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申潤福). 자 입보(笠父), 호 혜원(蕙園), 고령인(高靈人). 첨사(僉使) 신한평(申漢枰)의 아들, 화원(畵員). 벼슬은 첨사다. 풍속화를 잘 그렸다."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조선시대 풍속화가 신윤복(申潤福, 1758~?). 그러나 그에 대한 기록은 위에서 소개한 오세창(吳世昌)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의 내용이 거의 유일한 것이다. 혹자는 신윤복에 대한 관찬사료(官撰史料)가 희박하다는 데서, 그가 비속한 그림을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정보를 찾아볼 수 없다. 의문에 싸여 있는 화가 신윤복. 그 궁금증에서일까? 그에 대한 현대인들의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다. 그는 영화 [미인도]와 드라마 [바람의 화원] 등을 통해 상상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으며, 그의 작품을 공개한 간송미술관의 특별전시회는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런데 신윤복이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과정에서 소외된 인물이 있다. 바로 그의 아버지 신한평(申漢枰, 1726~?)이다. 신한평이 당대에 명성을 떨친 화원이었으며, 신윤복의 집안이 중인 집안 출신으로 다수의 화원들이 배출된 점 역시 간과된 측면이 많다. 신윤복의 미스터리한 행적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을 위해 그의 가족사와 특히 신한평과 신윤복 부자(父子) 화원의 탄생이라는 측면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중인(中人) 집안의 명맥을 잇다
신윤복은 중인(中人) 집안 출신으로 파악된다. [만성대동보] 등 ‘고령(高靈) 신씨(申氏)’ 가문의 족보에서 신윤복의 이름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의 9대조인 신공섭(申公涉)의 이름 밑에 아들로 숙(淑)과 건(湕)만 기록되어 있을 뿐, 신윤복의 8대조인 수진(眞)에서 윤복까지 이르는 가계는 그려져 있지 않다. 대신에 양반이 아닌 중인의 가계를 모아 놓은 책인 [성원록(姓源錄)]의 ‘고령 신씨’ 조에서는 그의 가계를 찾아 볼 수 있다.
[성원록]에 따르면 신윤복은 신말주(申末舟, 1439~1503)의 11대손이다. 신말주는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동생으로, 1454년(단종 2) 문과에 급제하였다. 도승지로 있던 형 신숙주는 동생의 합격을 축하하기 위해 집에서 축하 잔치를 열었는데, 이때 단종이 술 30병을 내려 주기도 했다. 1)이후 신말주는 세조가 즉위한 뒤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었고,2)대사간까지 지내는 등 관료의 길을 걸었다. 세조에서 성종대에 걸쳐 최고의 관료가 된 신숙주를 포함하여 신말주의 집안은 고위 관료들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그러나 고령 신씨 집안은 신말주의 손자인 공섭(公涉)대에 이르러 분화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신공섭에게는 숙(淑)과 건(湕)의 두 아들 이외에 수진(眞)이 있었다. 이들은 형제간이었지만, 중인 족보인 [성원록]에 신수진 이하의 계보만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신수진은 서자(庶子)로 추정된다. 이후 신수진의 후손들은 잡과에 응시하여 잡직으로 진출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이것은 서자가 중인직에 진출하는 조선 중기 이후의 일반적인 상황과 일치하는 것이다.
- [단종실록] 1454년(단종 2) 11월 12일(기미)
- [세조실록] 1455년(세조 1) 12월 27일(무진)
신수진의 아들 신경뢰(申景)는 관상감에 소속된 잡직관(雜織官)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원록]의 신경뢰 이름 옆에 작은 글씨로 ‘운(雲)’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것은 ‘운과(雲科: 천문학과)’로 진출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신경뢰의 형 신경지(申景池)에게 양자로 간 신대원(申大源)은 1609년(광해군 1) 역과에 합격했고, 그의 아들 신익해(申益海)와 신극해(申克海) 또한 모두 역과 출신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신대원의 친동생인 신백원(申伯源)의 아들 신덕해(申德海)도 1619년 역과에 합격하였고, 신덕해의 아들 신유상(申有相)은 의과에, 신명상(申命相)은 율과에 합격하는 등 이 집안은 잡과 합격자들을 쏟아내면서 중인 가문으로 성장했다. 3)이후에도 잡과 합격자들이 끊이지 않고 배출되었다. 신세제(申世濟)ㆍ신세만(申世漫)ㆍ신한귀(申漢龜)ㆍ신한룡(申漢龍)ㆍ신윤권(申潤權)ㆍ신윤빈(申潤彬)은 모두 역과에 합격하였고, 신덕흥(申德興)은 의과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신일흥(申日興)ㆍ신한평(申漢枰)ㆍ신윤복(申潤福)이 대를 이어 화원이 되면서 화원 가문으로서의 입지를 지키게 되었다.
