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국의 포로가 된 조선의 선비 강항과 [간양록]
‘이국 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고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피눈물로 한 줄 한 줄 간양록을 적으니 임 그린 뜻 바다 되어 하늘에 닿을세라.’
이 노래는 신봉승 작사, 조용필 작곡, 조용필이 부른 MBC 문화방송의 1980년 방영 드라마 ‘간양록’의 주제가 ‘간양록’으로, 조용필 2집 앨범에 실려 있다.
사극을 많이 쓴 극작가로서 역사에도 조예가 깊은 신봉승 씨는 이 가사를 강항(姜沆, 1567~1618)이 일본에 억류되어 있을 때 겪으며 보고 들은 일을 귀국하여 기록한 [간양록](看羊錄)에 실린 시를 바탕으로 썼다. 강항은 전라 좌병영 우후(虞候)로 싸우다가 사로잡혀 일본으로 끌려 온 이엽(李曄)이 탈출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이엽이 쓴 시를 강항이 전해 듣고 [간양록]에 기록한 것을 참조했던 것. 다음은 그 일부다. ‘어버이는 밤 지팡이 잃고 새벽달에 울부짖으며…지켜 오던 조상 묘지에는 풀 반드시 거칠었으리.’
[간양록]에서 ‘간양’(看羊)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양을 돌본다’는 뜻이다. 또한 중국 한나라 무제 때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흉노왕의 회유를 거부하고 양을 치는 노역을 하다가 19년 만에 돌아온 소무(蘇武)의 충절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강항 자신이 붙인 본래 제목은 [건차록](巾車錄)이었다. ‘건차(巾車)’는 죄인을 태우는 수레이니 적군에 사로잡혀 끌려가 생명을 부지한 자신을 죄인으로 자처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강항이 세상을 떠난 뒤인 1654년에 그의 제자들이 책을 펴내면서 스승을 소무에 견주어 제목을 [간양록]으로 바꿨다. 강항이 [간양록]에 수록한 시 중에도 자신을 소무의 처지에 빗대는 대목이 몇 곳 나온다.
정유재란 때 일본의 포로가 되었던 강항의 기록을 모은 간양록.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간양록]은 ‘내가 겪은 정유재란’(涉亂事述), ‘적국에서 올린 상소’(賊中封疏), ‘내가 듣고 본 적국 일본’(賊中聞見錄), ‘귀국하여 임금께 올린 글’(詣承政院啓辭), 제자 윤순거가 쓴 발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적국 일본의 다양한 사정과 현실을 기록하고 장차 국방을 비롯한 조선의 국가 정책에 관한 견해도 펼치고 있다. 예컨대 ‘전하께서는 장수 하나를 내실 때에도 신중히 생각하셔서 문관이든 무관이든 국한하지 마시고, 품계와 격식으로 예를 삼지도 마시고, 고루한 신의와 사소한 덕행도 묻지 마시고, 이름난 가문을 택하지도 마소서’라고 인재 기용에 대한 절절한 안타까움과 소망을 토로한다. 통상을 중시하여 대외 교역이 활발한 일본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전하기도 한다.
‘왜인들의 성질이 신기한 것을 좋아하고 다른 나라와 통교하는 것을 좋아하여 멀리 떨어진 외국과 통상하는 것을 훌륭한 일로 여깁니다. 외국 상선이 와도 반드시 사신 행차라고 합니다. 교토에서는 남만 사신이 왔다고 왁자하게 전하는 소리를 거의 날마다 들을 수 있으니, 나라 안이 떠들썩한 이야깃거리로 삼습니다. … 먼 데서 온 외국인을 왜졸이 해치기라도 하면 그들과의 통교가 끊어질까 염려하여 반드시 가해자의 삼족을 멸한다 합니다. 천축 같은 나라도 매우 멀지만 왜들의 내왕이 끊임이 없습니다.’– ‘귀국하여 임금께 올린 글’ 중에서. [간양록])
전란의 비극 속에 닥친 억류생활
강항은 강희맹의 5대손으로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이며 1588년에 진사가 되고 1593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승정원 소속 정7품 주서의 임시관직인 가주서(假注書)로 임명되었다. 이후 1595년 교서관 박사, 그 다음해에 정6품 공조좌랑이 되고 이어서 형조좌랑이 되었다. 1597년 휴가를 얻어 고향 전라도 영광에 내려와 있던 강항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의 군량 조달 임무를 맡은 참판 이광정 밑에 배속되어 남원 일대에서 군량 운반을 관리했다. 그러나 남원성을 포위한 왜군 병력은 5만이 넘었고 남원성을 지키는 조선군은 1천여 명, 명나라 원군이 3천여 명이었다. 남원성이 사흘 만에 함락되면서 명나라 부총병 양원(楊元)은 도망치고 조선군과 명나라 원군은 전멸했다. 왜군은 성 안의 백성들을 무참하게 살육했다.
