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정묘호란 안주성 전투의 영웅, 남이흥

히메스타 2016. 7. 7. 14:27

 

일러스트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일찍이 [대동수경()]에서 “안주성()은 살수를 굽어보며 위에는 백상루가 있는데 곧 수나라 군사가 패배한 지점이다. 청천강이란 이름도 있으며 성내에는 안흥관이 있다”고 하여 안주성이 군사적 요충지임을 설명하였다. 안주성이 위치한 안주 지역은 본래 고구려 때 식성군()이었다가, 신라 때는 중반군()이었고, 고려 초기에는 팽원군()이었던 것이 그 후에 안북부()로 되었다. 영주라고도 불렀는데, 조선시대 때 이름을 안주로 고치고 평안도 병마절도사 병영을 설치했다.

안주성은 1627년 1월 14일 후금(뒤의 청나라)의 태종이 3만여 대군을 거느리고 의주를 점령, 물밀듯이 안주ㆍ평양을 거쳐 황주를 점령하는 정묘호란기에 엄청난 피해를 당한 지역이다. 당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을 가고, 인조 이하 신하들은 강화도로 대피하였다. 이후 다행히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큰 화는 면했지만 당시 후금이 침범한 지 7일째인 1월 21일, 안주성 전투에서 끝까지 후금병을 막았던 인물들이 있었다. 그중의 한 사람이 바로 충장공 남이흥(, 1576~1627)이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결심으로 무관이 되다

남이흥은 조선시대 무장으로 본관은 의령(), 자는 토호(), 호는 성은()이며, 시호는 충장()이다. 조상 대대로 무공을 세운 충신 혈통을 이어받은 남이흥은 1576년(선조 9) 7월 27일 한양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외모부터 비범하여 어려서부터 강직한 기질이 남달랐으며 기골이 아주 장대하였다고 전한다.

무장 혈통은 집안 내력이기도 했는데, 특히 8대조 남재(, 1351~1419)는 조선 개국 1등 공신으로 태종 때 대사헌과 영의정을 지내며 문장은 물론, 산술()에도 능한 인물이었다. 남재는 개국 초기에 대사헌을 지내면서 국가의 기틀을 잡는 브레인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문관임에도 불구하고 변방의 방위체제에 관심이 많았다. 남이흥의 부친인 남유(, ?~1598)는 나주목사 겸 좌영장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는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과 더불어 왜군을 섬멸하는 공훈을 세우고 적탄에 맞아 전사한 인물이다. 모친인 전주 유씨는 대사간 유헌()의 증손녀로, 부친은 형조판서 유훈()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은 남이흥의 나이 17세 되던 해였다. 그 당시 부친은 부평부사로 재직 중이어서 남이흥을 비롯한 가족들은 본가인 서울을 떠나 부평에 있었다. 부친이 왜적들과 교전을 하는 사이, 남이흥은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 집안 물건들을 챙겨 다시 부평으로 향했는데, 도중에 피난민과 함께 도적떼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남이흥이 대범하게 말을 달려 앞으로 나가 도적떼를 호통쳐 물리쳤다는 일화가 전한다.

명문의 문반 가문 출신의 남이흥은 무관이 되려 했는데, 그의 나이 23세 되던 해인 1598년에 부친 남유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부친이 전사하자 남이흥은 글공부를 중단하고 부친의 원수를 갚겠다는 굳은 결심 속에 무술을 연마하기 시작하였으며, 27세 되던 해인 1602년에 무과에 지원하여 급제하였다. 29세에는 장연현감으로 부임하여 그 이전부터 있어왔던 학정을 뿌리 뽑고 간교한 아전들을 엄히 다스려 현민들이 태평성세를 누릴 수 있도록 하였다.

