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9대 국왕인 성종(成宗, 1457~1494, 재위 1470~1494)은 그 묘호(廟號)가 상징하듯이 여러 업적을 이룸으로써 왕조를 안정적 기반 위에 올려놓은 임금이었다. 그는 왕위 계승의 정상적인 서열에 있지 않은 상태에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갑작스럽게 즉위했지만, 25년 동안 재위하면서 성실하고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그의 통치에는 한계나 흠결이라고 지적할 수 있는 부분도 물론 있었지만, 조선 개국 이후 추진되어 온 여러 제도의 정비를 일단 완결함으로써 왕조가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갑작스러운 즉위와 수렴청정
성종은 세조 3년(1457) 7월 30일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懿敬世子, 뒤에 덕종으로 추존)와 소혜왕후(昭惠王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휘(諱)는 이혈(李娎)이다. 형은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라는 시조로 널리 알려진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이다.
대부분의 왕조가 그렇듯이, 조선 또한 개국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치열한 정치적 갈등을 겪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태종과 세조의 집권 과정이었다. 냉혹한 정치적 승부를 거쳐 등극한 세조는 14년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치세를 마치고 승하했다. 맏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는 이미 10여 년 전에 요절한 상태였기 때문에(1457년 19세로 사망) 둘째 아들인 예종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 역시도 14개월 만에 붕어하고 말았다.
이런 돌발적 상황은 왕위 계승에 관련된 분쟁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짙게 드리우는 것이었다. 예종의 맏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은 너무 어려(당시 3세) 왕위를 잇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반면 한명회(韓明澮)ㆍ신숙주(申叔舟) 등을 중심으로 한 역대의 훈구대신(勳舊大臣)들은 풍부한 경륜과 긴밀한 인맥을 바탕으로 광범하게 포진해 있었다.
그러나 앞서 문종이 붕어하고 단종이 즉위했을 때, 비슷한 상황이 빚어낸 정치적 균열을 민첩하고 과감하게 포착해 집권했던 인물들은 그때의 경험을 효과적으로 사용해 위기를 잠재웠다. 왕실의 가장 어른으로 상당한 식견과 정치적 능력을 갖고 있던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는 지체 없이 성종을 후계자로 선정했다. 제안대군은 아직 강보에 싸여 있고 월산대군은 질병이 많지만, 자산군(者山君- 성종)은 그동안 세조가 늘 그의 기상과 도량을 칭찬해 태조에 견주기까지 했다는 이유였다.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具致寬), 최항(崔恒) 등 주요 대신들은 그 의견에 즉각 찬성했다. 이런 일치된 합의에 따라 그동안 왕위 계승과는 거의 무관한 위치에 있던 성종은 예종이 붕어한 그날 전격적으로 조선의 최고 권력자에 오르는 행운을 거머쥐었다(1469년 11월 28일).
