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현실 가능한 정책을 제시한 소론 정치가, 최석정

히메스타 2016. 8. 17. 10:46

 

 

최석정 이미지 1

조선후기 숙종대는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ㆍ사상적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된 시기였다. 명곡() 최석정(, 1646~1715)은 숙종대 윤증(), 남구만() 등과 함께 소론의 영수로 활약하면서 정계와 사상계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최석정은 숙종 후반기에 10번 이상 정승에 올랐는데, 이처럼 오랫동안 최고의 직책에 자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온건하고 타협적인 정치노선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관의 기저에는 사상적으로 주자성리학에만 매몰되지 않고 양명학, 음운학, 수학 등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가지는 개방성이 있었다.

숙종이 신임한 영원한 정승

 

최석정의 초명은 석만(), 호는 명곡() 또는 존와(), 자는 여화(), 본관은 전주()이다. 최후량()의 아들로 태어나 응교() 최후상()에게 입양되었다. 병자호란 때에 주화론()을 주장하고 영의정까지 역임한 최명길(, 1586~1647)은 그의 조부가 된다. 1666년(현종 7)에 진사가 되고 167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승문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한림회천()에 뽑혀 사관으로서 활동하다가 홍문록에 올라 홍문관원이 되었고, 응제시()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 호피()를 하사받았다. 1685년(숙종 11) 부제학으로 있을 때 스승인 윤증(, 1629~1714)을 변호하고 김수항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었다. 1687년 선기옥형()을 제작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이후 이조참판ㆍ한성부판윤ㆍ이조판서 등을 두루 거쳤다.

최석정은 1697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는데 당시 최대 현안은 청나라로부터 세자 책봉을 허가받는 것이었다. 청나라에서는 [대명회전]을 근거로 세자 책봉에 미온적인 입장을 보였으나, 최석정은 [대명회전]에 기재된 것은 중국의 예식과 관계된 것으로 외번()과 종번()의 법 적용에 있어서의 차이점을 제시하였다. 최석정은 세자 책봉을 실현시키고 1697년 9월 6일 숙종에게 보고하였다. 1699년에는 좌의정으로 대제학을 겸임하면서 [국조보감]의 속편 편찬과 [여지승람]의 증보를 건의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1701년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장희빈의 사사()를 반대하다가 충청도 진천에 부처되었다. 석방 후에는 1702년 판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영의정이 되었고, 이후에는 전후 8번에 걸쳐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숙종대 정국의 중심에서 활약했다.

최석정은 숙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국가적 현안의 구석구석에 자신의 손길을 미쳤다. 숙종대는 성리학의 이념을 실천하고 보급하는 측면에서 서원과 사우가 대거 설치되고, 조선시대판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단종에 대한 복권과 추숭 작업이 완성되는 시기였다. 최석정의 문집인 [명곡집] 권 20에는 <단종부알태묘의(>, <단종묘알설위의()>, <장릉복위설과거의()> 등 단종의 추숭에 관계된 기사가 다수 수록되어 있다. 최석정은 노론과 소론,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당쟁의 시대를 살았지만, 기본적으로 온건하고 합리적인 정치 노선을 추구하였기에 국가의 주요 정책을 입안하고 현안을 해결하는 관료로서 큰 역할을 했다.

최석정이 소론의 입지를 지킨 정치가라는 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실록의 졸기()이다. 최석정의 졸기는 [숙종실록]과 [숙종실록보궐정오] 2편에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먼저 노론 세력이 주도하여 편찬한 [숙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최석정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최석정은 성품이 바르지 못하고 공교하며 경솔하고 천박하였으나, 젊어서부터 문명()이 있어 여러 서책을 널리 섭렵했는데, 스스로 경술()에 가장 깊다고 하면서 주자()가 편집한 [경서()]를 취하여 변란시켜 삭제하였으니, 이로써 더욱 사론()에 죄를 짓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번 태사()에 올랐으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 전도되고 망령된 일이 많았으며, 남구만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그의 언론을 조술()하여 명분과 의리를 함부로 전도시켰다. 경인년에 시약()을 삼가지 않았다 하여 엄한 지시를 받았는데, 임금의 총애가 갑자기 쇠미해져서 그 뒤부터는 교외()에 물러가 살다가 졸하니, 나이는 70세이다. 뒤에 시호를 문정()이라 하였다.

그러나 소론이 주도하여 [숙종실록]을 보완한 [숙종실록보궐정오]의 기록은 최석정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판중추부사 최석정이 졸했다. 최석정은 자가 여화()이고, 호가 명곡()인데, 문충공 최명길의 손자이다. 성품이 청명하고 기상이 화락()하고 단아했으며, 총명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어려서 남구만과 박세채를 따라 배웠는데, 이치를 분별하여 깨달아 12세에 이미 [주역]에 통달하여 손으로 그려서 도면을 만드니, 세상에서 신동이라 일컬었다. 구경()과 백가()를 섭렵하여 마치 자기 말을 외듯이 하였는데, 이미 지위가 고귀해지고 늙었으나 오히려 송독()을 그치지 않으니, 경술()ㆍ문장ㆍ언론과 풍유()가 일대 명류의 종주가 되었다. 산수()와 자학()에 이르러서는 은미()한 것까지 모두 수고하지 않고 신묘하게 해득하여 자못 경륜가로서 스스로 기약하였다. 열 번이나 태사()에 올라 당론을 타파하여 인재를 수습하는 데 마음을 두었으며, [대전]을 닦고 밝히는 것을 일삼았다…….