강항은 영광으로 돌아와 김상준과 함께 격문을 띄워 의병 수백 명을 모았지만 왜군의 기세 앞에 의병은 곧 흩어졌고 영광도 왜군에 유린당했다. 강항은 집안 식솔들을 배에 태워 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의 진영으로 향했지만 떠난 지 9일 만인 9월 23일에 왜군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강항은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많은 식솔들이 왜군의 칼에 죽임 당했다. 강항은 쓰시마 섬과 이키(壹岐) 섬 등을 거쳐 시코쿠(四國) 지방 이요(伊豫)의 오즈(大洲)성으로 끌려갔다. (오늘날 에히메현 오즈시) 강항을 사로잡은 장수가 오즈 성주 사도(佐渡)의 부하 노부시치로(信七郞)였던 것. 당시 일본 수군을 이끈 장군이자 사도의 상관은 남원성 전투에도 참가하고 명량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패한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였다.
강항 일행이 바다를 건너는 도중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강항의 여덟 살 난 어린 조카가 구토와 설사를 하며 병이 나자 왜군들이 바다에 던져 버리기도 했다. 바다에 던져진 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오래오래 끊이지 않았다. 강항은 오즈성에서 한양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슈세키지(出石寺)의 승려 요시히도(好仁)와 친교를 맺기도 하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히기도 했다. 1598년 6월 강항은 오사카를 거쳐 교토의 후시미(伏見)성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곳에서 약 1년 8개월을 지내고 풀려나 1600년 4월 강항은 남은 식솔들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일본 성리학의 출발에 큰 영향을 미친 강항
‘나는 교토에 온 뒤로 왜국 실정을 알기 위해 왜승들과 교제했다. 그 중에는 글도 알고 이치도 아는 자들이 없지 않았다. 의원 노릇도 하는 이안(意安), 리안(理安)도 가끔 나를 찾아왔다. 또 묘수원의 순수좌가 있었다. 그는 후지와라노 데이카(藤原定家)의 자손으로 다지마(但馬) 성주 아카마쓰 히로미치(赤松廣通)의 스승이다. 사뭇 총명하여 옛글도 잘 알아 통달하지 않은 글이 없었다. 성격이 강직하여 왜인들 사이에 잘 끼지 않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의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을 듣고 교토에 집을 짓고 해마다 쌀 2천 석을 주고자 했다. 그러나 순수좌는 집도 쌀도 받지 않고 다만 기노시타 가쓰토시(木下勝俊- 오바마(小浜) 성주)나 아카마쓰 히로미치와 교유할 뿐이다.’
여기에서 이안은 요시다 소준(吉田宗恂), 리안은 그의 제자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인물은 교토 쇼코쿠지(相國寺) 묘수원(妙壽院)의 선승인 순수좌(蕣首座), 즉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이다. 그는 일본 에도 유학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인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최종 승리를 거둔 뒤 1600년 10월 그를 불러 [대학]을 강의하게 하자 승복이 아닌 유학자의 복장을 입고 나타났다. 불교 수좌의 지위를 버리고 온전한 유학자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유학은 대부분 승려들이 공부했으며, 유학의 위치도 불교의 보조적인 학문에 머무르고 있었다.
