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선율

차이콥스키의 음악적 유서 - 비창 교황곡

히메스타 2017. 12. 22. 13:33

차이콥스키. 당시 52세. 1893년. <출처: Wikipedia>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의 마지막 교향곡인 6번 B단조 [비창](Pathétique․1893)은 초연 직후부터 큰 주목을 받으며 세계 관현악 레퍼토리의 표준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그 한 가지 예로 1909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된 오스트리아인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는 발표된 지 16년이 된 이 곡을 악단 이사회와 청중들이 너무 자주 들려달라고 요구하는 통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이 곡이 가진 인기의 비결은 인간의 가장 비통한 감정에 호소하는 단순할 정도의 솔직성, 그리고 뚜렷한 개성을 가진 작품의 구조였다. 통상 교향곡의 ‘빠르고 긴 악장-느린 악장-춤곡 악장-빠르고 장려한 악장’이라는 악장 배치를 깨뜨리고 이 작품은 오열하는 듯하다 꺼지듯이 사라지는 느린 악장을 작품의 끝에 집어넣었다. 작품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되고 9일 만인 1893년 11월 6일, 작곡가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12일 뒤, 두 번째 공연에서 청중들은 꺼지듯 사라지는 작품의 마지막 음형에 작곡가의 마지막 길을 겹쳐 떠올리며 함께 눈물지었다.


“끓이지 않은 생수를 마시고 콜레라에 걸렸다”

비창 교향곡 작곡 및 초연, 그리고 차이콥스키의 사망 당시에 대한 정황은 다음과 같이 알려졌다. 차이콥스키는 죽기 전 해인 1892년 새 교향곡을 쓰기로 마음먹고 작곡에 몰두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찢어버렸다’. 그러나 이 작품은 완전히 파기되지 않았고, 단악장인 [피아노협주곡 3번]으로 개작되었다. 1893년에 들어서자 그는 동생인 모데스트(Modest Ilyich Tchaikovsky)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나는 새 작품에 사로잡혀 있다. 아마도 내 작품 중 최상의 것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가능한 한 빨리 끝내고 싶지만 해야 할 일이 많고 런던에도 다녀와야 하는구나. 내가 지난번 교향곡을 끝냈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찢어버렸다는 말을 했지. 이번 작품은 분명히 찢어버리지 않을 거다.”

1893년 3월 러시아 음악협회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아래 줄 좌로부터 4번째 사람이 차이콥스키이다. <출처: Wikipedia>

새 교향곡은 8월에 완성되었고 작곡가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연습 중 단원들이 열성을 보이지 않아 차이콥스키는 실망했지만 초연의 평은 좋았다. 초연 직후 차이콥스키는 악보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뒤 출판사에 보내기 전 제목을 붙이려 했으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동생인 극작가 모데스트는 ‘비극적’이라는 제목을 제시했으나 형은 찬성하지 않았다. 모데스트가 궁리 끝에 ‘비창’을 제안하자 형은 “브라보, 비창이다”라며 악보에 제목을 적어 넣었다.

이 직후 차이콥스키는 갑자기 앓아누웠다. 고열과 설사가 반복되었다. 의사들은 콜레라라는 진단을 내렸다. 끓이지 않은 생수를 마신 탓이었다. 차이콥스키는 [비창] 교향곡 초연 9일만인 11월 6일 타계했다. 전 러시아와 세계가 대가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다. 이것이 수십 년 동안 세계가 알고 있던 차이콥스키의 마지막이다.

20세기 후반에 불거진 비소 자살설

차이콥스키 장례식. 상트페테르부르크 1893년. <출처: Wikipedia>

그러나 이 같은 차이콥스키의 마지막 길에 대해 줄곧 의심 어린 시선이 가시지 않았다. 동시대 작곡가인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 1844-1908)도 “콜레라로 죽었다는데 소독이나 검역이 없단 말인가!”라며 의구심을 표시했다. 당시 콜레라로 죽은 시신은 금속관에 봉인해서 묻는 것이 관례였는데, 죽은 차이콥스키의 시신 앞에는 참배객이 몰려들었고 심지어 시신의 손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차이콥스키의 형 니콜라이의 부인인 올가는 지인들에게 “의사 바실리 베르텐손이 황제의 명을 받고 작곡가를 죽였다”는 주장을 펼쳤다. ‘황제의 독살 지령설’은 당시 러시아에서 광범위하게 퍼진 것으로 보인다. “대작곡가가 젊은 남자를 유혹해서 분노한 (젊은 남자의) 부친이 황제에게 탄원서를 올렸다”는 소문도 당대에 이미 유포되었다.