- 강명관,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속으로 걸어나오다], 푸른역사, 2001, 13쪽.
신윤복 집안의 가계도로, [성원록(姓源錄)] ‘고령(高靈) 신씨(申氏)’ 조와 강명관의 저서를 참조하여 작성하였다. 색칠한 사람은 모두 잡과에 합격한 사람이고, 테두리 친 사람은 화원이다.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이었던 아버지 신한평
신윤복과 달리, 아버지인 신한평에 대한 자료는 꽤 남아 있는 편이다. 신한평의 호는 일재(逸齋)이다. 그는 도화서(圖畫署) 화원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으며, 영조ㆍ정조ㆍ순조 초년까지 궁중의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畫員)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특히 초상화와 속화에 빼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신한평의 이름이 정선(鄭敾)ㆍ강세황(姜世晃)ㆍ김홍도(金弘度)ㆍ심사정(沈師正) 등과 나란히 기록되어 있어,4) 그림을 잘 그렸던 화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제14권 문예전고(文藝典故) 화가(畫家)
신한평은 당대 최고의 화원들만이 그릴 수 있는 어진(御眞), 즉 왕의 얼굴을 3차례나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조는 영조가 어진을 10년마다 1본씩 모사했던 것을 본받아, 자신도 그 뜻을 이어 받들려고 하였다. 이때, 신한평은 어진을 모사하는 일을 담당했는데 김홍도도 이 작업에 참여하였다. 그 기록이 [정조실록]에 보인다.
각신(閣臣)을 소견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어진(御眞) 1본(本)을 모사(摹寫)하려 하는데, 이는 장대(張大)시키려는 의도는 아니다. 삼가 선조(先朝) 때를 상고하여 보건대, 매양 10년마다 1본씩 모사하였는데, 이것이 곧 우리 조가(朝家)의 성헌(成憲: 이전에 제정하여 지켜오는 법)이 되어 있다. 지금 나의 이 거조는 실로 선조께서 이미 행한 규례를 몸받아 오늘날 소술(紹述: 선대의 위업을 이어받아 밝힘)하는 뜻을 붙이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 금년부터 시작하여 매양 10년마다 1본씩 모사하여 선조께서 어진을 모사한 뜻을 몸받도록 하겠다.” … 이어 화사(畵師) 한종유(韓宗裕)ㆍ신한평(申漢枰)ㆍ김홍도(金弘道)에게 각기 1본씩 모사하라고 명하였다. - [정조실록] 1781년(정조 5) 8월 26일(병신)
신한평은 어진을 모사한 일로 시상을 받았다. 이때, 정조는 “이번에만 애쓴 사람이 아니니, 양전(兩銓)의 산직(散職) 가운데 모기(某岐)와 잡기(雜岐)를 막론하고 상당과에 차례로 수용하라.”라고 이야기했다. 5) 여기에서도 그가 궁궐에서 활발하게 그림을 그렸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이후에도 화원으로서 각종 시상의 혜택을 받았다. 6) 그는 초상화뿐만 아니라 의궤 제작에도 참여했다. 1759년(영조 35) 영조와 정순왕후의 혼례식을 기록한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와 1802년(순조 2)에 거행된 순조와 순원왕후의 혼례식을 기록한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 1804년(순조 4) [인정전영건도감의궤(仁政殿營建都監儀軌)]의 반차도(班次圖: 의식,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와 도설(圖說: 그림을 곁들여 설명하는 책)을 그린 화원이었다.7)
- [일성록(日省錄)] 1781년(정조5) 9월 16일(을묘)
- [일성록(日省錄)] 1783년(정조 7) 11월 12일(기해); 1784년(정조 8) 6월 12일(을미); 1786년(정조 10) 윤7월 20일(신묘); 1788년(정조 12) 10월 12일(경자)
-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의 화원 명단에 ‘신한동(申漢棟)’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신한평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신한평의 현전하는 작품으로는 <자모육아(慈母育兒)>, <묵모란도(墨牡丹圖)>, <우경산수도(雨景山水圖)>, <원교이광사초상도(圓嶠李匡師肖像圖)> 등이 있다. 그의 작품 중 특히 <자모육아>는 아들 신윤복의 작품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 이 그림은 신한평의 현존하는 유일한 풍속화로, 신윤복이 즐겨 다룬 여인 풍속도의 연원을 말해 주는 증거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의 크기나 중앙에 접힌 자국 등을 살펴보면 화첩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파악되는데, 이것은 신한평이 풍속화 화첩을 남겼을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신한평, <자모육아(慈母育兒)>제작연도 미상, 종이에 수묵담채, 23.5×31.0㎝, 간송미술관 소장
