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南怡, 1441~1468)는 한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그 비극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젊디젊은 나이에 탁월한 경력을 이뤘지만 모반의 혐의로 처형되었다는 사실의 대비(對比)일 것이다. 그는 16세(1457년, 세조 3)에 무과에 급제했고, 26세에 적개(敵愾) 1등 공신에 책봉되었으며(1467, 세조 13) 이듬해에 병조판서가 되었지만, 몇 달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화려한 전공과 급속한 출세
남이는 본관이 의령(宜寧)으로 할아버지는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 ?~1454)이고 할머니는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貞善公主)다. 아버지는 군수 남빈(南份)이다.또 하나의 중요한 가문적 배경은 그가 권람(權擥, 1416~1465)의 사위였다는 사실이다. 권람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 학자인 권근(權近, 1352~1409)의 손자이자 권제(權踶, 1387~1445)의 아들로서 좌의정까지 오르고 정난(靖難) 및 좌익(佐翼) 1등 공신에 책봉된 당시 가장 핵심적인 대신의 한 사람이었다.
태종의 외증손이자 당대 최고 대신의 사위라는 화려한 사회적 배경에 힘입은 측면도 적지 않았겠지만, 남이는 그것을 넘어서는 출중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문신보다 훨씬 낮은 대우를 받는 무신의 길을 선택한 까닭은 분명치 않다. 뒤에서 말하겠지만 몇 개의 일화에 보이는 그의 성향은 무인의 기질이 농후한데, 그것이 결정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여겨진다. 비극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그 뒤의 화려한 전공과 출세가 보여주듯이 그것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었던 현명한 선택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남이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무과에 급제했다. 조선 전기 문과에 급제하는 평균 나이가 30세 전후였고, 무과도 그보다 약간 어리거나 거의 비슷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이것은 놀라운 성취였다.
남이가 무장으로 출세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계기는 1467년(세조 13)에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이었다. 그때 남이는 혈기 넘치는 26세의 청년이었다. 세조는 치세 내내 중앙집권의 강화를 주요 시책으로 추진했는데, 그 중 하나가 북방의 통제였다. 그 결과 북방 출신 수령을 줄이고 중앙에서 직접 관원을 파견했으며, 호패법을 강화해 변방 백성의 이주를 통제하는 정책 등이 시행되었다.
이시애는 함길도 길주(吉州) 출신의 토반(土班-해당 지역의 토착양반)으로 회령부사(會寧府使)를 역임한 인물이었다. 그는 세조의 이런 북방 압박 정책에 강한 불만을 품었고, 결국 1467년 5월 함길도절도사 강효문(康孝文)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초기 국면은 반란군이 우세했다. 이시애는 단천(端川)ㆍ북청(北靑) 등을 거쳐 함흥(咸興)을 점령해 관찰사 신면(申沔)을 처형하고 체찰사 윤자운(尹子雲)까지 사로잡았다. 조정에서도 즉각 대응했다. 세조의 총애를 받던 젊은 종친인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 1441~1479)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조석문(曺錫文)ㆍ허종(許琮)ㆍ강순(康純)ㆍ어유소(魚有沼) 등 문무의 주요 관원을 장수로 임명해 3만 명의 진압군을 출동시켰다. 남이도 이때 주요 지휘관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이시애 군은 철원(鐵原)까지 내려왔지만, 관군에 밀려 다시 북상했다. 반란을 진압한 결정적인 계기는 7월 말의 북청 전투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관군은 전황을 장악했고, 이시애는 길주로 달아났다가 8월 12일 영동역(嶺東驛)에서 관군에 체포되어 참수됨으로써 반란은 넉 달만에 종결된 것이었다.
남이는 세조 후반의 가장 큰 위기였던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던 북청 전투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다. 그런 모습은 [세조실록]에 잘 기록되어 있다.
북청 전투에서 남이는 진(陣) 앞에 출몰하면서 사력(死力)을 다해 싸워 가는 곳마다 적이 쓰러졌다. 그는 몸에 4~5개의 화살을 맞았으나 낯빛이 태연했다(세조 13년 7월 14일).
이시애 난에서 세운 전공으로 남이는 행호군(行護軍, 정4품)에 임명되고 적개 1등공신과 의산군(宜山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북방에서 그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이번의 대상은 건주위(建州衛) 여진이었다. 남이는 평안도선위사(平安道宣慰使) 윤필상(尹弼商)이 지휘한 토벌군에서 우상대장(右廂大將)으로 주장(主將) 강순, 좌상대장 어유소와 함께 참전해 만포(滿浦)부터 파저강(波猪江)을 공격하면서 적의 우두머리인 이만주(李滿住)를 죽이는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이런 업적에 따라 그는 급속히 승진했다. 이시애의 난이 종결된 직후 공조판서(세조 13년 12월 17일)에 임명되었고, 반년 뒤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직했으며(세조 14년 7월 17일), 한 달 뒤에는 병조판서에 발탁되었다(세조 14년 8월 23일). 27세에 국방을 총괄하는 장관에 오른 기록은 한국사 전체에서 아마도 그가 유일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례적인 행운은 대체로 유동적이거나 불안한 상황에서 발생하며, 불행한 결과로 끝맺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남이는 그런 전형적인 사례였다.
무인적 기질과 정치적 야망
화려한 가문적 배경을 가졌지만 무과를 선택했고 그 뒤 탁월한 전공을 세웠다는 사실이 가장 객관적인 증거겠지만, 남이는 무장의 기질이 농후한 인물이었다고 판단된다. 우선 그는 용력(勇力)이 남달랐다. 중국 사신 강옥(姜玉)은 남이의 활과 활 쏘는 모습을 본 뒤 세조에게 “이런 좋은 장수는 세상에서 얻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이 곁에서 모시고 있으니 전하는 무엇이 두렵겠습니까”고 감탄했다(세조 14년 5월 18일).
