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7세기 전란의 시대를 살다간 전형 - 소나

히메스타 2016. 9. 13. 13:16

 

 

소나 이미지 1

소나(, ?~675)는 삼국간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 7세기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용감한 신라인이다. 지방민 출신으로 낮은 신분을 가진 그가 [삼국사기] <열전> 7권에 당당히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

용감한 신라의 장군 심나

 

소나의 아버지 심나(, ?~?)는 신라의 백성군() 사산(, 충남 천안시 직산면) 사람이다. 그가 살던 사산 땅은 백제와 접경 지역이었다. 따라서 백제와 신라간에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심나는 힘이 세고 몸이 날랜 인물로, 전쟁이 나면 즉시 나가 싸워 많은 공을 세웠다.

선덕여왕 재위 시기(634∼647년)에 신라가 백성군의 군사를 내어 백제의 변경을 치자, 백제에서도 정예병으로 기습적인 반격을 해왔다. 그러자 신라군은 어쩔 줄 모르고 퇴각했다. 이때 심나가 혼자서 칼을 뽑아 들고 성난 눈으로 크게 소리치며 적군 수십여 명을 베어 죽이니 백제군이 두려워서 마침내 퇴각했다. 이 사건 이후, 백제에서는 심나를 신라의 날랜 장군()이라고 부르며, 심나가 살아 있으니 백성군은 가까이 말라고 할 정도로 그를 두려워했다.

아버지를 닮은 아들

 

소나는 아버지 심나를 닮아 호걸다운 모습을 가졌다. 소나는 아달성()에서 신라 북쪽 변방을 방어하는 일을 맡았다. 아달성은 현재 북한에 위치한 강원도 이천군()지역으로, 철원군보다 북쪽 지역이다. 675년 당시 이곳은 신라 최전방 지역으로 당나라의 지시를 받은 말갈 군사들이 자주 쳐들어온 곳이었다. 때문에 아달성 태수 급찬(9위 관등) 한선은 백성들에게 정해진 날에만 밭에 나가 마(삼)를 심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신라 백성들이 성에서 나와 밭에서 일을 하자, 말갈 군사들이 몰래 쳐들어와 성을 노략질했다. 신라 사람들이 크게 당황하고 있을 때 소나가 칼을 휘두르며 적진을 향해 소리쳤다.

“너희들은 신라에 심나의 아들 소나가 있는 줄을 아느냐? 나는 죽기가 두려워 살기를 도모하지는 않는다. 싸우려는 자가 있으면 왜 나오지 않느냐?”

그가 용감히 적진을 향해 돌진하자, 적들이 두려워 접근해서 싸우지 못하고 다만 활을 쏠 뿐이었다. 결국 소나의 몸에는 적의 화살이 고슴도치 털처럼 박혔고, 그는 마침내 죽고 말았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아내에게 전해지자, 아내는 울면서 말했다.

“남편이 항상 말하기를 ‘장부는 마땅히 싸우다가 죽어야 한다. 어찌 침상에 누워서 집안사람의 손에 죽을 수 있으랴!’고 하였다. 그가 평소에 이렇게 말했으니, 지금의 죽음은 그의 뜻대로 된 것이다.”

소나의 죽음에 감동한 문무왕

 

이 소식을 들은 문무왕(, 재위: 661~681)은 그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였고, 부자가 모두 나라 일에 용감하여 대대로 충성과 의리를 보여주었다며 그에게 잡찬() 관등을 추증했다. 비록 죽은 이에게 명예 관직을 내린 것이기는 하지만, 잡찬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3번째 높은 관직이다. 살아생전 소나가 급찬의 지휘를 받는 신분이었음을 고려한다면, 그는 10위 관등 이하를 가질 수 있는 5두품이나 그 보다 낮은 4두품의 신분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골 신분이어야만 얻을 수 있는 3위 관등을 하사한 문무왕의 조치는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나-소나 부자와 닮은 찬덕과 해론 부자

 

신라에는 이들 부자와 매우 닮은 사람들이 있었다. 찬덕()과 해론() 부자였다.

