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유혜풍(유득공)은 박식하고 시를 잘 지으며 과거의 일도 상세히 알고 있으므로, 이미 [이십일도회고시주]를 지어 우리나라의 볼 만한 것들을 자세히 밝혀 놓았다. 더 나아가 [발해고]를 지어 발해의 인물, 군현, 왕의 계보, 연혁을 자세히 엮어 종합해 놓았으니,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고려가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한 것이다.”
- 1785년 박제가가 쓴 [발해고] 서문 중에서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은 조선 후기 북학파 계열의 실학자로, 정조가 발탁한 네 명의 규장각 초대 검서관(奎章閣初代檢書官) 중의 한 사람이다. 자는 혜풍(惠風)ㆍ혜보(惠甫), 호는 영재(冷齋)ㆍ영암(冷菴)ㆍ가상루(歌商樓)ㆍ고운당(古芸堂)ㆍ고운거사(古芸居士)ㆍ은휘당(恩暉堂) 등 다양하다. 1748년 음력 11월 5일 부친인 유춘과 모친인 남양 홍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유득공은 증조부 유삼익과 외조부 홍이석이 서자 출신이었던 탓에 신분상 서자로 살아야 했다.
유득공의 생애는 자세하지 않다. 일생을 기록해 놓은 행장이 아쉽게도 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단편적이나마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의 나이 다섯 살 때 부친이 사망했다고 한다. 그때 부친인 유춘의 나이가 불과 27세에 지나지 않았다. 서자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부친마저 여의었으므로 유득공은 신분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일곱 살 때 모친을 따라 외가인 경기도 남양 백곡으로 이주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형편이 어려워져서 일 것이다. 28살에 갑작스레 과부가 된 모친 홍씨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를 실천한 여성이었다. 친정이 무반 집안이라 글공부를 할 분위기가 아니자, 그녀는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공부를 위해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모친은 고관들이 많이 사는 서울 경행방(지금의 종로구 경운동)으로 이주한 후,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아들의 학업을 이어갔다.
유련의 아스트로라베.
유득공의 숙부인 유련(유금)이 만든 이슬람식 천문기구다. 수학과 천문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던 유련을 통해 유득공은 북학파 실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유득공의 학문적 성장에 영향을 준 인물은 숙부 유련(柳璉, 1741~1788, 훗날 柳琴으로 개명함)이었다. 유련은 부친인 유춘의 둘째 동생으로 ‘기하(幾何)’를 호로 사용할 정도로 수학과 천문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1776년(정조 즉위년) 서호수의 막관으로 중국을 여행한 북학파 출신의 실학자였다. 20세를 전후로 하여 유득공은 북학파 인사들과 교유하기 시작했는데, 숙부인 유련을 비롯하여 홍대용ㆍ박지원ㆍ이덕무ㆍ박제가ㆍ이서구ㆍ원중거ㆍ백동수ㆍ성대중ㆍ윤가기 등이 대표적인 교유 인사였다. 이들은 단순한 교유에서 그치지 않고 ‘백탑동인(白塔同人)’이라는 시동인회(詩同人會)를 결성하기도 했다.
유득공은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25세 때 기자(箕子)로부터 후백제에 이르는 시기의 우리나라 한시를 모은 [동시맹(東詩萌)]을 엮으면서 역사를 바탕으로 한 이른바 서사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773년에는 박지원, 이덕무와 함께 개성과 평양을 유람하고 이어서 백제의 도읍지인 공주를 다녀오면서 역사지리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훗날 유명한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이때의 기행이 토대가 된 것이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이십일도회고시]는 위만조선의 멸망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연구하며 도읍지의 변천에 주목, 그에 따른 사실들을 시문으로 지은 것이다.
서른 두 살에 규장각 초대 검서관이 되다
유득공은 1774년 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소과 시험에 합격하여 생원은 되었지만, 대과 시험인 문과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이 시기 유득공은 암울하고 답답한 자신의 처지를 시에 담아 달래 보기도 했다. 이때 지은 100편의 시가 그의 문집인 [가상루집(歌商樓集)]에 수록되었다. 그가 관로에 나간 것은 1779년, 32세가 되던 해였다. 마침내 이덕무ㆍ박제가ㆍ서이수와 함께 규장각 초대 검서관에 등용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역사지리라는 학문에만 전념하여 가난이라는 시련을 맞아야 했던 유득공은 검서관이 되어 어느 정도 생계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규장각 일 외에도 35세에는 강화도 외규장각에 머물면서 서적들을 조사하는 업무를 맡기도 하였다.
15년에 이르는 검서관 생활 외에도 지방관을 역임한 것 또한 그의 중요한 이력 중의 하나이다. 37세 때인 1784년에 포천현감을 시작으로 지방관 생활을 하였는데, [발해고(渤海考)]는 이 무렵에 저술된 것이다. 규장각에서의 연구 활동이 [발해고]를 서술하는 데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듬해에는 양근(지금의 양평)군수로 옮겼다가 42세 때인 1789년에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와 광흥창 주부로 있었고, 다시 이듬해 5월에는 사도시 주부로 자리를 옮겼다.
지방관으로서 유득공은 “나랏일을 하는데 나라법인 [대전통편(大典通編]이 양반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는 생각을 토대로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공평하게 일처리를 하였다.
풍천부사로 부임하던 무렵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유득공은 1801년(순조 원년)에 풍천부사에서 물러난 뒤 칩거하며 저술에만 몰두했다. 60세를 일기로 1807년 9월 1일에 세상을 떠나 성해응이 은거하던 포천 향산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양주(楊州) 송산(지금의 의정부시 송산동)에 묻혔다. 장남 본학(本學)과 차남 본예(本藝) 등 2남 2녀를 두었으며, 두 아들 모두 규장각 검서관을 역임했다.