소론의 학맥을 계승하다

 

17세기 후반 조선사회의 사상계는 주자성리학의 원칙에 충실한 노론이 사상계를 주도해가면서 존주론()과 북벌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재야의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비판의식과 함께 원시유학() 및 노장사상에 대한 재조명이 시도되고, 소론의 일부 학자들은 최명길이나 장유의 경우에서처럼 양명학 등 새로운 학문 조류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기였다. 학파로서의 노론과 소론의 분립에 대해서는 노론은 이이에서 김장생, 송시열로 이어지는 흐름을 계승했고, 소론은 성혼의 내외손()을 포섭하면서 성혼(, 1535~1598)을 앞세우는 학파로서의 성격을 드러내는 측면을 지적하는 경우가 많다. 소론의 연원이 되는 성혼 계통의 학풍은 탈주자성리학적인 학풍을 보이며 절충주의적인 경향이 강하였다.

최석정의 사상 형성에서는 성혼의 학맥이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가계()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증조부 최기남(, 1559~1619)은 성혼의 문인으로 광해군 때 이이첨 일파에 의해 축출되기도 하였으나 영의정까지 지냈다. 조부인 최명길은 양명학에도 일정한 관심을 가졌으며, 관제 개혁안 등에 있어서 자신의 적극적인 견해를 제시하면서 인조대의 대표적인 관료로 활약했다. 아버지 최후량()은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최석정은 박세채ㆍ남구만 등 소론 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정치적인 입장에서도 이들과 행로를 같이했다. 아우인 최석항(, 1654~1724) 역시 영의정을 지냈으며, 경종과 영조 연간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된 시기에 소론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아들인 최창대(, 1669~1720) 역시 소론의 입지를 지켰는데, 특히 최석정의 지시를 받아 노론과 소론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소론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명문장을 남겼다.

최석정이 최창대를 시켜 지은 <사창대이서중(使)>에는 ‘노론은 당()을 위주로 의론하여 사류들이 싫어하는 반면에 소론은 모든 일을 당을 초월해서 논의하여 공평하게 처리한다.’고 하였다. 이 글에서 최창대는 노소분립의 발단은 1680년 경신옥(庚申獄)의 처리문제에서 비롯된다고 하였으며, 노론은 집권당으로서 국명()을 얻어 그 기반이 견고하나 그 근본이 협잡으로 계략을 삼은 데 있으며 소론의 본색은 공론과 관평()한 것이라 하여 소론의 정당함을 내세웠다. 이 글은 아들 창대를 시켜서 지은 것이지만, 공론과 관평을 중시하는 소론의 입지에 깊은 자부심을 보인 최석정의 정치관이 피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학, 천문학, 서학 등을 다양하게 수용하다

 

최석정은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양명학에는 가학()의 전통이 이어진 것이 주목된다. 양명학은 명나라 중기에 새로운 시대사조로 등장하여 일세를 풍미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사회에서는 배척되었다. 그러나 양명학에 대한 수용과 보급은 명종대의 심성논쟁()을 통하여 그 수용 기반이 형성되어 남언경이나 홍인우와 같은 양명학자가 나타났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군관 중에 양명학자가 포함된 것도 양명학의 수용에 일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선조말~인조대에는 이항복()ㆍ신흠()ㆍ장유()ㆍ최명길 등이 양명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으로 나타난다. 최명길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압송당하게 되었을 때 아들인 최후량에게 왕양명의 저술을 인용하여 편지를 보내면서 왕양명을 칭송하기도 하였다.

조부의 학풍을 이어 최석정도 양명학에 상당한 조예를 보인 것으로 나타난다. 최석정에 대한 양명학 관계 기록은 양명학을 비판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지만, 왕양명을 양명자()라고 한 점이 주목을 끈다. 또한 최석정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양명학자인 정제두(, 1649~1736)와 꾸준히 서신을 교환하였다. 서신 중에는 최석정 스스로 장유()로 인하여 양명학을 알았고, 그로 인하여 왕양명의 문집과 어록을 읽으면서 경탄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최석정은 예학에도 해박하여 [예기류편()]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기류편]이 주자의 주석과 어긋났다고 하여 불태워진 것을 보면 그의 사상이 당시 사류의 보편적인 흐름과는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석정은 역학과 수학에 있어서도 매우 뛰어났으며 이는 [구수략]의 저술로 이어졌다. 그는 [구수략]을 통해 주역의 괘를 바탕으로 한 상수학적 이해, 마방진 연구, 무한대와 무한소의 개념을 선보이는 등 당대의 수학적 성과를 정리하고 연구했다.