32세에 비변랑이 되고, 33세에는 의주판관을 제수받아 3년간 재임하였는데, 그 기간 동안 변방의 적폐를 일소하여 인심을 얻기도 하였다. 이후 36세에 이항복(, 1566~1618)의 휘하에 들어가기도 하였고 부령부사를 제수받았다. 부령부사 재직 시절에는 병기를 정비하고 군량을 비축하여 부령진이 6진 가운데서 가장 튼튼한 진에 되게 만들었다. 이 사실도 암행어사의 장계를 통해 광해군에게 전달되어 승진, 통정대부에 이르렀으나 불행하게도 화상을 입어 사직하였다.

39세에는 부령부사 재임 시절의 치적과 외적 소탕의 공이 인정되어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군기시(: 병기()의 제조를 관장한 관청) 제조를 제수받았다. 47세(1615, 광해 7)에는 공홍병마절도사를 제수받았는데, 재임 중에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잡아 칭송을 받았다.

진주목사 시절 진주성을 복원하다

진주성 북장대().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이 장대는 진주성 서북쪽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있으며, 서쪽과 북쪽 일대를 한 눈에 내다볼 수 있는 요충지대로,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성안과 외성에 주둔한 병사까지 지휘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손상된 것을 병마절도사 남이흥이 새롭게 고쳐 지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남이흥은 1617년(광해 9), 그의 나이 42세 때 진주목사가 되었다. 그가 재임 기간 동안 촉석루로 널리 알려진 진주성을 지금의 모습대로 중수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진주성은 1605년(선조 38) 병사 이수일이 진을 성내로 옮기고 성이 너무 넓어 수비가 곤란하다 하여 내성을 구축하게 되었는데, 남이흥이 진주목사로 제수받은 지 1년 뒤에 임진왜란 때 불탄 촉석루, 북장대, 서장대, 동장대 등을 중건하였다. 그 외에도 진주 북쪽 비봉산에 있는 의곡사 또한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자 승려 성간()에게 다시 복원하도록 지시하는 등 진주목사로 있는 동안 남다른 치적을 쌓았다.

광해군의 신임과 이괄의 난 진압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전 남이흥은 안주목사로 재직 중이었는데, 이 시기에 중국 사신이 안주에 들리게 되었다. 사신이 오자 남이흥은 이들을 정성스럽게 접대하였고 이에 감복한 사신은 그를 칭찬하며 표창까지 내렸다. 그러나 이 일을 두고 남이흥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중국 사신에게 잘 보이려 했다며 탄핵을 받았다.

남이흥 장군 영정. 남이흥 장군 묘역 근처의 유물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그런데 남이흥이 탄핵을 받자, 당시 왕이었던 광해군은 오히려 안주목사로서 선정을 베풀었다며 그를 두둔하고 품계를 자헌대부로 올려주었다. 당시 안주에 들린 중국 사신은 조선을 감시하기 위해 온 중국 감군()이었고, 남이흥이 이들을 후대하게 접대하여 환심을 산 것은 조선에 대한 명의 의심을 풀기 위한 행위였다. 따라서 광해군이 끝까지 남이흥을 두둔한 것도 자신의 외교적 입장과 남이흥의 처신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남이흥은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바람 앞의 등불같은 신세가 되었다. 인조반정 공신들의 미움을 받던 남이흥은 1624년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좌천되어 자신의 인품과 능력을 인정한 도원수 장만(, 1566~1629)의 휘하에 들어갔다.

1624년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남이흥은 도원수 장만의 지휘 아래 군사를 이끌고 무공을 세웠다. 그는 특히 이괄의 부하 류순무, 이신, 이윤서를 회유해 많은 반군을 귀순하게 했다. 처음, 관군은 반란군에 밀려 한양까지 위험에 빠지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때 원수 장만이 도성을 포위하여 이괄의 군대를 곤경에 빠뜨린 뒤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충신은 장만의 계략이 지리적으로 유리한 안현에 올라가 진을 치고 위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공격하는 것만 못하다 하여 반대하였다. 장만과 정충신의 의견이 팽팽히 대립하던 순간, 남이흥이 정충신의 주장에 동조해 작전을 수행했고, 이로써 그간의 대세를 완전히 뒤집고 대승, 반란군을 진압하는 최고의 공을 세웠다.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공을 세우자 인조는 특명으로 남이흥을 연안부사에 임명하였고, 남이흥은 이후 진무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의춘군()에 봉해졌다.

