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선율

안토니오 살리에리 - 모차르트의 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다.

히메스타 2017. 12. 26. 11:04


모차르트! 내가 모차르트를 죽였다!” 마차 바퀴가 급박하게 구른다. 날로 쇠약해 가는 모차르트를 위협하는 검은 가면의 사나이.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1984)’다.

영화에는 평범한 재능 밖에 갖지 못한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질투에 사로잡혀 ‘천재’ 모차르트를 죽인 것으로 나와 있다. 이 얘기는 사실일까? 실제 기록은 놀랄 만큼 상반된 사실을 전한다.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Constanze Mozart, 1762-1842)가 남편이 죽은 뒤 작은 아들 프란츠 크사버 모차르트(Franz Xaver Wolfgang Mozart, 1791~1844)를 살리에리에게 보내 음악가로 교육받게 했다는 것이다. 콘스탄체는 살리에리가 남편을 죽였다는 의심을 하지 않은 것일까? 살리에리가 실제로 모차르트를 죽게 했다면, 그는 자신이 죽인 적수의 아들을 맡아 가르칠 수 있었을까?

   
   
   
   
   


당대 최고의 음악교육자

요셉 빌리브로르도 멜러(Joseph Willibrord Mähler)가 그린 안토니오 살리에리 초상화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레냐노에서 태어났다. 오페라 팬들에게는 베르디 오페라 [레냐노의 전투]로 기억되는 곳이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인 살리에리는 열네 살 때 고아가 된 뒤 그를 눈여겨 본 작곡가 플로리안 가스만(Florian Leopold Gassmann)의 주선으로 오스트리아에 진출했다. 24세 때 오스트리아 궁정의 인정을 받아 궁정 오페라 감독으로 임명됐으며 38세 때는 황실의 예배와 음악교육을 책임지는 ‘카펠마이스터’가 됐다. 음악가로서는 오스트리아 제국 최고의 직위다.

그러나 오늘날 그가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부분은 교육자로서의 역할이다. 베토벤은 1792년 본에서 빈으로 이주한 뒤 당대의 유명 음악교사들을 찾아다녔다. 바쁜 모차르트는 4개월간의 가르침만을 주었고 하이든도 런던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는 바람에 레슨은 2년으로 끝났다. 이후 서른 살이 된 ‘성숙한’ 베토벤에게 살리에리는 1800년부터 오페라를 비롯한 성악 작법과 하이든이 모두 알려주지 못한 대위법을 가르쳤다. 베토벤은 여러 편지와 방대한 분량의 대화록에서 ‘살리에리 선생’에 대한 존경심을 자주 드러냈다.

슈베르트에게는 살리에리의 역할이 훨씬 컸다. 1804년, 당시 일곱 살에 불과했던 프란츠 슈베르트가 노래를 잘 할뿐더러 뛰어난 음악성을 갖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4년 뒤 빈의 음악원(콘빅트)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해준 주인공이 살리에리였기 때문이다. 1814년 슈베르트가 콘빅트를 졸업한 뒤에도 3년 동안이나 살리에리는 슈베르트가 보낸 작품을 살펴보며 섬세한 코치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피터 셰퍼(Peter Shaffer)의 희곡 『아마데우스』가 나오기 전까지 세계 청소년들에게 살리에리의 이름은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슈베르트 전기 속의 ‘감사한 살리에리 선생님’으로 남아있었다.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슈베르트가 “독일 시에 곡을 붙이는 것은 보람 없는 일이니 시도할 것이 못 된다”라는 살리에리의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고 수많은 보석 같은 독일 가곡을 탄생시켰던 점이다.

이밖에 살리에리는 피아노의 귀재였던 프란츠 리스트를 가르쳤고 그를 오스트리아 궁정 사회에 널리 소개했다. 베토벤의 제자였던 카를 체르니(Carl Czerny)도 지도했으며, 짧은 시간 가르쳤던 오페라 작곡가 마이어베어(Giacomo Meyerbeer)에게 ‘이탈리아에 가서 견문을 쌓아보라’는 조언을 주어 음악사의 한 장을 바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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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최고의 음악 선생이었던 살리에리가 가르쳤던 위대한 작곡가들. 좌로부터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 등.

보수적 스타일 안에서 최선을 다한 작곡가

오늘날 살리에리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주로 ‘모차르트를 해친 재능 없는 음악가’라는 데 그친다. 그는 알려진 대로 세련된 기법이나 취향이 없는, 무능한 작곡가였을까? 그는 가스만의 천거로 황제 요제프 2세의 만찬에서 연주하면서 황실이 총애하는 음악가로 자리를 굳혔다. 이 시기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인물이 오페라 개혁가로 전 유럽 음악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1787)였다.

