히게 했는데, 이순지가 가장 뛰어났다.
천문 관측, 산학, 측량 분야에서 세종대왕의 깊은 신뢰를 받다
이순지가 세종대왕의 눈에 들게 된 계기는 ‘본국(本國)은 북극(北極)에 나온 땅이 38도(度) 강(强)’이라는 계산 결과를 보고한 일이었다. 한반도의 가운데가 북위 38도라는 것을 계산한 것이다. 보고를 받은 세종대왕은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들여 온 역서(曆書)를 통해 이순지가 계산한 결과가 정확하다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하며 1431년부터 이순지에게 천문 관측과 역법에 관한 일을 맡겼고, 1434년에는 새로운 동철(銅鐵) 활자인 갑인자(甲寅字) 주조 사업에도 참여했다. 1443년 세종은 승정원에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산학(算學)은 비록 술수(術數)라 하겠지만 국가의 긴요한 사무이므로, 역대로 내려오면서 모두 폐하지 않았다.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도 비록 이에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알았을 것이다. 토지를 측량할 때 만일 이순지와 김담(金淡) 등이 아니었다면 어찌 쉽게 측량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 산학을 익히게 하려면 그 방책이 어디에 있는지 의논하여 아뢰라.”
이순지는 세종이 이러한 지시를 내리기 얼마 전에 하연, 정인지, 김담 등과 함께 경기 안산에서 토지를 측량하는 임무를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토지 측량은 농업 생산과 세금 징수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세종의 언급에서 이순지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농사에 중요한 제방을 쌓는 일에 관해서도 세종은 이순지를 신임했다. 1444년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제방을 축조하고자 하면 대간(臺諫) 가운데 불가하다고 말할 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선 이를 시험해보고자 하니 누가 이 일을 맡아서 할 만하겠는가? 정통하고 밝은 사람이 아니면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순지와 김담이 산술을 정통하게 연구했으니 그들에게 맡기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이에 대해 김종서는 정인지를 총 책임자로 하고 이순지와 김담을 종사관으로 삼아 추진하자는 의견을 냈다. 세종은 김종서의 의견대로 했다. 이순지는 1436년 종5품 봉상판관(奉常判官)으로 간의대(簡儀臺- 조선시대의 천문대)에서 천문 관측 임무를 맡고 있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상을 치르기 위해 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이순지를 대신할 사람을 천거하되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으면 나는 마땅히 그 사람을 기복(起復- 상을 당해 휴직 중인 관리를 복상 기간 중에도 직무를 보게 함)시킬 것이다. 나는 큰일에 관계되는 사람이 아니면 기복시키지 않으려 했는데, 지금 내가 간의(簡儀)에 뜻을 두는 것이 지극하니, 간의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승정원은 집현전 정자(正字) 김담(金淡, 1416~1464)을 이순지의 후임으로 천거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듬해 1437년에 이순지를 정4품 호군으로 승진시켜 기복시키고자 하면서, 특히 이순지의 아버지 이맹상에게도 ‘아들이 벼슬에 다시 나오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기복의 명을 받은 이순지는 그로부터 열흘 뒤 사직시켜줄 것을 바라는 뜻을 아뢰었지만 세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천문역법에 관해 세종이 이순지의 능력을 얼마나 깊이 신뢰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칠정산외편]으로 조선 천문학의 수준을 진일보시키다
세종 시대의 과학기술이라고 하면 이천과 장영실을 떠올리지만 천문역법 분야에서 이순지의 역할은 독보적이었다. 1465년(세조 11년) 이순지가 세상을 떠난 뒤 실록에는 ‘지금의 간의(簡儀), 규표(圭表), 태평(太平), 현주(懸珠), 앙부일구(仰釜日晷)와 보루각(報漏閣), 흠경각(欽敬閣)은 모두 이순지가 세종의 명을 받아 이룬 것’이라고 기록되었다. 이 기록에는 고인(故人)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다소의 과장도 있을 수 있지만, 이순지가 세종 시대 천문 기구와 설비 제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컴퓨터로 말하면 운영체제와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구소장 이천, 연구실장 이순지, 제작팀장 장영실을 떠올려 봄직하다.