찬덕은 신라 가잠성(, 경남 거창군) 현령()으로, 용감하며 굳은 절개를 가진 사람이었다. 606년 10월 백제가 대군을 동원해 백여 일 동안 가잠성을 공격하자, 진평왕은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가잠성 주변의 상주(), 하주(), 신주()의 군사로 하여금 가잠성을 구원하도록 했다. 하지만 백제군과 싸운 3주의 군사들은 이기지 못하고 후퇴하고 말았다.

가잠성을 지키던 찬덕은 이를 분하게 여기고 부하들에게 말했다.

“3주의 장수들이 적의 강함을 보고 진격하지 않아 성이 위급한데도 구원하지 않았다. 이는 의리가 없는 행동이다. 의리 없이 사는 것보다는 의리 있게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찬덕은 이에 흥분하여 힘을 내서 적과 싸우면서 성을 굳게 지켰다. 양식과 물이 떨어지자, 오히려 시체를 뜯어먹고 오줌을 마시며 힘껏 싸웠다. 다음해 정월이 되자, 가잠성 사람들이 이미 지치고 성은 곧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는 하늘을 우러러 크게 외쳤다.

“임금께서 내게 이 성을 맡겼는데,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패하니, 원컨대 죽어서도 커다란 악귀가 되어 백제인을 모조리 잡아먹고 이 성을 회복하리라.”

그는 이런 무시무시한 유언을 남기고, 스스로 홰나무에 달려가 부딪쳐 죽고 말았다. 결국 성은 함락되고 군사들은 항복하게 되었다.

찬덕이 이렇듯 신라를 위해 죽자, 그의 아들 해론은 20세에 부친의 공으로 대나마(신라 17관등 체계에서 10위)가 되었다. 618년 진평왕은 해론을 금산(, 경북 김천군) 당주()로 임명하고, 여러 장수들과 함께 가잠성을 공격하여 이를 되찾도록 했다. 가잠성을 지키던 백제가 군사를 내어 공격해오자 해론 등이 맞서 싸웠다. 해론은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옛날 내 아버지가 여기서 전사하셨는데, 나도 여기서 백제인과 싸우니 오늘이 내가 죽는 날이다.”

해론은 칼을 들고 적진으로 달려가 여러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전사했다. 신라에서는 그의 전사 소식을 듣고, 남은 가족을 돌보아 주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조문을 했다.

[삼국사기] <열전> 7권의 인물들

 

아버지와 아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연이어 죽는 모습은 당시 신라인의 도덕률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심나와 소나, 찬덕과 해론과 같이 나라를 위해 싸우고, 적에게 끝까지 항전하는 인물은 7세기 신라인이 닮아야 할 모습이었다.

[삼국사기] 〈열전〉은 성격이 비슷한 인물들을 모아서 한 권에 싣는 경향이 강하다. 〈열전〉 4권에 을지문덕, 거칠부, 이사부, 사다함 등을 기록한 것은 이들이 전쟁에서 이름을 날린 공통점 때문이고, 〈열전〉 6권은 강수, 최치원, 설총 등 학문으로 이름을 날린 학자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그런데 〈열전〉 7권에는 심나와 소나, 찬덕과 해론 부자()외에도 김품일김관창 부자, 김흠춘ㆍ김반굴ㆍ김영윤 3대 가족, 부과ㆍ취도ㆍ핍실 3형제, 그리고 눌최, 김흠운, 설계두, 계백 등 7세기를 살았던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열전〉에 독립된 전기()를 가진 13명과 이들과 관련된 아버지, 형, 할아버지, 휘하 병사와 노비 등 9명을 합한 22명 가운데 계백을 제외하면 모두 신라인이다. 또한 설계두(, ?~645, 신라 귀족 출신의 당나라 장수)를 제외하면 모두 자신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이고, 열기()를 제외한 12명의 입전 인물 모두는 순국()한 사람들이다.

