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조선시대 산림의 원형을 보여준 예학의 대가 - 김장생

히메스타 2016. 9. 9. 11:36

 

김장생 이미지 1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의 새로운 흐름은 예학()이었다. 그런 변화의 계기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우선 내부적으로 건국 이후의 발전에 따라 조선은 인구가 늘어나고, 사회도 복잡해졌다. 이런 과정은 자연히 그전에는 없었던 여러 현상을 수반했다. 종법(: 친족조직 및 제사의 기본이 되는 법)의 개념이나 상속과 제사의 범위와 절차 등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부분이었다.

중앙 정치에서도 큰 변화가 발생했다. 동서분당(1575년. 선조 8)으로 당쟁이 시작된 뒤 광해군과 인조대를 거치면서 갈등이 격화되었다. 그 핵심의 하나는 ‘폐모살제(: 어머니를 유폐시키고 동생을 죽임)’라는 윤리와 관련된 문제였다. 내부적 변화와 함께 거대한 외부적 충격도 밀려왔다. 그것은 명ㆍ청의 교체였다. 조선 사회, 특히 그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중화질서의 몰락은 엄청난 정신적 혼란을 가져왔다.

예학은 엄격한 질서와 정교한 형식을 중시하고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 특징은 이 시기의 이런 내외적 변화에 대처하는 데 적합했다. 김장생(, 1548∼1631)은 이런 시대적 필요에 부응해 예학 연구를 선도한 인물이었다.

가문적 배경

 

작자미상, <전 김장생 초상>비단에 채색, 101.5×61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장생은 자가 희원(), 호는 사계()며 시호는 문원()이다. 본관은 광산()으로 비중 있는 가계를 형성했다. 먼저 5대조는 세조~성종 때 좌의정과 원상을 지내고 적개2등ㆍ좌리1등공신ㆍ광산()부원군에 책봉된 대표적 대신인 김국광(, 1415∼1480)이었다. 고조 김극뉴(, 1436∼1496)는 대사간을 역임했고, 증조 김종윤()과 조부 김호()는 각각 진산군수(. 병조참의에 추증)와 지례현감(. 좌찬성에 추증)을 지냈다.

부모의 비중도 작지 않았다. 아버지 김계휘(, 1526∼1582)는 선조 때 공조ㆍ형조ㆍ예조참판ㆍ대사간 같은 비중 있는 관원으로 활동했다. 어머니는 평산() 신씨()인데, 호조판서를 지낸 신영()의 딸이었다. 이 신영의 손자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문장가로 평가되는 상촌() 신흠(, 1566~1628)이다. 이들 중 김국광ㆍ김극뉴ㆍ김계휘ㆍ신영은 문과 급제자였다.

이런 김장생의 가계는 한국사의 중요한 통설인 ‘훈구ㆍ사림론’과 관련해 주목할 만하다. 현재의 통설에 따르면 김국광ㆍ김극뉴와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ㆍ신흠은 ‘훈구파’와 ‘사림파’로 뚜렷이 구분될 것이다(좀 더 넓은 범위의 혈연관계를 조사해 보면 관련된 주요 인물은 보다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밀접하고 연속적인 혈연관계에 있었다. 조선 사회의 지배층이 매우 견고하게 유지되었다는 이런 사실은 조선 중기 이후 사림파가 훈구파를 몰아내고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방식의 그 통설을 재검토할 필요성을 알려준다.

출생과 성장

 

김장생은 1548년(명종 3) 7월 8일 한양 정릉동(. 지금 서울 중구 정동)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0세 때 어머니를 여의기는 했지만(1558년. 명종 13) 성년이 될 때까지 비교적 평범하고 순조롭게 성장했다.

이 시기에 그의 주요한 학문적 스승은 구봉() 송익필(, 1534∼1599)과 율곡 이이(, 1536∼1584), 토정() 이지함(, 1517∼1578) 등이었다. 송익필은 서출()이라는 약점 때문에 급제나 출사는 하지 못했지만 성리학, 특히 예학을 깊이 연구한 인물이었다. 정치적 역량도 뛰어나 서인의 숨은 실력자로 평가되었으며, 기축옥사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김장생은 12세 때 송익필에게서 사서()와 [근사록] 등을 배웠으며(1560년) 19세 때 이이에게 수업하고 이지함을 찾아뵈었다(1567년. 명종 22).

18세 때는 창녕 조씨(첨지중추부사 조대건()의 딸)과 혼인했다(1566년). 여기서 3남3녀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이 그와 함께 문묘에 종사된 유명한 신독재() 김집(, 1574∼1656)이다.

관직 생활

 

정확한 동기는 찾지 못했지만, 김장생은 문과에 응시하지 않았다. 급제하지 않거나 이렇다 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아도 중요한 정치적ㆍ학문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조선 중기 이후의 한 특징이었다.

성년 이후 60세 무렵까지 김장생은 여러 관직을 지냈다. 30세(1578년. 선조 11) 때 이조판서 이후백()의 천거로 창릉참봉()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순릉()참봉ㆍ평시서() 봉사(. 이상 1584년)ㆍ동몽교관(. 1588년. 40세)ㆍ통례원() 인의(. 1590년. 42세)ㆍ정산()현감(1591년)ㆍ호조정랑(1596년)ㆍ안성()군수(1599년. 51세)ㆍ익산군수(1603년. 선조 36)ㆍ회양부사(使. 1609년. 광해군 1. 61세)ㆍ철원()부사(1610년) 등을 역임했다.

