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독서록

슬픈 궁예를 읽고

히메스타 2010. 7. 8. 10:33

“궁예”하면 나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KBS 사극 태조왕건의 한 주인공으로서 외꾸눈을 가진 아주 포악하고 험상궂은 인물로 우선 각인되어 있고, 중․고교시절에  국사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전해들은 궁예 역시 정신분열 증세를 가진 정신이상자로서 백성을 잘못 다스려 후고구려가 고려 왕건에 의하여 통일되었다는 이야기가 고작이었는데 이재범 교수가 지은 “슬픈 궁예”는 궁예의 탄생에서부터 궁예가 세인들에게 포악한 인물로 기억된 부분을 역사적 반증자료를 제시하며 역사 바로세우기에 노력한 흔적이 역역한 그런 책이었다.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서술되기에 패자인 궁예는 승자의 들러리로 잔악 무도하게 서술되었고, 특히 궁예의 탄생과 관련한 부문에서 "궁예는 태어나면서부터 이가 났다" 라는 기록을 궁예가 탄생시부터 나쁜 품성을 타고난 것으로 사대주의자인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말하고 있지만 이재범 교수는 이는 사실과 다르며 궁예는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비범한 사람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궁예가 왕의 권좌까지 올랐지만 역사의 패자로 등장함에 따라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조차도 알 수 없도록 역사가들은 궁예를 철저히 외면하는 등 철저히 승자의 편에서 저술된 우리의 역사가 얼마나 빈약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궁예가 태어날 무렵에는 통일신라 하대에 속하는 시기로 왕위쟁탈전의 희생자로서 자기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중도 아닌 속인도 아닌 수도승으로 세달사에 들어가 수도할 수밖에 없었고 대호족  양길의 휘하에 들어가 신라왕의 초상(아버지 경문왕)을 칼로 베고 그 일로 악몽을 꾸는 등 훗날 광인으로 자리 잡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그런 행동을 하게 된 동기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자구책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궁예는 초기 정권을 잡았을 때 온 세상 사람이 사람같이 사는 즉 미륵의 세계를 꿈꾸며 국호를 마진, 태봉 등으로 바꾸면서 삼국 중 고구려 중심의 집권에서 삼국을 융화하려는 포괄적인 정책으로 전향하자 이에 기득권의 상실을 우려한 고구려 호족들이 이탈하자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즉, 포악한 정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왕건가는 고구려 호족의 가장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속에서도 궁예는 천년동안 지속되어온 신라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노력했으며 신분보다는 능력을 우선하고자 했던 현대판 CEO였다고 볼 수 있다. 궁예는 지역주의를 탈피한 통일을 갈구했으며 마진과 태봉으로 상징되는 이상 사회로의 통합을 추진했던 인물이다.


궁예 정권의 몰락은 궁예가 폭정을 일삼아서가 아니라 왕건의 계획적인 야심에 의한 모반에 의한 것으로 이는 왕건의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한 역사가들의 헛된 거짓에 불과한 것이다.


역사는 승자만을 기억한다.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을지라도 말년이 성공적이지 못한 이들은 그로 인해 모든 업적이 낮게 평가된다. 그리고 때로는 단순한 낮춤의 수준을 넘어선 의도적인 폄하에 의하여 전혀 다른 인물로 각색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역사는 그 역사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인 하에서 평가되어져야 할 듯 싶다.


그와 동시에 그들에 대한 평가도 다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역사는 업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에 우선한 옳고 그름의 시비가 존재하는 듯 하다. 그에 따라 한 사람은 어떠한 단점도 지니지 않은 고결한 존재로 부각되는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너무도 추한 존재로 묘사된다. 궁예는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를 평가하는 역사서들의 대다수는 왕건의 고려 건국 정당성 확보라는 과업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의도적으로 그를 폄하한 듯해 보였다.


이러한 평가에 기초하여, 말년 과대 망상, 정신분열증 등에 시달렸으며 잔혹하기 이를 데 없이 백성들을 죽여나간 폭군으로서 궁예는 지금껏 평가되어 왔다. 그의 에꾸눈은 이러한 그의 성품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점지되어 있었던 것임을 증명하는 수단처럼 여겨졌었다.


궁예에 대한 기록 중 온전히 남아있는 것이 존재치 않으며, 대다수의 기록들이 왕건 통치의 정당성에 입각해 서술되어졌기에 예전의 모습을 재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작가는 몇 안 되는 자료들을 모아 궁예, 그리고 그가 살았던 대혼란기에 대해 조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조명은 첫 단추 끼우는 작업부터 난관에 봉착한 듯 했다. 궁예의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다양한 논쟁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접해 본적이 없는 것이었기에 너무도 흥미로웠다. 반신라적인 성향을 띤 인물로서만 여겨왔던 그가 신라 왕의 후예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 장보고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 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웠다.


궁예는 스스로 왕으로 칭하기보다는 주변인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것에 가까웠다. 권력을 혼자 독점하고 상대에게 군림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의 스타일은 절대 군주만 존재했을 것 같은 그 시절에 대한 나의 착각을 깨뜨렸다. 수많은 이들이 문제시 삼았던 말년의 그의 모습에 대한 조명 역시도 새로웠다. 그 스스로 미륵으로 칭하고, 자신의 가족들을 보살로 여긴 것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정황으로 보았을 때 그가 미쳤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쓸 수는 없을 듯 했다.

우리는 그가 세력다툼에서 실패했음을 알고 있으며, 그 과정에 대해서는 그다지 크게 기억하지 않는다. 그와 관계된 대다수의 것들의 대다수는 지난 역사 속에서 파괴되었으며, 그나마 남아있는 것들마저도 분단된 우리의 또 다른 국토에 존재하기에 지금으로서는 그에 대해 재조명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진실은 언제나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이었으며,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러한 법칙은 궁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지금 그는 그가 기세를 떨쳤던 땅에 살고 있는 우리 세대가 다시금 그에 대해 평가해주길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모든 이들은 승자의 편에서 역사를 저술할 것이 아니라 승자와 패자의 어느 쪽에도 기울어짐이 없이 공정한 입장에서 역사기록을 남겨 다시는 이와 같은 부끄러운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개인적인 입장에서 희망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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