강항은 후지와라 세이카의 질문에 응하여 조선의 과거 제도와 춘추 석전(釋奠) 의례를 설명해주었다. 후지와라는 강항과 조선인 선비 포로들에게 은전을 주면서 경서(經書)를 써 달라 부탁했고, 조선의 의례복을 만들어 상례, 제례 의식도 익혔으며 공자묘도 세웠다. 강항과 조선 선비들이 쓴 경서는 주자(朱子)의 주석에 따라 훈점(訓点)을 표시한 [사서오경왜훈](四書五經倭訓) 편찬 작업의 일부였다. 다지마 성주 아카마쓰가 재정을 후원하고 후지와라 세이카가 편찬을 총괄하면서 강항이 큰 역할을 한 이 책이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성리학 텍스트였다. 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林羅山)은 스승의 추천으로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강(侍講)이 된 이후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에 이르기까지 막부의 시강으로 일했다. 하야시의 사숙(私塾)은 에도 유학의 거점 구실을 했다.
‘우리나라(일본)의 유학박사는 옛날부터 한나라, 당나라의 주소(註疏)를 읽고 경전에 점을 찍고 일본어식 훈(訓)을 달았을 뿐이다. 그러면서 정주(程朱)의 서적에 이르면 아직 십분의 일도 모르며 성리학을 아는 사람도 드물다. 이에 선생(후지와라 세이카)이 아카마쓰 씨에게 권유하고, 강항 등에게 사서오경을 정서하게 했다. 선생은 스스로 정주(程朱)의 뜻을 따랐는데, 이것이 훈점본이 되었으니 그 공이 매우 크다.’- ‘세이카 선생 행장’, [하야시 라잔전집]
‘안타까워라 중국에서 태어나지 못했음이여! 또 왜 조선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일본에서, 그것도 바로 이런 때 태어났을까요? 내가 신묘년(1591) 3월에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려했더니 병에 걸려 돌아와야 했고, 병이 좀 나으면 조선으로 가려했더니 연이어 전쟁이 벌어져 나 같은 사람을 받아줄까 싶어 감히 바다를 건너가지 못했습니다. 귀국(조선)을 구경하지 못하는 것도 아마 운명인가 봅니다.’- [간양록]에 기록된 후지와라 세이카가 강항에게 한 말
후지와라 세이카는 1590년 경 교토 다이도쿠지(大德寺)에서 조선통신사와 교류하면서 정주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강항과의 교유를 통해 비로소 성리학자이자 유학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했던 것이다. 강항은 일본에 억류당해 있던 시절 [곡례전경](曲禮全經), [소학], [근사록], [근사속록], [근사별록], [통서], [정몽] 등 16종의 경서 및 성리학 텍스트를 실은 [강항휘초](姜沆彙抄)를 남겼으며 이는 오늘날 일본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학문과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며 은거하다
강항이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다지마 성주 아카마쓰 히로미치와 후지와라 세이카 덕분이었다. 후지와라는 강항과 교유하면서 은전을 주어 생활비와 장차 돌아갈 때 쓸 비용을 마련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가 유학자가 되면서 스스로 지은 ‘세이카’(惺窩)라는 이름이자 호도 강항이 그를 위해 써준 ‘성재기’(惺齋記)와 ‘시상와기’(是尙窩記)에서 한 글자씩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카마쓰는 강항에게 증명서를 얻어주어 관문들을 무사히 지날 수 있게 해주었고, 후지와라는 사공 한 사람을 더 붙여주어 대마도까지 항로를 인도하게 했다. 일본 승려 게이안(慶安)도 오스 성주 사도(佐渡)에게 강항을 풀어줄 것을 적극 권했다.
1600년 5월 19일 식솔 10명과 다른 선비들, 뱃사공과 그 식솔 등 모두 38명과 함께 부산에 도착한 강항은 선조의 부름에 따라 한양으로 가서 편전 앞에서 술상을 받고, 임금이 내린 말을 타고 고향 영광으로 향했다. 선조는 강항에게 일본 현지 상황에 관해 물었고 강항은 자신이 파악한 것들을 정리하여 선조에게 올렸다.
고향에 도착한 강항은 은거하면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했다. 1602년에는 대구 교수(敎授- 지방 유생을 교육하고 향교를 지도하는 종6품 벼슬)로 임명됐지만 곧 사직했고, 1608년에는 순천 교수에 임명됐지만 역시 부임하지 않았으며 1618년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일본 에히메현 오즈시 중심가 시민회관 앞에는 1990년에 건립된 ‘홍유강항현창비’(鴻儒姜沆顯彰碑)가 서 있다. 강항의 고향인 영광군과 오즈시는 2001년부터 교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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