이순지의 천문역법 연구가 크게 빛을 발한 성과는 ‘한문으로 펴낸 이슬람 천문 역법서 가운데 가장 훌륭한 책’으로도 평가받는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다. 칠정은 해와 달, 수성, 화성, 목성, 금성, 토성을 뜻한다. 1442년에 정인지, 정흠지, 정초 등이 편찬한 [칠정산내편 (七政算內篇)]은 1281년 원나라에서 만든 수시력(授時曆)을 한양의 위치에 맞게 수정, 보완한 것이다. 이에 비해 1444년 이순지와 김담이 편찬한 [칠정산외편]은 아랍 천문학의 성과에 바탕을 두고 있다.
‘외편’은 태양과 달의 운행, 일식과 월식 현상, 5개 행성의 운행, 달과 5개 행성이 가리는 현상 등을 다루고 있다. ‘내편’은 중국 천문역법과 산학 전통을 따르기 때문에 원주를 365.2575도, 1도를 100분, 1분을 100초 등으로 하고 있다. 이에 비해 ‘외편’은 희랍과 아랍 천문학 전통에 따라 각각 360도, 60분, 60초로 바꾸어 계산했다. 또한 평년의 한 해를 365일로 하고 128년에 31일의 윤일을 두었는데, 1태양년이 365일 5시간 48분 45초로, 수시력보다 더 정확할 뿐 아니라 오늘날의 수치와 비교했을 때 1초만 짧을 정도로 정확하다. 1년의 기점을 중국이 동지에 둔 것과 달리 춘분에 두었으며, 일식과 월식 계산에서도 ‘외편’이 ‘내편’보다 정확하다.
‘내편’을 통해 한양을 기준으로 한 정확한 천문 계산이 가능해졌으며 ‘외편’을 통해 발달된 아랍 천문학의 성과를 우리 실정에 맞게 수용함으로써 조선의 천문학은 아랍, 중국과 함께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수준에 도달했다. 우리의 하늘을 정확하게 관측하고 그 운행을 계산하며 예측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성공한 셈이다. 일본은 1643년 조선에서 보낸 통신사 박안기에게 수시력법을 배워 1682년에 가서야 일본에 맞는 정향력(貞享曆)을 만들 수 있었다.
다양한 천문역법서를 펴내고 풍수에도 밝았던 이순지
이순지는 이외에도 많은 천문역법서를 저술, 편찬했다. 그 가운데 1445년에 펴낸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은 다양한 서적에 흩어져 있는 천문에 관한 여러 가지 설을 모아 정리한 책이다. 단순히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중복되는 것을 삭제하고 핵심을 취하여 주제별로 분류함으로써 참고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은 책이다. 1459년에는 일식과 월식 계산법을 알기 쉽게 해설한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을 김석제와 함께 편찬했다. 계산 공식과 함께 실제 계산 사례가 실려 있으며, 계산법을 쉽게 외우는 데 도움이 되는 노랫말 형식의 설명도 실려 있어 나중에 음양과(陰陽科- 조선시대 관상감의 천문ㆍ지리 등의 일을 맡는 기술직을 뽑기 위해 시행했던 잡과 시험)의 시험 교재로도 널리 쓰였다. 또한 이순지가 편찬한 [천문유초(天文類抄)]는 다양한 천문 및 기상 현상을 다루면서 천문기상 현상과 국가의 치란(治亂) 및 재변(災變)의 상응 문제도 다루고 있다.
