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선율

슈트라우스,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히메스타 2018. 5. 3. 14:13

안젤리카 카우프만,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출처: Web Gallery of Art>

그리스 신화 속에는 명예와 성취를 위해 목숨을 거는 남자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그들의 조력자 가운데는 사랑에 빠진 여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여자는 남자의 의지력과 도전정신에 매료되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단순히 외모에 반했는지도 모른다. 통치권을 되돌려 줄 황금 양피를 이아손에게 가져다준 메데이아가 그랬고, 테세우스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뒤 미로를 다시 빠져나올 수 있도록 그에게 명주실 타래를 쥐여준 아리아드네가 그랬다.

그러나 영웅들은 곧 고마움을 잊었다. 이아손은 정치적 계산에서 메데이아를 버리고 새 여자와 결혼하려 했고, 테세우스는 아테네로 돌아가는 길에 낙소스 섬에 들렀다가 아리아드네를 그곳에 버려두고 떠났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에게 치명적인 복수를 하고 도망갔지만, 아리아드네는 버림받은 채 탄식하고 있다가 오히려 행운을 얻었다. 포도주의 신 바쿠스(디오니소스)가 그 섬에서 아리아드네를 발견하고 사랑에 빠져 새로운 세계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아리아드네에게 절망과 비탄의 섬이었던 낙소스는 바쿠스의 출현으로 열락의 섬이 되었다.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는 [살로메]와 [엘렉트라] 같은 파격적인 실험 오페라와 [장미의 기사] 같은 우아하고 유머 깃든 복고풍 오페라로 큰 성공을 거친 뒤, 신화와 현실을 극 속에서 혼합한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를 1912년에 슈투트가르트 궁정극장에서 초연했다. 오페라 [엘렉트라]와 [장미의 기사]로 이미 호흡을 맞춘 대본작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 1876-1929)과의 공동작업이었다.

호프만스탈과 슈트라우스 <출처: Wikipedia>

원래 슈트라우스는 [아리아드네]를 소규모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30분짜리 소품으로 기획했고, 그보다 먼저 정식 오페라로 [그림자 없는 여인(Die Frau ohne Schatten)]을 작곡하려 했다. 그러나 호프만스탈은 아직 [그림자 없는 여인] 대본을 작업할 준비가 안 되었고 [아리아드네]라면 바로 작업할 수 있다고 슈트라우스에게 알렸다. 그래서 두 사람은 언어와 춤과 음악이 결합했던 ‘바로크 시대 종합예술작품’을 20세기에 다시 재현해보기로 했고, 그런 취지로 탄생한 작품이 바로 수많은 바로크 시대 오페라 작품들처럼 그리스 신화에서 소재를 가져온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였다.

호프만스탈은 몰리에르의 희곡 [평민귀족(Le Bourgeois Gentilhomme)](1670년)을 토대로 이 오페라의 독일어 대본을 썼다. 몰리에르의 작품에서는 교양 없고 돈 많은 부르주아 주르댕이 귀족 사회에 속하고 싶은 열망으로 예술을 배우려 애쓰는 과정이 희극적으로 전개된다.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에서는 모차르트 시대인 18세기 말이 배경이며, 역시 어느 부자의 저택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이 오페라의 개정판은 1916년 빈 왕립오페라극장에서 선보였는데, 오늘날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되는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는 거의 모두 이 개정판이다.

감성적 비극을 뛰어넘는 이성적 희극의 승리

에밀리 매기(아리아드네 역)와 요나스 카우프만(바쿠스 역). 2012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출처: Wikipedia>

이 오페라는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어느 부자의 저택에서 작곡가(Der Komponist. 소프라노 또는 메조소프라노)와 가수들이 오페라 [아리아드네]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데, 집사(Der Haushofmeister. 노래하지 않고 말만 하는 대사역)가 나타나 집주인의 뜻을 작곡가의 스승이자 음악감독인 음악선생(Ein Musiklehrer. 바리톤)에게 전한다. 비극 오페라 때문에 연회에 초대받은 손님들이 침울해져서는 안 되니, 공연이 끝나자마자 뒤이어 이탈리아 전통 희극인 코메디아 델라르테를 공연하라는 지시였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젊은 작곡가는 숭고하고 진지한 자기 작품이 우스꽝스러워진다며 길길이 뛴다. 공연을 당장 집어치우려는 작곡가에게 그의 스승이며 그를 이 집에 데려온 음악선생은 '이 공연으로 받는 돈이 작곡가에게는 반 년 간의 생계비'임을 일깨우며 참으라고 말린다.

그러나 집사가 거들먹거리며 다시 나타나, 집주인이 마음을 또 바꾸었다고 알린다. 화려한 불꽃놀이가 제시간에 시작될 수 있도록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아예 아리아드네의 비극과 코미디를 한 무대에서 동시에 공연하라는 것. 젊은 작곡가는 예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돈으로 예술가를 사고 부리는 부자 집주인의 무지한 횡포에 분노하며, 이제야말로 공연을 그만두고 떠나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곡가는 웃기는 즉흥극을 공연하려고 코메디아 델라르테 단원들과 함께 이 집에 온 희극 여배우 체르비네타(Zerbinetta. 소프라노)의 상냥하고 매혹적인 태도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어, 무엇에 홀린 듯 집주인의 지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체르비네타에게 홀렸던 작곡가가 제정신이 들어 다시 저항하려는 순간, 벌써 손님들은 모여들고 오페라는 막이 오른다.