오늘날 사람들은 음악적 취향도, 감식안도 갖추지 못했던 요제프 2세의 영향력 덕분에 살리에리가 특징 없는 작품만 쓰면서 오스트리아 제국 음악의 고위직을 독차지했던 것으로 여기지만, 그가 34년 동안 35편의 오페라를 쓰면서 그 대부분을 흥행에 성공했던 점을 고려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베토벤이 성악 작곡의 교사로 살리에리를 선택한 점을 보아도 그가 당대 성악 예술 기법의 최고봉에 선 것으로 인식됐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 살리에리의 인기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급속히 시들기 시작했다. 그 자신이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거의 신작을 내놓지 않기도 했지만, 이보다는 ‘대중의 달라진 취향’에서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바로크 시대 대가들의 보수적 스타일을 이어받은 살리에리의 오페라는 19세기에 들어와서 의고적 ()인 것, 한물 간 것으로 여겨졌다. 기악에서는 사정이 더 나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완벽한 고전주의적 형식원리를 응용한 소나타와 협주곡, 교향곡을 쏟아낸 반면, 살리에리의 기악 작품들은 긴 구조를 효율적으로 쌓아올릴 수 없는 지난 시대의 ‘갤런트 스타일(gallant style)’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황제의 음악가’였던 살리에리의 이름은 그가 사망할 즈음에 이르러서는 ‘못 말리는 보수성’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살리에리의 전기를 쓴 모젤에 따르면 살리에리 자신이 만년에 베토벤의 작품들을 언급하면서 “세기가 (18세기에서 19세기로) 바뀔 즈음엔 사람들의 음악 취향이 나의 시대로부터 바뀌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주의를 기울여 얻은 단순함보다는 유별난 것, 장르 간의 벽 깨기가 우선시 됐다”고 탄식했다.

영화 [아마데우스] 속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영화 정보 보러가기

그러나 20세기 후반,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역설적으로 이는 그에게 ‘살인범’의 누명을 뒤집어 씌운 피터 셰퍼의 희곡과 동명 영화 [아마데우스] 덕분이었다. 그를 무능한 작곡가로 각인시킨 영화가 흥행하면서 오히려 음악학자들과 연주가들도 그의 악보를 다시 들춰보기 시작했다. 2003년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Cecilia Bartoli)가 내놓은 [살리에리 앨범]은 그의 오페라에서 13곡의 대표 아리아를 뽑아 실은 음반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이어 소프라노 디아나 담라우도 살리에리 아리아집을 내놓았다. 2004년에는 담라우가 출연한 살리에리 오페라 [인정받은 유럽]이 밀라노 라스칼라 극장에서 공연돼 음악팬들의 시선을 집중시켰으며 이는 TV로 중계됐다. 이어 세계의 오페라극장과 콘서트홀에서 한층 많은 살리에리의 작품들이 공연되기 시작했다. 음악계와 애호가들이 ‘수법은 낡았지만 그 틀 안에서 최선을 다한’ 살리에리를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이다.

모차르트 독살설의 진실

이제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로 넘어가 보자. “살리에리는 진짜로 모차르트를 죽였는가?”

모차르트 독살설이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은 살리에리가 죽고 나서 6년 만에 발표된 러시아 문호 푸시킨의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였다. 이 작품에서 푸시킨은 오늘날 대중들의 뇌리에 각인된 것처럼 ‘천재를 질투하다 살인극을 펼치는 범재’로 살리에리를 그려냈다. 러시아 작곡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67년 뒤 이 극을 오페라로 만들었다.

미하일 브루벨(Mikhail Vrubel)이 그린 ‘살리에리의 모차르트에 대한 독살설’에 대한 그림. 1885년

그렇지만 모차르트 독살설은 모차르트의 사망 직후부터 빈 음악계에 풍문으로 떠돌았던 것으로 보인다. 모차르트의 처가와 친척이었던 음악가 베버가 1803년 살리에리의 모차르트 독살설을 듣고 그를 경원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로시니는 살리에리가 죽기 3년 전 그를 만난 자리에서 반 농담 삼아 이 ‘소문’을 언급하기도 했다. 모차르트 자신도 죽기 직전 급속히 상태가 악화되자 “누가 나에게 독을 먹인 것 아닌가”라는 의심을 얘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베토벤의 대화록에도 이런 얘기가 등장한다.