일정 정도의 자만심도 있었던 것 같다. 격려나 충고의 의미가 더 크다고 판단되지만, 건주위 정벌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세조는 남이에게 “이미 공신에 책봉되었고 큰 전공을 세웠으니 자만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고 말했다(세조 13년 10월 17일). 역모로 처형된 뒤에 집필된 기록이라는 측면을 감안해야겠지만 “일찍이 남이는 대장이라고 자칭하면서 무사를 멸시했다”고 비판한 사평(史評)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세조 14년 5월 1일).
남이는 술도 잘 마셨고, 성격도 직설적이었다고 판단된다. 세조가 친림(親臨- 임금이 직접 참석함)한 주연(酒宴)에서 만취해 “요즘 주상께서 구성군 이준을 지나치게 총애하는 것은 그르다”고 항의한 것은 그런 측면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세조 14년 5월 1일).
그 5개월 뒤 남이는 처형되지만, 그런 비극적 사건의 단초는 이런 발언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세조 말년의 정국은 한명회(韓明澮)ㆍ신숙주(申叔舟) 등으로 대표되는 이전의 훈구대신들과 구성군 이준ㆍ남이 등을 중심으로 한 신진세력이 서로 대립하거나 긴장하고 있었다. 호방한 무인적 기질과 강한 정치적 야망을 갖고 있던 남이는 일단 훈구대신들에게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 뒤 모반 음모로 체포되어 국문을 받으면서 남이는 자신이 병조판서에 제수되었을 때 김국광ㆍ노사신ㆍ한계희 등 주요 훈구대신들이 주상에게 아뢰어 교체시켰다면서 그들은 재물을 탐내 본래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진술했다(예종 즉위년 10월 25일).
아울러 그는 비슷한 세력으로 분류되던 구성군도 견제했다. 구성군은 세조의 동생인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아들로 남이와 동갑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조의 커다란 신임과 총애를 받아 앞서 보았듯이 이시애의 난에서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영의정까지 올랐다. 종친의 정치 참여를 금지한 국법을 어기면서, 그것도 27세의 청년을 조정의 최고 관직에 제수한 이 조처는 대단히 이례적인 사건이 분명했다. 같은 나이의 남이를 병조판서에 임명한 지시와 함께 이것은 세조 말년의 정치적 상황이 그만큼 불안하거나 유동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된다.
앞서도 잠깐 보았지만, 남이는 이런 구성군을 불편하게 생각했다. 아마도 자신의 잠재적 정적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뒤 귀경해 세조에게 “북방이 이미 평정되었는데도 도총사 이준이 군사를 해산하지 않으니 민심이 모두 두려워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은 그런 마음의 일단을 보여준다(세조 13년 8월 24일).
이처럼 남이는 화려한 가문적 배경과 출중한 능력을 바탕으로 급속히 승진했다. 그는 호방한 무인적 기질이 넘쳤고, 강한 정치적 야망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신임한 세조가 붕어해 예종이 즉위하고 훈구대신들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면서 남이는 결국 비극적 운명을 맞게 되었다.
실각과 모반의 음모, 그리고 처형
남이의 묘소.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소재.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조가 승하하기 13일 전에 전격적으로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던 남이는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실각되었다. 예종은 즉위 당일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발령했다(예종 즉위년 9월 7일). 말할 필요도 없이 직책의 무게상 이것은 분명한 좌천이었다. 형조판서 강희맹(姜希孟)과 중추부 지사 한계희(韓繼禧) 등의 의견을 따른 결과였다.
남이의 역모는 그로부터 한달 뒤 발각되었다. 10월 24일 병조참지 유자광(柳子光)은 남이가 궁궐에서 숙직하고 있다가 혜성이 나타나자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라고 말했다고 고변했다. 남이는 즉시 체포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모반의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지만 혹독한 국문을 받으면서 결국 시인했고, 사흘 뒤 강순ㆍ조경치ㆍ변영수ㆍ변자의ㆍ문효량ㆍ고복로ㆍ오치권ㆍ박자하 등과 함께 저자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10월 27일). 남이는 강순 등과 함께 1818년(순조 18년)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주청으로 관작이 복구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실록의 기사를 면밀히 살펴볼 때 남이가 일정한 정치적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과연 국왕을 겨냥한 역모로까지 발전했는지는 분명치 않다고 판단된다. 그런 측면 때문에 조선 후기의 여러 야사는 남이가 유자광의 음모로 죽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런 억울한 사연 때문에 무속에서는 그를 신령으로 모시고 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다하리.
남자 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안케 하지 못하면,
뒤에 누가 나를 대장부라 부르리오.
그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지었다는 유명한 한시는 정치적 야망과 모반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것 같다. 이순신이 그랬듯, 그의 비극적인 운명을 보면서 탁월한 무장에게 모반의 혐의는 어쩌면 숙명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물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초기 음악을 정리한 음악이론가이자 문화예술 행정관료 - 박연 (0) | 2017.01.10 |
---|---|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와 백제 불교의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승려 - 겸익 (0) | 2017.01.05 |
조선 천문학의 수준을 진일보시킨 천문역법학자 - 이순지 (0) | 2017.01.03 |
왕비와 동시에 대비가 된 여성 - 인수대비 (0) | 2017.01.02 |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작가이자 생육신의 한사람 - 김시습 (0) | 2016.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