이렇게 소문으로만 떠돌았던 ‘차이콥스키의 음독설’이 세상을 강타한 것은 1980년이었다. 소련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음악학자 알렉산드라 오를로바가 차이콥스키의 죽음에 대한 한층 정교한 ‘대안학설’을 발표한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차이콥스키는 동성애자였으며 그 사실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젊은 남자들과 관계했다. 그가 만년에 사귄 젊은이는 스텐보크페르모어 공작이라는 고관의 조카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텐보크페르모어 공작은 이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황제에게 써서 인편으로 보냈다. 그런데 황제에게 편지가 닿기 전에 편지 내용을 차이콥스키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법률학교 동창인 니콜라이 야코비가 알게 됐다.

알려졌다시피 차이콥스키는 부모의 권유로 법률학교를 졸업한 뒤 음악에 투신했으며, 그의 동료들은 러시아 정관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 동창들은 ‘명예 법정’을 소집해 ‘동문들의 명예가 훼손됐다’며 차이콥스키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어 명예를 지키라고 요구했다. 차이콥스키는 ‘최후의 걸작’을 먼저 완성하고 죽겠다고 말했으며, 동창들은 청을 들어주었다. [비창] 초연 직후 차이콥스키는 약속대로 비소를 먹었고, 이는 증상이 비슷한 콜레라로 포장됐다. 콜레라와 비소중독 모두 심한 설사와 구토, 탈수, 신장 기능정지로 이어진다.”

차이콥스키의 동생 모데스트 <출처: Wikipedia>

이런 분석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오를로바는 다음과 같은 정황을 제시했다. 1. 차이콥스키가 끓이지 않은 생수를 마셔서 콜레라에 걸렸다고 하지만, 보도마다 마신 날짜와 장소가 엇갈린다. 2. 콜레라에 따른 신장 기능 정지는 당시 보도된 것만큼 빠른 시일 내 일어나지 않는다. 3. 차이콥스키가 의사들로부터 받은 처치는 콜레라 환자에게 가해지는 것으로는 적절하지 않았다.

당대에도 이런 정황들에 따라 소문과 의심이 이어지자, 고인의 동생 모데스트가 직접 형의 죽음에 대한 ‘해명’에 나섰다. 모데스트는 “사실무근인 루머들을 잠재우기 희망한다”고 말했지만 차이콥스키의 주치의 베르텐손은 세부에 대해 엇갈리는 설명을 내놓았다. 모데스트 역시 동성애자였으며, 이 때문에 형의 동성애 스캔들을 억지로 잠재워야 할 이유도 충분했다. 당대 러시아에서 동성애자 사실이 밝혀지면 매질을 당한 뒤 시베리아로 유형 보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콜레라냐 자살이냐, 승자 없는 논쟁