이 기간의 주요 활동으로는 33세 때인 1581년(선조 14) 가을에 종계변무 주청사(使)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 중국에 다녀온 경험(이듬해 4월에 부친과 함께 귀국했으며, 그달 21일 부친이 별세했다)과 정유재란 때 호조정랑으로 명군에게 군량을 조달하는 데 공로를 세웠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자리가 대부분 요직은 아니었고 외직도 많았다는 사실을 볼 때, 김장생의 삶에서 관직 생활은 그리 큰 의미를 두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그가 집중한 분야는 학문 연구였다. 그는 이 시기에 조선 예학의 중요한 기초를 마련했다.

예학의 연구

 

김장생은 83년의 긴 생애 동안 30대 이후 꾸준히 예학을 연구했다. 그의 주요한 예서는 크게 세 주제로 나뉜다. 먼저 [전례문답()]은 국가 의례를 다룬 저서인데, 인조가 반정으로 즉위한 뒤 광해군을 종통()에서 제외하고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을 추숭하는 등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를 분석했다. [가례집람()](1599년)과 [상례비요()](1583년)는 양반의 생활 예절을 정리한 저작이며, [의례문해()](1646년)는 변칙적인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답변한 내용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저술들은 국가와 개인의 주요 의례를 거의 모두 포괄함으로써 조선 예학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김장생은 중국의 역대 전례를 방대하게 참고하고 치밀하게 고증한 뒤 그것을 조선의 고유한 상황과 절충해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했으며, 종법에 의거한 질서의 확립을 추구했다고 인정된다.

그밖에도 김장생은 [근사록석의()](1598년), [경서변의()](1618년) 같은 성리학 저술도 남겼다. 그의 저술은 방대한 분량의 [사계전서()](51권 24책. 1687년 초간)로 집약되었는데, 엄격하고 건조한 예학을 연구한 학자답게 시문()의 분량이 매우 적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51권 중 5권만이 문학 관련 저술이다).

중년 이후의 개인사는 비교적 평범했다고 보인다. 언급할 만한 사항으로는 1586년(선조 19) 4월에 부인이 세상을 떠난 것과 1591년(선조 24)에 아들 김집이 소과에 합격하고 기계() 유씨(. 좌의정 유홍())의 딸과 혼인한 것을 들 수 있다(그러나 김집도 대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인 1592년 5월에는 장남 김은()과 며느리 은성() 박씨가 왜군에게 피살되기도 했다.

노년의 활동

 

당시 대부분의 서인들처럼, 김장생에게도 정치적 전환의 계기는 인조반정(1623년)이었다. 그때 그는 75세의 고령이었다. 이런 나이와 그동안의 학문적 업적 때문에 그는 서인의 영수로 받들어졌다.

반정 10년 전부터 김장생은 벼슬을 버린 상태였다. 그는 1613년(광해군 5) 서제(: 아버지의 첩에게서 태어난 아우)인 김경손()ㆍ평손() 등이 계축옥사에 연루되자 충청도 연산(. 지금 충남 논산 일대)으로 낙향했다.

반정이 성공하자 김장생은 사헌부 장령(정4품)으로 출사했고 성균관 사업(. 정4품)으로 원자를 교육했지만, 신병으로 곧 다시 낙향했다. 이듬해 1월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김장생은 공주()로 파천한 국왕을 나아가 맞이했다. 이런 경험은 3년 뒤 정묘호란(1627년) 때도 되풀이 되었다. 김장생은 양호호소사(使)가 되어 공주로 피신한 세자를 호위했고, 화의가 이뤄지자 강화도로 가서 국왕을 알현했다.

그 뒤부터 별세할 때까지 김장생은 집의ㆍ공조참의ㆍ형조참판 등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이런 경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가장 큰 힘은 송시열ㆍ송준길()ㆍ이유태ㆍ강석기()ㆍ장유ㆍ최명길() 같은 유명한 제자들이었다. 거기에는 둘째 아들 김집도 포함되었다. 이런 문인들의 추앙으로 김장생은 당시의 정계와 학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김장생은 1631년(인조 9) 8월 83세로 별세했다. 그의 위상은 장유가 신도비명을, 송시열이 행장을, 송준길이 시장()을 지었다는 사실이 웅변한다. 1657년(효종 8)에는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원()’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1687년(숙종 13)에는 왕명으로 문집이 간행되고 1717년(숙종 43)에는 조선시대 인물의 가장 큰 영예라고 할 수 있는 문묘에 종사되었다.

일찍부터 김장생은 이이와 성혼을 계승한 서인의 적통으로 인정되었지만, 노ㆍ소분당 이후에는 노론의 주류로 평가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때의 문묘 종사는 노론의 정치적ㆍ학문적 승리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조선 후기 정치와 학문의 중요한 특징은 ‘산림()’의 출현이었다. 그들은 급제나 관직과는 상관없이 뛰어난 학문적 업적과 사승(: 스승에게 학문을 배워 이어받음)관계로 큰 정치ㆍ사상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산림은 한 세대 뒤인 송시열에서 전형적인 모습을 얻지만, 김장생은 그 원형을 보여준 예학의 대가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