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고려에 귀화한 송나라의 학자, 채인범

히메스타 2016. 7. 8. 10:11

 

일러스트

송나라 출신의 문신 채인범(, 934〜998)은 970년 사신으로 왔다가 고려에 귀화하여 상서예부시랑까지 오른 인물이다. 과거제도 실시를 건의한 후주() 출신의 쌍기(, ?~?)와 더불어 대표적인 귀화인인 그는 왜 고려에 귀화하였고, 고려는 귀화인을 어떻게 대접했던 것일까. 채인범을 통해 고려 사회의 귀화 정책 및 그가 남긴 문화적 유산에 대해 살펴보자.

묘지명을 통해 밝혀진 인물

채인범은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 등 고려시대를 기록한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 하지만 1024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묘지명()인 그의 묘지명이 발견됨으로써 그의 생애가 알려지게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채인범 묘지명은 묘지석 전반부의 윗부분 일부가 깨어져나갔기 때문에, 완전한 해석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무덤 속에 있었던 묘지명인 만큼 손상되지 않은 부분의 글자는 쉽게 판독되어 그의 생애를 알게 해준다.

묘지명에 따르면, 그는 송나라의 강남 땅 천주() 출신이다. 천주는 오늘날 푸젠성(복건성, ) 동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당나라 때부터 송ㆍ원 시기에 이르기까지 국제적인 교역 도시로 번성했던 곳이다.

이곳은 신라시대 신라인들도 자주 출입했던 곳인데, 924년 신라 말기 진주ㆍ의령 일대의 대호족인 왕봉규(, ?~?)는 후당()과 사신 왕래를 하면서 천주절도사(使)라고 했다. 천주를 통해 왕래한 까닭에 후당으로부터 천주절도사란 직함을 받았던 모양이다. 928년에는 신라의 승려 홍경(, ?~?)이 천주를 출발해 대장경 1부를 싣고 예성강에 도착하여 고려 태조에게 바친 일도 있었다. 이처럼 10세기 초 신라와 고려 사람들이 자주 천주를 찾은 탓에, 이곳 출신인 채인범도 고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고려에 귀화해 관리로 일하다

그는 37세가 되던 970년 송나라의 지례사(使: 사신)를 따라 고려에 왔다. 그는 광종(, 재위: 950〜975)을 찾아뵈었는데, 광종은 그를 곁에 머무르게 하고 예빈성낭중()에 임명했다. 그가 사신으로 고려에 오자마자 광종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벼슬을 주고 귀화시킨 것은, 이미 채인범이 사신으로 오기 전부터 귀화하려는 의지가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고려 제4대 왕 광종은 강력한 호족 세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학문적 소양을 가진 관리들을 적극 발탁해, 자신에게 충성하는 새로운 관료 집단을 만들려고 했다. 광종은 956년 후주의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쌍기를 만난 후 그의 재주를 아껴, 후주에 사신을 보내 그를 고려의 관리로 삼겠다고 요청하고 쌍기를 귀화시켰다. 쌍기는 후주에서 무승군절도순관(), 시대리평사() 등의 벼슬을 지낸 현직 관리였다. 광종은 그에게 원보(, 정4품) 한림학사()란 벼슬을 주었다.

쌍기는 958년 고려에 과거제도 실시를 건의하여 이를 시행하게 했다. 귀화한 지 1년도 안 되어 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고려 학술계의 권력을 장악한 그는 과거제도의 실시로 고려의 학문을 진흥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가 고려에서 고위직에 올랐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학문적 능력을 갖춘 중국인들이 자발적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출세를 하고자 했다. 채인범도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고려 사회는 그를 어떻게 우대했나

그의 묘지명에는 그가 경전()과 역사에 널리 통달하고 문장을 잘 지어 임금을 보좌한, 큰 재주를 가진 대학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채인범의 자식들이 그를 높이기 위한 표현일지라도, 그가 학자였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경제력이 아닌, 학문이 나라의 수준을 평가하는 주요 잣대였다. 그중에서도 광종은 고려의 학문 수준을 중국과 비견될 만큼 끌어올리기 위해 학자들을 적극 등용한 임금이었다. 광종은 채인범의 학식을 높이 사, 그에게 주택 한 채와 노비, 토지 및 생활에 필요한 여러 물품들을 지급해주었다.

그가 일하게 된 예빈성은 고려 전기에 외국의 손님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일을 맡아보던 곳으로, 당시 외교 관계에서 필요한 예법과 관련된 일을 맡거나 공문서 작성 등이 그가 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정 5품의 고위 관직인 낭중에 임명되었는데, 후주 임금의 허락까지 받고 스카우트한 쌍기의 첫 관직과 비교해봤을 때 결코 나쁜 대접은 아니었다. 요즘 기업들이 해외의 고급 인재를 스카우트할 때와 마찬가지로, 채인범 역시 고려에 높은 값에 스카우트된 것이었다.

그의 관직 생활은 순조로워 성종(, 재위: 960〜997) 때에는 상서예부시랑(, 정4품)이 되었다. 목종(, 재위:997〜1009) 시기에도 임금의 총애를 받다가, 998년 65세의 나이로 집에서 사망했다. 그러자 목종은 그를 예부상서(, 정3품)로 추증하고, 장례비도 후하게 내주었다. 뿐만 아니라 채인범은 1009년에 상서우복야(, 정2품)에 추증되기도 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 높은 벼슬에 추증된 것은 그의 자식들이 고위 관리로 일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에서 번영한 그의 가족들

쌍기의 경우는 그의 아버지 쌍철이 고려에서 좌승(, 종3품)이란 벼슬을 받았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의 자식들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반면 채인범은 1024년 개성 법운산() 동쪽 기슭으로 26년 만에 그의 무덤을 옮겨 쓰면서 자식들이 그의 묘지명()을 만들었기 때문에 자식들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전한다.