지극히 중대한 사안인 후사의 결정이 이처럼 신속하게 합의되었다는 사실과 “알리기도 전에 자산군은 이미 부름을 받고 입궐해 있었다”는 기록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 결정은 사전에 상당 부분 합의된 것이었다. 그럴 수 있었던 핵심적인 요인은 세조대 이래 최고의 훈구대신인 한명회가 성종의 장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설명한 정치적 위기를 진정시키는데 대신들의 협력이 필수적임을 감안하면, 한명회의 사위를 후사로 결정한 것은 왕실로서나 대신들에게나 가장 합리적이며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커다란 행운이 현실화 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성종도, 고난이나 억압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복잡한 정치 상황 때문에 일정한 불편과 제약을 감수해야 했다. 그것은 정희왕후의 수렴청정1)(垂簾聽政)과 대신들이 중심이 된 원상제2)(院相制)였다. 두 이례적 제도는 현실적으로 불가피했고, 전체적으로는 성종의 치세가 안정되는데 기여한 우호적인 제약이었다. 그러나 국왕에게는 결국 불편한 규제가 분명했고, 왕권의 영향력을 정상화시키거나 증폭시키려면 특별한 조처가 필요했다. 성년이 된 재위 7년(1476) 원상제와 수렴청정이 끝나고 친정(親政)을 시작한 성종은 그런 시도를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왕권의 강화와 대간의 성장
친정을 시작한 무렵의 정치적 지형에서 가장 두드러진 존재는 원상으로 대표되는 세조대 이래의 대신들이었다. 그러므로 성종이 왕권을 강화시키려면 그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조처가 우선적으로 필요했다. 국왕은 자신을 탄핵한 대간에게 반발하는 양성지(梁誠之), 정인지 (鄭麟趾), 김국광(金國光) 등 주요 대신들을 견책(譴責: 허물이나 잘못을 꾸짖고 나무람)했다. 가장 주목할만한 사례는 재위 12년 4월 의전(儀典)과 관련된 불경죄로 한명회를 하옥시키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가 즉시 대죄(待罪)하자 곧 하명을 철회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강화된 왕권의 위상을 또렷이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좀더 중요한 방안은 대간3)을 육성해 대신에 대한 탄핵을 활발히 전개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성종대, 나아가서는 조선 전기에 이룩된 가장 중요한 업적의 하나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완성이었다(성종 16년, 1485년). ‘나라를 다스리는 큰 법전’이라는 제목이 표방하듯이, 그 법전은 국왕을 정점으로 한 조선의 지배세력이 이제 국가 전반을 체계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제도를 완비했다는 당당한 선언이었다. 왕조 개창부터 [경국대전]의 완성까지 1세기에 가까운 기간이 걸렸다는 사실은, 제도의 정비가 얼마나 지난한 역정이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경국대전]의 첫머리인 “이전(吏典)”은 주요 관서들의 기능과 그 밖의 사항을 규정한 조문(條文)으로 시작된다. 그 내용은 간략하고 때로는 다소 모호하지만, 각 관서의 고유한 임무와 권한을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로써 주요 관서들의 본원적 기능은 국법에 보장된 불가침의 영역으로 편입된 것이었다.
경국대전은 조선왕조의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법전이다. 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으로 분류되어 국가운영에 관련된 주요 사항과 규정을 망라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런 중요한 변화에서 가장 주목되는 관서는 대간(臺諫)이었다. 국법에 규정된 그들의 임무는 국정 전반에 걸친 강력하고 포괄적인 탄핵과 간쟁이었다. 재위 10년(1479) 이후 성종은 대간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그런 왕권의 작용에 힘입어 대간은 그 위상을 크게 높였다. 대간의 발언 중 많은 부분은 대신을 겨냥한 탄핵이었기 때문에 대신들의 입지는 자연히 위축되었다. 즉 성종은 왕권의 확립과 대간의 육성을 통해 대신에게 기울어져 있던 권력의 무게 중심을 효과적으로 이동시킨 것이었다.
이로써 성종 중반 조선의 중앙 정치는 국왕이 상위에 군림하면서 대신과 대간이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안정적인 체제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정치적 정립구도(鼎立構圖)’라고 부를 만한 체제였다. 이런 수준 높은 유교정치의 한 형태가 나타난 것은 성종대의 중요한 변화이자 발전이었다.
갈등의 촉발과 균열의 단초
그러나 그 체제에는 균열도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탄핵과 간쟁이라는 본원적 임무상 대간은 국왕및 대신과 갈등하거나 긴장하는 관계였다. 다시 말해서 국왕이나 대신에게 그들은 본원적으로 불편한 존재였던 것이다. 삼사의 비판이 정당하고 이성적일 때 그것은 국정의 발전에 이바지했지만, 이론에만 집착하거나 지엽적인 비판에 몰두할 경우 정치적 갈등은 증폭되었다.