이순지는 풍수(風水)에도 밝아 왕실 능묘 자리를 살피는 일에 자주 참여했고 임금에게 풍수에 관한 의견을 올리기도 했다. 1464년(세조 10년) 이순지는 천천현(穿川峴) 고갯길 존폐 문제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천천현은 오늘날의 달래내 고개로, 조선 시대에도 중요한 교통로였다. 세종 때 풍수가 최양선은 태종을 모신 헌릉(獻陵, 서초구 내곡동 소재)의 주산에서 헌릉에 이르는 능선 지맥을 천천현 고갯길이 끊고 있는데다가, 사람들이 왕래하여 패어나가고 있으니 길을 닫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집현전이 이에 반대하면서 논쟁이 이어졌다.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지자 이순지의 주장을 들은 세조는 ‘이순지의 설만은 바로 내 생각과 합치한다’고 말하면서 이순지의 의견대로 고갯길을 닫지 않고 길에 잔돌을 깔아 패어나가는 것을 방지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나는 반드시 이순지와 의논하겠다.’
이순지는 1447년(세종 29년) 인사 청탁 사건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우부승지 김유양의 아들 김사창이 승진하는 데 김유양으로부터 청탁을 받았다는 혐의로 다른 혐의자들과 함께 사헌부의 조사를 받고 의금부에 갇혀 고문을 당한 것이다. 의금부는 관련자 모두를 처형할 것을 주장했지만, 세종은 파면으로 마무리 짓도록 했고 1449년에 관련자들에게 다시 직첩(職帖- 관리의 임명장)을 내렸다.
1462년(세조 8년)에는 김구석에게 시집갔다가 남편이 일찍 죽어 홀로 된 딸이 일으킨 스캔들로 곤경에 처했다. 어려서부터 여장을 하고 여성처럼 살아 온 노비 사방지(舍方知)와 딸이 10년 가까이 내연관계였다는 것이 드러나자 대신들은 이순지를 파직시킬 것을 청했다. 세조는 마지못해 이순지를 파직시켰다가 열흘 만에 복직시키고, 이순지에게 사방지를 처결하도록 했다. 이순지는 곤장 10여 대를 치고 사방지를 다른 집으로 보냈지만, 이순지의 딸은 얼마 후 사방지를 다시 불러들였다. 이순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인 1467년(세조 13년)에 다시 문제가 불거지자 세조는 사방지를 장형에 처한 뒤 지방의 관노로 보냈다.
이러한 몇 번의 곤경이 있기는 했지만 이순지는 세종, 문종, 단종, 세조대를 거치면서 승지, 예조참의, 호조참판, 한성부윤, 중추원부사, 개성부유수, 서운관제조, 판중추원사 등을 역임하며 대체로 평탄한 관직 생활을 했다. 이순지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463년 세조는 이순지가 지리서를 바치자 이순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이렇게 말했다. “이와 같은 일은 이순지처럼 정교하게 할 사람이 없다. 나는 음양(陰陽)과 지리(地理) 등의 일은 반드시 이 사람과 의논하겠다.”
1470년 1월 성종은 이렇게 지시했다.
“세종 조에는 이순지와 김담이 천문에 정통했는데, 지금은 그만한 사람이 없어 천문의 변화가 있으면 민간에서 간혹 이를 먼저 알고 있는데도 관상감(觀象監)에서는 무지하여 알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옳지 못하다. 지금 이순지와 김담 같은 사람을 골라 천문을 익히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 문제를 의논하라.”
[세조실록]은 이순지를 이렇게 평한다.
“이순지의 성품은 정교하며 산학, 천문, 음양, 풍수에 매우 밝았다. 그러나 크게 건명(建明)한 것은 없었다. 정평(靖平)이라 시호(諡號)하니, 몸을 공손히 하고 말이 드문 것을 정(靖)이라 하고, 모든 일에 임할 때 절제가 있는 것을 평(平)이라 한다.”
과묵한 편이면서 늘 겸손하고 공손한 자세를 취하며 모든 일에서 절제가 있던 사람으로 평가한 셈이다. ‘건명(建明)’이란 ‘정사(政事)를 밝게 일으켜 세운다’는 뜻이니, 이순지가 ‘크게 건명한 것은 없었다’는 말은 일종의 정무와 행정에서 업적을 쌓지는 않았다는 뜻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그가 어디까지나 자기 분야에 투철하여 전문성을 발휘했다는 뜻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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