최석정의 학문적 특징으로 또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학문의 범위가 넓다는 점이다. [숙종실록]의 보궐정오 최석정 졸기에는 12세에 이미 [주역]에 통달했음과 함께 산수()와 자학()에 있어서도 매우 뛰어났음을 기술하고 있다. 역학과 수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구수략()]의 저술로 이어졌다. [구수략]은 주역의 괘에 나타난 형상과 변화를 응용하여 이수()에 대한 이해를 하고자 하는 상수학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한 책으로 당시의 수학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구수략]은 갑ㆍ을ㆍ병ㆍ정(부록)의 4편으로 이루어졌다. 갑편은 주로 가감승제()의 4칙에 관한 기본적인 설명, 을편은 이들 기본연산()을 다룬 응용문제, 병편은 개방()ㆍ입방()ㆍ방정() 등에 관해서, 그리고 정편은 문산()ㆍ주산() 등의 새로운 산법 및 마방진()의 연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석정은 천문학에도 자질을 보였는데, [연려실기술]에는 최석정이 성력()을 잘 해독하여, 관상감 교수를 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서학(西)을 일부 수용하고 있음도 나타난다. [구수략]에 인용된 서적의 목록 중 [천학초함()]은 서양 계통의 책이며, [명곡집]의 <우주도설> 등에도 서학(西)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 있는 것이 주목된다.

현실 가능한 정책을 제시한 최고의 정객

 

17세기 중, 후반의 조선사회는 양란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 치유된 상황에서 예론과 북벌론, 호패법, 호포법, 양역변통론, 주전론() 등의 사회정책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간의 정책 대립이 격화되는 시기였다. 특히 당시 가장 쟁점이 되었던 사회문제는 군제()의 개편과 군역의 폐단에 대한 극복 방안이었다. 군제에 대한 최석정의 입장은 진관체제를 기간으로 하는 조선전기 향병 중심 방어책의 기반 위에서 자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최석정은 군문()의 증설로 인해 파생되는 양역제도의 모순을 비판하였다. 1708년에 올린 <진시무사조차()>에서, 최석정은 양역의 폐단으로 이웃이나 친족이 군역을 지게 되는 백골징포()와 인징, 족징의 폐단을 언급하고 ‘혁인족이제민원()’할 것을 주장하였다. 최석정은 이어서 전폐()를 바로 잡아 백성의 곤궁함을 해결할 것을 건의하였다. 전폐의 시행은 ‘부익부빈익빈()’의 구도를 심화시키는 것으로 하루 빨리 혁파해야 한다고 하였다. 최석정은 군역의 방안으로 호포()와 정전()을 시행하는 것에도 반대의 입장에 있었다. 최석정은 호포법의 시행으로 각 호에 변칙적으로 친척들이 들어가는 것을 경계했으며, 정전법 또한 백성의 유망을 촉진시켜 족징의 폐단을 일으키는 점을 우려하였다. 이외에도 숙종대 후반 적극 추진되던 산릉의 역사()에 대해 백성이 기근과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현실에서는 무리라고 판단하여 이를 점차 줄여갈 것을 주장했다.

최석정의 경세관에서 보이는 두드러진 경향은 현실 가능한 정책을 점진적으로 추진하려 한 점이다. 특히 그가 제시한 정책들은 이조판서와 우의정, 좌의정 등 요직을 역임하면서 추진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실무 행정 담당자로서 크게 정책을 구상하고 실무적으로 이를 실천해 간 것이었다.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올린 시폐 10조목에는 당시의 사회경제에 대한 문제점을 제시하고 그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주요한 내용은 직관()의 효율적인 운영, 선거() 제도의 개선, 전결()의 총수 조사와 합리적인 부세() 부과, 필요 없는 군문()의 혁파 등이었다. 대체적으로 최석정의 경세관은 현실가능한 정책부터 점진적으로 이루어가며 사회의 모순점을 해결해 나가는데 중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 17세기 후반 소론의 정치적, 사상적 입장을 대표하는 학자 최석정의 학문 형성의 기반과 학문의 특징, 경세관 등을 살펴보았다. 최석정은 당시의 주류적 흐름이었던 예학이나 존주대의론()과 같은 명분론이나 성리철학의 이론적 심화의 측면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성리학의 실천성 문제에 보다 비중을 두었다. 그리고 성리학을 보완할 수 있는 천문, 수학, 서학 등 다양한 학문 조류에 관심을 가지면서 점진적이고 현실 가능한 사회정책들을 수행해 나갔다.

최석정은 숙종대 소론의 핵심 인물로 10번 이상 정승의 위치에 있으면서 국정을 이끌어갔던 최고의 정객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치적 비중이나 관료로서의 역할에 비해 그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이것은 그의 정치적 기반이 소론이었고, 영조대 이후 노론을 중심으로 정국이 운영된 것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여겨진다. 숙종 후반 10여 차례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국내외 정치 현안의 중심에 섰던 인물 최석정. 최석정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발히 이어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