안주성 전투와 장렬한 죽음

광해군대에는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 정책을 취하여 중국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후금과의 충돌이 없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중립 정책을 버리고 친명() 반후금() 정책을 천명, 후금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후금에게 밀려내려와 가도()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 무장 모문룡()을 적극 지원하였다.

1627년 1월 8일, 후금 태종 홍타시는 기병 3만 6천 명을 동원하여 아민을 총대장으로 하는 조선 정벌군을 편성하여 수도 심양을 출발했다. 그러부터 5일 후인 1월 12일, 후금군은 조선 국경의 관문인 의주 북쪽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승애도, 막사도, 어적도, 구리도, 송도 등에 병력을 집결하였다.

정묘호란 이 발발한 1627년, 변방에 있던 영변부사 남이흥은 후금군이 쳐들어 온다는 급보를 듣고 주저없이 곧바로 안주로 달려가 군비를 정돈하고 고을 사람들을 모두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등 방비 태세를 갖추었다.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임진왜란 때 무너진 성곽과 방어 시설 중수에 몸을 바친 그였지만, 최후의 전투지였던 안주성 전투를 앞두고서는 준비 기간이 너무나 짧았다. 후금군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성을 포위하자 남이흥은 부하들에게 성 위로 올라가 깃발을 휘두르며 군악을 울리게 하고, 성문들을 모두 닫아걸고 돌과 모래를 산처럼 쌓아올려 성문을 굳게 막았다.

전투에 앞서 후금군은 남이흥의 투항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남이흥은 장군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내가 나라의 명을 받고 변경을 지키는 것은 바로 너희와 같은 오랑캐를 무찌르게 하려 함이요, 오직 장군의 영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영위만을 가진 것으로 그친다면 그 어찌 나라의 뜻을 받드는 올바른 신하라 할 수 있겠느냐? 나에게는 다만 너희들의 오랑캐를 섬멸하는 일만이 있을 뿐이요, 그것만이 영광되고 흔쾌한 일이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싸움에서 죽는다면 그 또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는 영광된 죽음이 아니겠는가?”

결국 중과부적(: 적은 수효로 많은 수효를 대적하지 못함)으로 패배가 짙어지자 남이흥은 중영을 지키던 김준과 함께 화약고에 불을 질러 분사하였다. 당시 귀성도호부사 전상의가 “병기나 화약을 불지르면 적의 세력만 증강하는 일이요, 우리에게 유익할 바가 하나도 없다”며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이흥과 김준이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장렬하게 순절한 것은 칼과 활이 없어 자결하지 못한 이유에서가 아니며, 화약고가 후금군에게 넘어가는 것마저도 막으려는 현실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남이흥 장군 묘. 본래의 묘는 경기도 광주에 있었으나 성남시가 개발되면서 1971년 충남 당진시로 옮겼다. 장군과 부인 하동 정씨, 장군의 아버지 남유의 묘가 한 자리에 모셔져 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남이흥의 사후에 그의 충절을 기린 사당 충민사()가 안주에 세워졌으나, 오늘날 안주가 북한 땅에 있는 관계로 가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안주가 가보기 힘든 곳이기 때문인지, 안주성에서 장렬히 순절한 남이흥의 충절도 오늘날 그다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52세로 순절한 남이흥은 경기도 광주군 치남 음촌리(현재 성남시 태평동)에 묻혔다. 세월이 흘러 남이흥의 묘는 성남시 개발과 함께 1971년 3월 1일에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의 충장사 옆으로 이장되었다. 1981년 모충관 건립과 함께 1984년에는 충장공 묘역 일원이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기념물 52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