위 그림에는 엄마와 함께 세 아이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다소곳이 곁에 앉아 있는 여자 아이, 눈을 비비며 서 있는 남자 아이, 엄마 품에 안겨 힘차게 젖을 빨고 있는 막내 아이. 실제로 신한평에게 신윤복과 신윤수 두 아들과 외동딸이 있었으므로, 그림 속의 등장인물들이 신한평의 가족일 수 있다는 추측도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눈을 비비며 서 있는 아이가 신윤복이 아닐까? 그림 속의 아이가 신윤복이 아니라 할지라도, 신한평의 도화서에서의 생활과 작품 세계가 그의 아들 신윤복에게 영향을 주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신윤복이라는 대가의 탄생에는 신한평이라는 화원 아버지가 있었음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화원, 기록을 만드는 역사가 또는 사진기자
조선시대의 화원은 국가의 공식기구인 도화서(圖畵署)라는 관청에 소속되어 그림 그리는 일을 전문적으로 행하였던 사람들을 말한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그림을 그려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화가인 셈이었다. 조선시대 화원들의 활동은 도화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대개는 국가에 필요한 실용적인 그림이나 기록화를 그리게 되었다. 화원 이외에 화가를 부르던 명칭으로는 화공(畵工), 화사(畵師) 등이 있었다. 도화서는 조선 초기에는 도화원이라 불려졌으나, 격을 낮추는 과정에서 도화서가 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종 6품 관청으로, 제조 1인, 별제 2인 외에 잡직으로 화원 20인이 있었다. 정조 시대에 편찬된 [대전통편]에는 화원의 수가 증원되어 30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화원들은 왕이나 명망가들의 초상을 그렸으며, 지도를 제작하는 일도 국초부터 화원들의 몫이었다. 또한 기계류와 건축물의 설계도, 책의 삽화, 외교사절을 수행하면서 외국의 풍물을 그리는 일도 화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화원들은 오늘날의 역사가, 기록을 찍는 사진기자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결혼식, 장례식, 궁중 잔치 등 국가의 주요행사가 거행되면 의궤(儀軌)를 제작했으며, 의궤에는 행사 장면이나 기물 등을 첨부하였다. 물론 그림의 제작은 화원들이 담당하였고, 의궤에는 그들의 실명(實名)을 기록하여 책임감과 함께 자부심을 부여하였다. 왕의 혼례 의식을 그린 [가례도감의궤]의 끝부분에는 화원들이 그린 반차도가 있는데, 이들 그림에는 혼례식에 동원된 사람과 말의 모습, 복장과 깃발 등 당시의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화원들은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개인적인 작품 활동 보다는 의궤나 지도 제작과 같은 국가의 공식 행사에 참여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고, 연행사나 통신사와 같이 중국이나 일본으로 가는 사신단의 명단에도 꼭 포함되었다. 화원들이 남긴 일반 감상화는 국가와 궁중의 각종 행사에 동원되고 남은 시간에 자신의 기량을 키우는 방편으로 그린 것이 많았다. 정조가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으로 가던 상황을 기록한 병풍에는 임금의 행차를 백성들이 자유롭게 구경하고 행렬 주변에 임시로 좌판이 벌어지는 모습과, 정렬된 상태지만 자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 정조가 한강을 건너기 위하여 설치한 주교(舟橋: 배다리)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다. 이처럼 화원들의 그림 속에는 살아 숨쉬는 역사의 현장이 생생히 드러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당대의 흔적들을 더욱 생생하게 후대에 전달하려는 목적에서 뛰어난 화원들의 능력을 필요로 하였고, 신한평, 신윤복 부자 또한 이러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신윤복 그림의 탄생 배경
앞에서 살펴 본 중인 집안이라는 가계의 특징과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활동한 도화서 화원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신윤복이라는 인물과 그가 그린 그림들을 연관 지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신윤복이 도화서 화원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대로 중인들을 배출한 집안이었으며, 화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음은 당연하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아가 아버지와 함께 도화서에서 활동했던 김홍도와 같은 뛰어난 화원들과 접촉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화원의 길을 걸은 신윤복. 당시 도화서는 한양의 중심가인 운종가(雲從街)와 광통교(廣通橋)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중촌이라 불린 광통교 부근은 당시 부유한 기술직 중인과 양반들이 거주했던 곳으로, 그들은 이곳에서 풍악을 울리며 유흥을 즐기기도 했다. 일부 사람들은 향락에 빠져 기방을 장악하기도 하였는데, 신윤복의 그림에 기녀(妓女)나 한량, 하급 잡직 관료의 모습이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풍경을 지켜보았던 신윤복은 쉽게 아래와 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신윤복, <야금모행(夜禁冒行)>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28.2 x 35.6 cm,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