채인범은 고려에서 최씨와 결혼해 아들 한 명을 두었으나, 최씨가 먼저 사망한 탓에, 다시 장씨와 결혼해 3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의 첫째 아들은 종2품 관직인 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감수국사( )에 달하는 고위직을 역임했다. 이름은 비문에 등장하지 않지만, 목종과 현종(, 재위: 1009〜1031) 시기에 이와 같은 고위직을 가진 인물로 채충순(, ?〜1036)이 있다. [고려사] 〈채충순 열전〉에는 그의 선조대 기록을 잃어버렸다고 하였지만, 그가 채인범의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채충순은 1009년 김치양()이 천추태후()와 사통해 얻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역모 사건에서 그들의 편에 서지 않고, 대량원군()을 현종으로 만드는 데 공을 세우는 등, 현종 재위 시기에 정치적 비중이 큰 인물이었다.

장씨가 낳은 첫째 아들은 합문지후(: 조회, 의례 등 국가 의식을 맡아보던 합문 소속의 정7품 관직), 둘째는 군기주부(簿: 군기감 속의 6〜8품 관직)가 되었고, 셋째는 출가하여 불주사(: 개경 인근의 사찰)의 덕망 높은 승려가 되었다. 또 딸도 두 명이나 있었다.

채인범의 묘지석, 고려에 유행을 만들다

1024년에 만들어진 채인범 묘지명. 107.0x73.0x10.5cm의 크기로 현존하는 고려 묘지명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1024년에 만들어진 그의 묘지명은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현존하는 고려 묘지명 중 가장 오래되고 큰 것이다. 고구려의 안악3호분(357년)과 백제 무령왕릉(523년, 526년)에서도 묘지명이 발견되었지만, 묘지석이 가장 유행한 것은 고려 시대였다.

묘지명은 죽은 자의 시신과 함께 무덤에 매장되었다는 점에서 무덤 앞 지상에 세운 묘비명()과 다르다. 고려 시대에는 묘비명을 세우려면 왕의 허락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것은 67점에 불과하고 대부분 고승()들의 것이다.

하지만 묘지명은 약 320점 정도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현재 남아 있는 묘지명 가운데 일반 주민과 지방 세력의 것은 전혀 없고, 개경에 사는 지배층들만이 묘지명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묘지명을 무덤에 함께 매장하는 문화는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려에서 두 번째 오래된 묘지명도 1045년에 제작된 유지성(, 972~1039)의 것으로, 그 역시 송나라 양주 출신으로 고려에서 재상까지 역임한 귀화인이었다. 채인범 가족을 비롯한 송나라 출신 귀화인들이 고려 왕실과 귀족들의 장례 문화에 변화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채인범을 통해 본 고려 사회

[고려사절요()]에는 919년 오월() 사람 추언규()의 내투(: 와서 항복함)를 시작으로, 총 45회 158명의 중국에서 건너온 한인() 귀화 사례가 등장한다. 물론 채인범의 경우처럼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고려는 한인들뿐만 아니라, 발해, 거란, 여진, 위구르, 베트남, 유구국 등 주변의 여러 나라 사람들을 적극 수용했다. 관리뿐만 아니라, 상인, 음악인, 승려, 역관, 의술, 점성술, 장인() 등 다양한 재능을 가진 자들이 귀화해 고려의 문물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1052년 문종(, 재위: 10467〜1083)은 송나라 출신 장정()이 귀화하자, “타산()의 돌이라도 나에게는 쓸모가 있는 것이다”라며 인재를 얻은 기쁨을 표현했다. 고려와 이웃한 송나라의 역사인 [송사()]의 〈고려전〉에는 “고려 수도에는 중국인 수백 명이 있다. 민(: 천주를 포함한 푸젠성) 지역 사람이 많은데, 상선을 타고 왔다. 고려는 그들의 재능을 시험하여, 회유하여 관리로 삼거나 강제로 평생 머물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가 당시 세계 최고 선진국이었던 송나라의 문물 수준을 따라잡기 위해 그들의 인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던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고려가 문화대국으로 성장한 비결은 이처럼 적극적인 인재 수용에 있었다.

성공적인 고려의 귀화 정책

고려는 귀화인들에게 벼슬, 투화전() 등의 땅, 집과 옷 등을 제공하고, 호적을 주는 등 고려에서 살아갈 수 있는 생활의 기반을 마련해주는 정책을 실시했다. 귀화인 우대 정책 탓에 고려의 인구가 늘고, 유능한 인재가 모여들었다.

이러한 정책을 실시한 데에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따라서 기존 권력층에서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광종이 쌍기, 채인범 등을 관리로 등용하고 집을 주고 혼인도 시켜주자, 재상인 서필(, 901~965)은 자신의 집을 반납하면서까지 귀화인 우대 정책에 반발하기도 했고, 이제현(, 1287~1367)은 쌍기가 호족들을 제압하기 위해 광종이 형벌을 마구 쓴 것을 막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귀화 정책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1081년 문종은 “고려에 온 귀화인 가운데 재주와 기예()를 갖지 않는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고려의 귀화인 정책은 고려 발전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의 산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