살리에리는 분명 이런 의혹으로부터 큰 시달림과 스트레스를 느꼈을 것이다. 죽기 2년 전인 1823년 치매로 요양소에 실려 간 그는 종종 ‘내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혼잣말을 뇌까렸고 이 소식은 병원 밖으로 흘러나갔다. 상태가 좋을 때 그는 명확히 ‘혐의’를 부인했지만 한번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푸시킨의 희곡도 당시 유럽 사회에 폭넓게 퍼져나간 이런 의혹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 희곡을 바탕으로 영국 극작가 피터 셰퍼가 1979년 희곡 『아마데우스』를 내놓았고, 체코 영화감독 밀로스 포먼이 1984년 이를 영화로 제작 발표했다.

처음에는 라이벌, 이후에는 친구

여기서 동시대의 기록에 나타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간혹 짚이는 질투의 징표는 살리에리가 아니라 모차르트 편에서 나온 것이었다. 모차르트가 1781년 25세의 나이로 잘츠부르크에서 빈으로 진출했을 때 살리에리는 이미 제국의 궁정음악가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 상태였다. 그에 대한 요제프 2세 황제의 지지가 확고한 상태에서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낼 여지는 적었다.

실제 모차르트는 부친에게 1781년 보낸 편지에서 ‘황제의 눈에 든 인물은 살리에리 하나뿐’이라고 불평했다. 이 해 모차르트는 뷔르템베르크 가문 엘리자베트 공주의 음악 교사직에 지원했으나 살리에리에게 기회를 빼앗겼다. 다음 해 대신 공주의 성악 레슨을 맡고자 다시 지원서를 냈지만 이마저 살리에리가 차지했다. 부친 레오폴드는 딸 나네를에게 보낸 편지에서 ‘살리에리 패거리’에 대한 유감을 표현했다.

2년 뒤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본작가 다폰테가 살리에리와만 일하려 한다며 “이탈리아 신사들은 면전에서만 친절하죠. 다폰테가 계속 살리에리 편에만 선다면 그의 대본을 사용할 생각이 없어요.”라고 적었다. 하지만 살리에리는 다폰테를 빈 문화계에 데려온 주인공이었고, 그와 우선적으로 함께 일할 권리가 있었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한 장면. 죽어가는 모차르트로부터 악보를 받아 적는 살리에리. 영화 정보 보러가기

1786년 요제프 2세가 궁정 연회에서 연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1막 오페라 대결은 두 사람의 앙금을 깊게 한 이벤트로 기억되고 있다. 살리에리가 ‘음악이 먼저, 말은 나중에’를, 모차르트가 ‘극장 흥행사’를 무대에 올렸고 살리에리의 작품이 갈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리에 모인 손님들은 모차르트가 받은 대본에 결함이 많았음을 느끼고 있었으며, 공식적으로 한 편의 ‘승리’가 선언된 바는 없다. 모차르트가 크게 상처를 받을 일은 아니었다.

이후 기록은 오히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가 좋아졌음을 보여준다. 1788년 궁정 카펠마이스터로 임명된 직후 살리에리는 자신의 오페라를 공연하지 않고 대신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을 무대에 올렸다. 1790년 레오폴트 2세의 대관에 즈음해서는 직접 모차르트의 미사곡들을 지휘했다. 두 사람은 나아가 공동으로 칸타타 [오펠리아의 회복]을 작곡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아깝게도 분실되어 남아있지 않다)

모차르트가 부인 콘스탄체에게 보낸, 오늘날 남아있는 마지막 편지는 모차르트에 대한 살리에리의 호의와 애정을 분명히 보여준다. (물론 영화 ‘아마데우스’와 같은 관점에서는 이 편지가 살리에리의 위선성을 나타내는 징표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살리에리를 [마술피리] 공연 극장으로 데려갔지. … 살리에리는 주의를 집중해 감상했고, 서곡에서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한 부분도 빼놓지 않고 ‘브라보!, 아름다워!’를 외쳤어.”

아내 콘스타체, 모차르트 사후 생애와 작품 정리

요제프 랑게(Joseph Lange)가 그린 콘스탄체 모차르트의 초상화, 1782년.

모차르트의 전기에 ‘독살설’만큼이나 흔히 따라붙는 얘기가 부인 콘스탄체에 대한 박한 평가다. 낭비벽이 심하고 판단력이 흐려 남편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일까?