오를로바의 충격적인 분석이 서방세계에 등장하자 반격이 쏟아졌다. 오를로바가 가진 가장 강력한 증거는 “차이콥스키의 명예 재판이 열렸던 집의 소유자를 안다”고 주장한 남자였다. 오를로바는 이 남자를 1966년에 인터뷰했지만 이 남자도 이미 1913년의 얘기를 들은 것이며 1913년에 이 얘기를 들려준 여성 역시 차이콥스키가 죽은 뒤 2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기억을 더듬은 것이었다. 신빙성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오를로바가 가진 ‘스토리라인’과 증거는 계속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그에 의하면 차이콥스키의 사망 직후 주치의 베르텐손이 모데스트에게 보낸 편지는 형의 사망원인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주변에 형의 죽음을 이렇게 설명하면 된다”고 안내하는 건조한 설명문처럼 보였다. 오를로바는 아우구스트 게르케라는 차이콥스키의 동창이 차이콥스키를 방문해 비소를 직접 전달했다는 기록도 제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재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음악사학자 알렉산더 포즈난스키는 황제에게 고발 편지를 썼다는 스텐보크페르모어의 실체에 칼날을 들이댔다. 조사 결과 당시 스텐보크페르모어 ‘공작’이라는 인사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스텐보크페르모어 ‘백작’이 있었지만 황제의 시종무관으로 근무 중이었기 때문에 황제에게 편지를 써서 전달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포즈난스키는 나아가 당시 귀족과 상류사회에서 동성애가 유행했으며, 법률상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크게 문제되는 행각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차이콥스키가 죽기 직전 ‘쾌활했으며’ ‘이후 작곡 계획에 대해 확신에 차서 주변 사람들과 의견을 교환했다고’ 그는 덧붙였다. 나아가 차이콥스키의 죽음에 대해 의사들이 보였다는 미심쩍은 처치도 얘기를 전달하는 사람들의 실수에 의해 잘못 전해진 것이며, 실제 처치는 대부분 콜레라에 대한 표준 조치를 따랐다는 것이다.

차이콥스키의 임종 사진. 1893년. <출처: Wikipedia>

‘비창 교향곡’ 악보에 나타나는 암시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역사적 정황만으로는 차이콥스키가 실제로 비소를 삼키고 자살했는지 결론을 짓기 어렵다. 혹시 [비창 교향곡]의 음악적 텍스트 자체에 우리가 살펴볼만한 단서가 들어있지는 않을까? 자신의 마지막 행로에 대해 입을 열어 밝힐 수 없었던 이 작곡가가, 혹시 악보 어딘가에 암호와 같이 자신의 비밀을 숨겨놓지는 않았을까?

러시아의 청중들은 초연 직후 이미 이 작품의 심상치 않은 부분을 직감했다. 당당하고 씩씩한 전통적 피날레 대신 울다 지쳐 쓰러지는 듯한 마지막 악장을 선보인 것은 듣는 사람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염세적, 비관주의’의 징표였다. 여기 더해,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러시아인이면 쉽게 눈치챌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1악장 전개부, 벽력이 치는 듯 질풍 같은 관현악의 총합주가 휘몰아치다 잦아든 뒤 트롬본과 트럼펫이 독립된 선율을 약하고도 침통하게 낮은 음역에서 읊조린다. 러시아의 신심 깊은 정교회 신자들에게 너무도 친숙한, 진혼 성가의 선율(‘성자들과 함께 당신의 종이 영혼의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그리스도여’)이다. 최소한 이 부분에서는, 작곡가가 악상의 전개를 ‘죽음’과 연계시키려 했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다.

1악장의 서주부(introduction)는 당시 차이콥스키의 심리상태에 대해 훨씬 더 풍부하고 다양한 정황을 추출해낼 재료가 된다. 차이콥스키는 1악장을 거의 완성한 뒤 3악장을 진행했고, 작업 도중 다시 1악장으로 되돌아와 서주부를 추가했다. 이는 애초에 서주부를 넣기로 의도했으나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작업 뒤 순서로 돌린 것일 수도 있고, 3악장을 쓰다가 뒤늦게 ‘1악장에 서주부를 추가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던 것일 수도 있다.

이 서주부는 현이 고요하게 깔아놓은 화음의 배경 위로 또렷이 등장하는 바순의 첫 선율부터가 많은 것을 암시한다. 먼저, 더블베이스의 최저음이 반음씩 서서히, 모두 4도를 내려간다. 이는 바로크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들이 즐겨 쓰던 수법으로써 이른바 ‘탄식의 베이스(Lament Bass)’라고 불린다. 비탄과 슬픔, 죽음을 나타낼 때 상징적으로 사용되곤 했던 음형이다.