세 번의 중국 여행이 그에게 남긴 것
유득공은 무려 세 차례나 중국 땅을 밟았다. 그는 북경을 두 번, 심양을 한 번 여행했다. 물론 공적으로 다녀온 것이었고, 중국 견문을 바탕으로 [난양록(灤陽錄)]과 [연대재유록(燕臺再游錄)]을 저술했다. 유득공이 처음 중국을 방문한 것은 1778년(정조 2)으로 이미 [한객건연집 (韓客巾衍集)]과 [이십일도회고시]를 통해 그의 명성이 중국에 널리 알려진 뒤였다. 유득공에 앞서 홍대용이 중국을 한 차례 다녀왔고, 그의 숙부인 유련도 유득공ㆍ이덕무ㆍ박제가ㆍ이서구의 시를 엮은 [한객건연집]을 중국 문인들에게 소개한 뒤였으므로, 중국은 그에게 낯선 나라가 아니었다.
유득공의 첫 여행지는 심양이었다. 1778년의 심양 여행은 유득공의 생애에 큰 전환기를 가져왔다. 한백겸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1615년(광해군 7)에 지은 역사지리서)]를 통해 상상만 했던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의 고구려와 발해의 옛땅을 직접 가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훗날 그가 [발해고]를 쓰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유득공이 심양 땅을 밟은 그해, 박제가와 이덕무 또한 정사 채제공을 따라 북경을 다녀왔다. 이들은 우연히 귀국길에 개성에서 만나게 되었다. 박제가와 이덕무는 중국의 수도인 북경을 가보지 못한 유득공을 놀렸다. 이들의 놀림에 맞서 유득공은 “심양이든 북경이든 압록강을 건너간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며 답했지만, 사실 북경을 가본 그들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심양을 다녀 온 이듬해 유득공은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10년 뒤인 1790년(정조 14) 8월, 드디어 박제가와 함께 갈망하던 중국 북경을 가게 되었다. 건륭제의 80세 생일 축하 사절단의 일원으로 뽑혀서 북경을 가게 되었는데, 마침 건륭제가 열하에 있었던 관계로 열하까지 가게 되었다. 이때의 여정을 글로 남긴 것이 [난양록]이다. 1801년 유득공은 주자서(朱子書) 선본(善本)을 구하라는 왕명을 받아 2차 연경 연행길에 올랐다. [연대재유록]은 1801년 중국 연행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발해고]를 지어 ‘남북국시대’를 열다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시 보하이진에 위치한 발해 상경성 유적.
유득공은 만주 지역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발해의 역사에 주목하였다.
사실 유득공은 역사가라기 보다는 시인에 가까웠다. 백탑파 중의 한 사람이었던 유득공은 다른 백탑파 출신의 실학자들처럼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문학 작품들을 섭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고, 그런 가운데 점차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유득공은 중국을 비롯하여 만주, 몽고, 이슬람, 베트남, 미얀마, 대만, 유구 등 다른 나라들로 관심 영역을 넓혀갔고, 이는 자연스럽게 세계관의 확장을 가져와 종래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한백겸의 [동국지리지]의 영향을 받아 한강 이남의 역사에 주목했던 유득공은 점차 한강 이북의 북방사(北方史)로 관심을 돌렸다. 그가 북방 역사에 주목하게 된 것은 더 이상 만주 지역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발해고] 서문에서 유득공은 우리 역사의 무대였던 만주를 잃어버린 것을 통탄하였다.
“고려의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라 외에 발해를 포함한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 [발해고] 서문 중에서
[발해고]는 한국사학사에서 보배와 같은 책이다. 혁신적인 역사관을 바탕으로 [발해고]가 쓰여졌고, 이를 통해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되찾았기 때문이다. 유득공은 [발해고] 서문에서 “발해까지 우리 역사에 넣어 ‘남북국사’를 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고 말문을 연 뒤, “발해를 세운 대(大) 씨가 고구려인이고, 발해가 차지하고 있던 땅도 고구려 땅이었다”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강조하였다. 이른바 ‘남북국시대론’의 출발을 알린 것이다.
“고려가 끝내 발해사를 쓰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고려가 마침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 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크게 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발해고] 서문 중에서
유득공은 발해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야 되는 이유를 확고하게 주장하였다. 발해 영토가 거란과 여진에게 넘어가 버린 데다가, 고려 또한 발해사를 서술하지 않아 이 땅을 되찾으려 하여도 근거가 없게 된 것이 그 이유였다. 18세기에 들어와 북방 영토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인물이 비단 유득공뿐만은 아니었지만,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발해사를 우리 역사 속에 넣을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발해사를 체계화시키고자 했다. 유득공은 발해의 옛 땅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발해고]를 저술했고, 북방 역사의 연원을 밝혀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한사군(漢四郡) 역사에 관한 [사군지(四郡志)]를 저술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정약용(丁若鏞)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와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가 나올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유득공이 서자라는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32세에 규장각 검서관을 시작으로 20여 년간 관직 생활을 거쳐 만년에 정3품까지 올라 갈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중기 때까지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그의 재능을 높이 산 정조의 배려와 서자에 대한 차별이 사라져갔던 조선 후기의 시대적 배경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득공이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세계를 확고하게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등과 같은 북학파와의 교유가 큰 영향을 끼쳤다. 문장가로 출발하여 당대의 시인으로, 나아가 발해 역사를 되살린 역사가로서 큰 족적을 남긴 유득공은 앞으로 더욱 조명 받아야 할 인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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