콘스탄체 베버는 1777년 15살의 나이로 고향 만하임에서 여섯 살 위의 모차르트를 처음 만났다. 모차르트는 연주여행 중이었고, 자기보다 네 살 어린 콘스탄체의 언니 알로이지아(Aloysia Weber)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알로이지아는 이내 모차르트를 퇴짜놓았다. 콘스탄체와 모차르트가 엮이게 된 것은 4년 뒤, 이 집안이 빈에 살던 시절 뒤늦게 이 ‘세계 음악의 수도’로 건너온 모차르트가 방을 빌려 살면서였다. 이번에 모차르트는 성숙해진 콘스탄체를 발견했고, 알려졌다시피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했다.

결혼 9년 뒤 모차르트가 죽기 전 그는 재정난에 시달렸으며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편지를 남발했다. 이 사실이 ‘사치한 여인 콘스탄체’상을 세간에 심어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죽은 후 콘스탄체의 행보를 보면 사려 깊지 못한 여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콘스탄체는 죽은 남편의 곡들로 콘서트를 열어 모차르트 생전보다 오히려 나은 수입을 거뒀으며, 그의 악보를 주의 깊게 정리해 출판했고 두 아들을 프라하에 보내 좋은 교육을 받게 했다.

모차르트가 죽고 6년 뒤, 콘스탄체는 덴마크 외교관인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을 만났으며 이내 둘은 결혼했다. 니센은 온화하고 진지한 신사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아내 콘스탄체와 함께 모차르트의 생애를 정리했으며 집필에는 니센의 역할이 더 컸던 것으로 평가된다. 1820년, 두 사람은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로 이주했으며 이곳에서 각각 1826년, 1842년 생을 마쳤다. 니센이 사망한 3년 뒤인 1829년 두 사람이 쓴 모차르트 전기가 출판됐다.

그로브 음악사전』은 콘스탄체에 대해 “그에게 가해진 지성이 없고, 음악적 이해가 없으며 게으른 아내였다는 평가는 모든 면에서 잘못된 것”이라고 기록했다. 모차르트의 무덤이 오늘날 남아있지 않다는 점에서 콘스탄체의 무심함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러 구의 시신을 함께 매장하는 것은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전염병이 유행할 때 흔히 행해지던 관습이었다.

모차르트의 둘째 아들, 프란츠 크사버의 삶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모차르트가 죽은 뒤 콘스탄체는 둘째 아들 프란츠 크사버 모차르트를 살리에리에게 보내 음악교육을 받도록 했다. 콘스탄체의 친척이었던 작곡가 베버조차 ‘모차르트 독살설’ 때문에 살리에리를 경원시했다는 기록을 보면 콘스탄체도 이 소문을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프란츠 크사버를 살리에리에게 보낸 것은 콘스탄체의 경험에 비추어 살리에리가 신뢰할 만한 인물이며 당대 높은 평가를 받았고 모차르트에게도 우호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실제 살리에리는 궁정에서의 활약 및 교수활동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을뿐 아니라 온화한 인품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고아였던 그는 플로리안 가스만의 호의로 좋은 교육을 받고 빈 궁정에 소개될 수 있었던 일을 평생 가슴에 기억했으며 이 때문에 대부분의 제자를 무료로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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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두 아들. 좌로부터 프란츠 크사버 모차르트, 칼 토마스 모차르트. 1800년 한스 한센의 그림.

서른살 초반의 프란츠 크사버 모차르트의 초상화. 1825년

프란츠 크사버 모차르트가 살리에리에게 받은 교육 내용은 상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아주 좋은 음악적 기초교육”을 받았다고 자신이 회상했다. 그는 요한 네포무크 후멜(Johann Nepomuk Hummel), 요한 게오르크 알브레히츠베르거(Johann Georg Albrechtsberger) 등에게서도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웠다.

부친과 같은 대작곡가는 아니지만 아들 모차르트 역시 당대의 인정받는 음악가로 성장했다. 1820년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50명이 참여해 [디아벨리 변주곡 II]를 작곡하는 행사가 열렸는데, 여기 그가 참여한 사실이 이를 잘 나타낸다. (베토벤이 작곡한 [디아벨리 변주곡]의 후편 격 작품이다) 1841년에는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을 책임지는 악장(카펠마이스터)으로 임명되었다. 최근에는 그의 작품도 여럿 음반화되었다. 유명 아티스트의 음반으로는 소프라노 바버라 보니의 앨범 [또다른 모차르트(The other mozart)]를 통해 ‘아들 모차르트의 면모를 만나볼 수 있다.

프란츠 크사버 모차르트는 1844년 53세의 나이에 독신으로 사망했다. 공무원이었던 그의 형 칼 토마스도 아이를 남기지 않았다. 이에 따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후손은 오늘날 남아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