성종 후반, 대신을 지목한 삼사의 탄핵은 점차 격렬해졌다. 거기에는 대신이 제조(提調- 명예직에 가까운 최고 책임자)에 오래 재직하면서 구사(丘史- 몸종이나 시종)를 지나치게 많이 소유하는 기존의 폐단을 지적해 개선한 것과 같은 정책적 사안도 있었지만,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표현으로 상대를 비난하는 문제점이 좀더 자주 드러나고 있었다.
성종 24년(1493) 10월 대사헌 허침(許琛) 등이 재이(災異- 재앙이 되는 괴이한 일)의 책임을 대신에게 돌리면서 영의정 윤필상(尹弼商)과 좌찬성 이철견(李鐵堅)을 비롯한 육조ㆍ한성부ㆍ승정원ㆍ관찰사ㆍ절도사 등 중앙과 지방을 망라한 여러 주요 관원을 “간사한 아첨과 교묘한 말솜씨, 무식ㆍ부박ㆍ상스러움ㆍ용렬ㆍ경박ㆍ교만” 같은 표현으로 탄핵한 것은 그 대표적 사례였다. 이런 수사(修辭)는 해당 인물의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지적하기보다는 그 인격을 감정적으로 폄하하는 주관적인 판단에 가까운 것이었다.허침의 친형인 우의정 허종(許琮)과 좌의정 노사신(盧思愼) 등 대신들도 삼사의 탄핵이 지나치고 감정적이라면서 강력히 비판했다.
좀더 주목되는 측면은 그동안 삼사의 언론을 용인하고 후원해왔던 성종도 점차 대신과 비슷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국왕은 이전에는 묵인했던 대간의 풍문탄핵4)을 엄중히 처벌했고, 그들이 국가의 대사는 생각하지 않고 사소한 일만 트집잡는데 열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가장 큰 불만은 삼사가 국왕의 핵심적인 권력인 인사권을 제약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성종은 “인사권이 대간에 귀속돼 임금이 손발을 놀리지 못하게 되었다”면서 “간언을 거부하는 것을 자처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천명하기에 이르렀다(성종 23년 8월 18일).
성종은 치세 중반 형성된 견제와 균형의 정치를 회복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붕어 직전의 “지금은 대신과 대간이라는 호랑이 두 마리가 싸우는 것 같으니 참으로 불미스럽다(성종 25년 5월 5일)”는 비관적인 자평(自評- 자기가 한 일을 스스로 평가함)에서도 감지할 수 있듯이, 그런 노력은 만족스럽게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국왕ㆍ대신과 대간 사이에 형성된 이런 갈등의 단초는 그 뒤 연산군대의 연속적인 사화로 폭발하게 되었다.
성종대의 역사적 의미
그 이전의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조선도 동아시아를 지배한 중국 문명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다양한 측면에서 독특하고 발전적인 면모를 구축한 것도 사실이었다. 정치제도적 측면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사항은 삼사제도5)의 확립이었다. 중국의 모든 왕조에서 삼사는 그 위상이 미미했다. 그 공백을 차지한 제도(또는 개인)은 내시였다.
그러나 조선(을 포함한 전근대 한국의 왕조들)은 반대였다. 내시의 위상은 미약했고, 삼사의 영향력은 강대했다. 이것은 황제권과 왕권의 강약을 필두로 두 나라(또는 지역) 사이의 여러 특징을 구성했다. 그것에 관련된 설명과 가치판단은 이 글의 범위를 넘는 주제다. 그러나 국정 전반에 걸친 포괄적이고 강력한 비판과 감찰을 수행하는 삼사가 제도적으로 확립된 체제가 유교정치의 본질에 좀더 다가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중요한 변화가 구동된 시기가 바로 성종대였다.