신윤복, <유곽쟁웅(游廓爭雄)>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28.2 x 35.6 cm,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국도(國都) 8영’ 중에는 ‘광통교의 맑은 달’이 포함되어 있다. 8) 도성 안의 아름다운 풍경 8곳 중의 한 곳으로 꼽힐 정도로, 광통교 밤하늘의 달은 아름다웠나 보다. 그래서인지 정월대보름날 밤에 다리를 밟는 풍속이 이곳에서 진행되었다. 다리를 밟으면 다리병[脚病]을 앓지 않는다고 하여 성행하던 세시풍속의 하나인데, 일명 ‘답교(踏橋)’ 또는 ‘답교놀이’라고도 한다.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저녁에 종이 울리면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다리 밟기를 하였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혼잡을 이루었고, 수표교와 광통교가 가장 심해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을 이용하여 함께 나온 청춘 남녀도 있지 않았을까? 신윤복의 그림에 유독 달이 많이 등장하고, 달 아래에서 밀회를 즐기는 남녀를 등장시킨 것도 일정한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권 <동국여지비고> 제2편 한성부(漢城府)
신윤복, <월야밀회(月夜密會)>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35.3×28.2 cm,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작품 보러가기
또한, 광통교가 도화서 근처에 있어서인지, 여기에는 여러 그림을 파는 가게가 들어서 있었다.9)이것은 19세기에 지어진 <한양가(漢陽歌)>에도 묘사되어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권 <동국여지비고> 제2편 한성부(漢城府)
광통교 아래 가게 각색 그림 걸렸구나
보기 좋은 병풍차(屛風次)에 백자도(百子圖) 요지연(瑤池宴)과
곽분양(郭汾陽) 행락도(行樂圖)며, 강남 긍릉(金陵) 경직도(耕織圖)며,
한가한 소상팔경(瀟湘八景) 산수도 기이하다 - <한양가(漢陽歌)>
[여지도(輿地圖)] 도성도(都城圖)에 표시된 도화서
각색 그림을 파는 가게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림을 사는 수요도 꽤 있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여기에서 신윤복의 그림을 팔았다면, 제일 인기가 있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이전에 접하지 못했던, 노골적인 남녀의 애정 표현 등을 과감하게 그려낸 신윤복의 그림에 흥미를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강렬하고 다양한 색채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한편, 신윤복이 그림에 원색적인 색채를 자주 사용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배어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신한평은 묘사보다 채색에 능했던 인물이다. 어진 제작 시에 채색을 담당한 걸 보면, 신윤복의 세련된 색채 사용은 아버지의 영향에 힘입은 바 크다 하겠다. 또한 그림에 이렇게 다양한 색을 입히려면 중국과 서양 상인을 통해 들어온 안료를 구입ㆍ이용해야 한다. 여기에 역관을 지냈던 신윤복의 친척들이 일정 부분 도움을 주었을 가능성도 크다. 조선시대 역관들은 사신단에 포함된 상인들과 함께 중국의 서화나 골동품 및 기타 상품들을 교류하여 국내로 반입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신윤복의 그림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화원 집안의 가풍 속에서 어려서부터 그림을 접하고 그 능력을 발휘한 신윤복. 그러나 그는 틀에 박힌 도화서 화원의 길을 선택하는 대신에 자신의 성정(性情)에 충실하여 그림을 그렸다. 특히 여성과 일상이라는 분야에서 최고의 수준을 보였고, 자신의 그림에 조선 후기 역사의 일부분을 고스란히 남겨 놓았다. 기존의 틀에서 일탈한 화원 신윤복이 있었기에 조선 후기 풍속사는 더욱 풍요로워졌다.
'인물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해를 우리 역사로 서술한 실학자 - 유득공 (0) | 2016.09.19 |
---|---|
7세기 전란의 시대를 살다간 전형 - 소나 (0) | 2016.09.13 |
조선시대 산림의 원형을 보여준 예학의 대가 - 김장생 (0) | 2016.09.09 |
수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고구려의 26대왕, 영양왕 (0) | 2016.09.08 |
조선후기 척화의 상징 김상헌 (0) | 2016.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