에블린 드 모건,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1877년, 캔버스에 유채 <출처: Wikipedia>

본극은 젊은 작곡가의 오페라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공연으로 이루어진다. 자신이 구해주었던 연인 테세우스에게서 버림받고 황무지 외딴 섬에서 눈물로 날을 지새는 그리스 신화 속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Ariadne)가 등장한다. 아리아드네는 프롤로그 부분에서는 ‘프리마돈나’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유명 소프라노 가수다. 님프인 나야드(Najade. 소프라노), 드리야드(Dryade. 알토 또는 메조소프라노), 에코(Echo. 소프라노)가 그녀를 위로하고 있다.

그런데 아리아드네의 절망과 탄식이 온 섬에 울려 퍼지는 진지하고 비극적인 장면에서 느닷없이 희극배우들이 등장해 오페라 내용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즉흥극을 펼친다.

이렇게 해서 젊은 작곡가의 본래 작곡 취지는 실종되고, 첫사랑에 실패한 고귀한 공주 아리아드네와 세상 물정에 밝은 연애의 고수() 체르비네타가 한 무대에서 대결하게 된다. 극중 희극에서 네 명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구애를 받는 발랄하고 요염한 체르비네타는 아리아드네를 위로하며 '남자들한테 실망하는 건 나도 많이 해봤지만, 대체 뭐가 문제야? 새 남자를 찾아 인생을 즐기면 되지. 어느 남자에게서나 내가 빠져들 신성()을 발견할 수 있는 법이니까'라는 나름의 철학을 아리아 ‘고귀하신 공주님’으로 강의하는데, ‘사랑은 생애에 단 한 번’이라고 믿고 절망에 빠진 아리아드네에게는 이런 철학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희극배우들이 체르비네타를 둘러싸고 한바탕 소동을 벌인 뒤에도 아리아드네는 깊은 배신감과 절망에 빠져 오로지 죽음만을 원한다. 그때 키르케의 마법에 빠질 뻔했던 바쿠스 신(Bacchus. 테너)이 낙소스 섬에 찾아오고, 그를 죽음의 전령이라고 생각한 아리아드네는 스스로 바쿠스의 품에 자신을 맡긴다. 둘이 키스하는 순간 바쿠스 신은 미성숙한 상태를 벗어나 완벽한 신성()에 다다르고 아리아드네는 새로운 삶의 희열을 깨닫는다. 바쿠스와 아리아드네가 황홀경에 빠져 이중창을 노래하며 신들의 세계로 날아갈 때, 이를 지켜보고 있던 체르비네타는 "새로운 신이 나타나면 우리는 넋을 잃고 자신을 맡기는 법이지"라며 이들의 열정을 조소한다.

희극배우들이 아리아드네(안네 슈바네빌름스)를 격려하고 있다. <출처: Wikipedia>

오페라 세리아, 후기 낭만주의, 현대음악의 혼합

독일 슈투트가르트 오페라 극장. <출처: Wikipedia>

슈투트가르트에서 [아리아드네]가 초연되었을 때의 공연 형태는 1부 [평민귀족], 2부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로, 1부는 연극에 노래와 발레를 부분적으로 가미한 형식이었고, 2부는 ‘평민귀족’인 부자 주르댕의 집에서 공연되는 것으로 설정된 본격 오페라였다. 그러나 슈트라우스가 애당초 생각했던 ‘30분’은 이런 다양한 형식의 복합으로 인해 엄청나게 길어졌고, 관객은 연극도 오페라도 아닌 이 독특한 형식의 작품에 그리 열광하지 않았다. 그러자 슈트라우스와 호프만스탈은 1부의 ‘평민귀족’을 아예 빼버리고 ‘프롤로그’라는 제목으로 성악의 비중이 커진 다른 극을 만들어 넣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오페라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다.

이 오페라에서 슈트라우스는 독특한 음악적 복합성을 보여준다. 1911년에 초연한 [장미의 기사]의 성공에 용기를 얻어 전작과 마찬가지로 18세기 모차르트 풍의 오페라 세리아 스타일을 사용했고, 여기에 후기 낭만주의 음악과 20세기 음악어법을 혼합해 다시 한 번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초연한 슈투트가르트 극장 오케스트라 피트가 작아 36명이 연주하는 소규모 오케스트라를 쓸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바로크 오페라를 재현한다는 원래의 취지에 합당한 조건이었다.

장 앙투안 와토의 [피에로 질].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희극 배우를 그린 그림.미술 작품 보러가기

체르비네타가 아리아드네를 향해 부르는 아리아 ‘고귀하신 공주님’은 고난도 콜로라투라 아리아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곡으로 손꼽히고 있어 온 세상의 탁월한 소프라노 가수들에게 도전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곡이다. 에르나 베르거, 리타 슈트라이히, 에디타 그루베로바, 나탈리 드세 등이 최고의 체르비네타로 불린다. 죽음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순수한 나라’를 열창하는 아리아드네 역도 결코 수월하지 않아, 로테 레만,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군둘라 야노비츠, 제시 노먼 등 걸출한 소프라노 가수들이 이 역으로 명성을 날렸다.

호프만스탈이 이 오페라에서 보여준 주제는 ‘대조적인 두 인생관의 혼합과 희극의 승리’였다. 작곡가와 아리아드네, 그리고 님프들이 속한 아리아드네 진영은 비극을 대표하며,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등장인물인 알레키노, 스카라무초, 트루팔디노, 브리겔라와 함께 구성된 체르비네타 진영은 희극을 대표한다.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는 16세기에 베네치아에서 탄생한 연극 형식으로, 확고한 대본이 갖춰지지 않은 채 전체적인 플롯을 요약해놓은 정도의 대본에 따라 극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배우들은 공연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대화를 만들어내며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