그러나 제도가 현실화되는데는 여러 마찰과 조정이 뒤따른다. 또한 중요한 제도일수록 그런 과정은 길고 험난하다. 삼사와 관련되어 나타난 현상은 사화였다. [경국대전]의 완성으로 상징되는 중요한 제도적 정비를 이룬 성종의 치세 직후, 연산군대를 거쳐 중종대까지 일련의 사화가 연속적으로 발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 사건들을 관통하는 핵심적 주제는 삼사였다. 조선 정치제도의 중요한 특징인 삼사는 그런 복잡한 갈등을 지불하고 획득한 가치 있는 결과였다.
유교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국왕답게 성종은 유학의 진흥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재위 6년(1475)에는 성균관에 존경각(尊經閣)을 지어 여러 경전을 소장케 했고, 양현고(養賢庫)의 재정을 확충해 학문 연구를 후원했다. 재위 15년(1484)과 20년에는 성균관과 전국의 향교에 학전(學田)과 서적을 분배해 관학(官學)을 진흥시키기도 했다. 독서당(讀書堂)을 설립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세종 8년(1426)에 시행된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확대한 그 조처는 매년 뛰어난 신진학자 5~6명을 선발해 독서에 전념하도록 배려한 것으로, 이후 계속 확대되었다. 중요한 서적이 많이 출판된 것도 주목할만한 업적이다. 재위 전반에 걸쳐 [국조오례의](1474)ㆍ[삼국사절요](1476)ㆍ[동문선](1478)ㆍ[동국여지승람](1481)ㆍ[동국통감](1485)ㆍ[악학궤범](1493) 등 다양한 주제의 무게 있는 저작들이 계속 나왔다.
개인적 사항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선릉(宣陵)은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능이다. 능 오른편 언덕에는 계비 정현왕후의 능이 조성되어 있다. 사적 제199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성종의 개인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졌으면서도 흥미를 끄는 부분은 폐비 윤씨와 연산군에 관련된 사실일 것이다. 성종은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한명회의 딸), 폐비 윤씨(윤기견(尹起畎)의 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윤호(尹壕)의 딸) 등 세 왕비와 숙의 하씨 등 10명의 후궁을 두었고, 대군 2명(연산군과 중종), 공주 2명, 왕자군(王子君) 14명, 옹주(翁主) 11명 등 모두 29명의 많은 자녀를 얻었다.
성종의 비빈과 자녀는 그 앞뒤의 국왕들과 비교했을 때 분명히 많은 숫자지만, 그 통치의 성패를 판단하는데 의미 있는 변수는 아니라고 판단된다. 호색 같은 개인적 성향을 판단하는 데는 일정한 근거가 될 수 있겠지만, 국왕은 비빈 같은 공식적인 대상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는데 현실적 제약을 거의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적인 관점에서 이런 사항을 통치력이나 도덕성과 연관시키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정비인 윤씨는 성종 4년(1473) 3월 숙의 (淑儀)로 책봉되었다가 이듬해 5월 공혜왕후가 사망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성종 7년(1476) 8월). 그리고 석달 뒤 연산군이 태어남으로써 윤씨의 행복과 영광은 절정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나 1년 뒤 그녀는 비상(砒霜- 독약의 일종)을 숨겨놓은 것이 발각되어 빈(嬪)으로 강등되었고, 성종 10년(1479) 6월 서인으로 폐출되었다가 3년 뒤에 결국 사사6)(賜死)되었다(성종 13년 8월). 연산군은 즉위 직후 어머니의 비극을 알게 되었다(연산군 1년 3월 16일).
성종은 재위 내내 신하들을 폭력적으로 제압하지 않았다. 전근대의 왕정에서 그런 행위는 정당하고 일반적인 통치의 일부였음을 감안하면, 이것은 그의 내면과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측면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부인에게 가장 엄중한 처벌을 집행했고, 적장자는 유례 없는 학정(虐政- 포학하고 가혹한 정치)을 자행한 폭군이 되었다. 물론 이런 사실의 기저에는 복잡한 요인이 개재해 있지만, 그 표면적 결과는 인간의 근본적 한계와 인생의 복잡한 역설을 절감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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