소나와 심나가 <열전>에 실린 까닭

 

이들 가운데는 왕경(, 지금의 경주) 출신의 진골 신분을 가진 자들도 있지만, 소나와 같이 지방 출신으로 신분이 낮은 인물들도 있다. 신라는 순국한 인물들에게 파격적인 신분 상승을 포상으로 주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신분 상승을 보인 것은 4~5두품의 신분이었던 소나였다. 취도, 부과, 핍실 형제는 아버지의 관등이 11위 내마로 5두품 출신이다. 이들은 공을 세운 후, 6두품이어야만 받을 수 있는 8위 사찬()으로 직위가 상승하였다.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죽은 죽죽과 용석은 13위 사지()였는데, 순국한 이후 9위 급찬과 10위 대나마로 직위를 받았다. 4두품 신분에서 각각 6두품과 5두품으로 두품이 오른 것이다. 진골의 경우에는 그의 관직을 올려주었다. 김흠춘의 경우는 3위 잡찬이었는데, 660년 전쟁에서 죽자 1위 각간으로 추증되었다.

왕경 출신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신라의 주인이라는 의식 때문에 국가를 지키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왕경인에 비해 신분적 차별을 받고 있던 지방민의 경우는 전쟁 수행에 있어서 소극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을 정복하고 지배했던 신라 왕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7세기에 들어서 삼국간의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신라는 이들 지방민을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도록 유도할 필요성이 커졌다.

왕경 모량부 출신으로 610년에 순국한 찬덕과 618년에 순국한 해륜은 별다른 포상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624년 순국한 눌최의 경우 10위 대나마에서 9위 급찬으로 1등급 관직이 상승되었고,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죽은 죽죽과 용석은 3~4등급 관직이 상승되었다. 이후 660년 황산벌 전투를 비롯해 전쟁의 양상이 치열해지자, 신분 상승의 폭 또한 더욱 높아진다.

특히 675년에 죽은 소나를 파격적으로 신분 상승시킨 것은, 이 즈음 당나라가 대군을 동원해 총공격을 감행하여 신라가 가장 큰 위기상황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신라는 676년 당나라군을 몰아낸 이후에도 7세기 말까지 당나라가 다시 쳐들어올 것에 대비해 군대를 지속적으로 늘리며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인들에게 용감히 싸울 것을 적극 독려할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이 때문에 소나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 심나의 행적까지 거론하며 널리 백성들에게 홍보를 하고, 그들처럼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권유했던 것이다.

애국주의 홍보 모델 소나

 

7세기 신라인들은 고구려, 백제와 거듭된 전쟁을 치르면서, 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 화랑도가 지켰던 계율인 임전무퇴(退)는 당시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도덕율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전쟁이 생활의 일부로서 익숙한 시대였다고 하더라도, 죽음이 두려워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가진 것이 없고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이때 사람들에게 목숨을 아끼지 말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나라를 위해 전사하는 것이 가치로운 일이라고 믿게 하는 것은 교육의 힘이다. 세속오계를 강조하고, 소나와 같은 이들을 널리 홍보함으로써 신라는 최고 신분인 진골에서부터 두품 신분층, 지방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전쟁에서 용감히 싸워야 함을 당연한 일로 여기게 된 것이다.

7세기 신라인들은 강렬한 국가의식을 갖고 있었고, 강한 전투 의지를 지니고 있었으며, 자기희생의 정신 또한 강했다. 이것은 신라가 치열한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신라인의 정신세계가 형성될 수 있도록 신라에서는 전장에서 목숨을 던진 인물에게 만족할 만한 포상을 해주었다. 이로 인해 신분 상승을 비롯한 부귀와 자손 대대로 가문의 영화를 보장받으려는 신라인들이 의지가 커진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소나는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7세기, 신라가 백성들에게 권한 이상적인 인물상으로 홍보된 까닭에 낮은 신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에 기록될 수 있었다. 소나는 7세기 전란의 시대를 살다간 신라인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