[비창 교향곡] 서주부 바순의 첫 선율

영국 작곡가 헨리 퍼셀(1659~1695)의 오페라 [디도와 에네아스]에서 주인공 디도가 죽기 전에 부르는 아리아 [내가 땅에 누웠을 때]도 이 베이스 음형을 사용했다. 흔히 [디도의 탄식(Dido's lament)]이라고 불리는 아리아다. 이 음형이 나오는 부분의 가사는 이렇다.

“내가 땅에 누웠을 때, 내 잘못이
그대 가슴을 괴롭히지 않기를.
나를 기억해주오. 그러나 아아!
내 운명은 잊어주오.”

한층 흥미로운 점은, 이 베이스 위에 펼쳐지는 아리아의 선율이 라-시-도-시-도(#)-레로 [비창 교향곡] 서주의 바순 선율에 나타나는 음 간격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첫 네 음의 간격은 [비창 교향곡] 같은 악장의 빠른 제1주제와도 일치한다.

또한, 중간의 경과음을 뺀 라-도-시-레는 악보상 음표가 교차(Cross) 되는 모습으로써, 차이콥스키 자신은 이를 ‘십자가 처형’과 연관시켜 ‘불운한 사랑’ 또는 ‘몰락’의 주제로 해석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차이콥스키가 공들여 추가한 1악장의 서주부에 강력한 염세적 표제를 암시 또는 동원했다는 것은 한층 분명해진다. 나아가 차이콥스키가 퍼셀의 [디도와 에네아스]를 직접 염두에 두고 ‘땅에 누운’ 자의 탄식을 나타내려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차이콥스키의 ‘십자가 처형’과 연관된 모티브. 비창 교향곡의 1, 2 악장에 사용된다. <출처: Wikipedia>


한편, ‘라-시-도-시’의 첫 선율은(음계상 레-미-파-미로 해석할 수도 있음) 이 작품의 제목인 ‘비창’을 동생 모데스트가 제안했다는 전언에도 의구심을 갖게 한다. 같은 음형이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8번 [비창] 서주부에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친숙한 차이콥스키적 선율, 하강 7음 주제

이 교향곡 1악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제2주제로 들어가 보자. 느릿한 이 주제는 약음기를 낀 바이올린이 선율부를 맡는다. 8분 쉼표 하나에 이어 일곱 개의 8분 음표가 천천히 하강하다가 끝이 살짝 들리듯 다시 올라가는 주제다. 이런 선율은 차이콥스키의 팬들에게 낯설지 않다. 가곡 [그리움이 아는 이 만이], [관현악 모음곡 3번] 1악장 [비가(엘레지)], [교향곡 4번] 2악장,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중 [어디로 갔나, 내 아름다운 날들은] 등에서 이와 같은 특징을 갖는 선율이 거듭 등장한다.(악보 3) 이제 이 선율들이 나타내는 텍스트를 죽 병렬해 보자.

[비창 교향곡] 1악장(①)과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②) 악보. 차이콥스키는 음표 7개가 죽 내려가다 끝이 올라가는 음형을 고유한 슬픔의 표현으로 사용했다. 오페라 [예프게니 오네긴] 중 [렌스키의 아리아](③)등에서는 첫 음만 길어진다.

“모든 즐거움에서 떨어져 나와, 나는 홀로.”(‘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가사)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모든 것이 암흑 속.”(‘렌스키의 아리아’ 가사)
“과거를 탄식하고 그리워하지만 새롭게 시작할 의지도 용기도 없습니다.”(차이콥스키가 [교향곡 4번] 2악장의 내용에 대해 후원자인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
“(이것은) 슬픈 노래” (모음곡 3번 1악장 표제)

비슷한 선율을 가진 작품에 대해 연관된 모든 텍스트가 “나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괴롭고 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이 같은 일련의 음형 속에서 가장 절절하고 서글픈 선율을 뽑아내 대작을 완성한 직후 차이콥스키는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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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가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졸업할 무렵의 25살의 차이콥스키 <출처: Wikipedia>

1874년 1월 33살의 차이콥스키 <출처: Wikipedia>

1893년 6월 캠브리지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는 차이콥스키. 이 사진이 그의 살아생전 마지막 사진이다. <출처: Wikipedia>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차이콥스키 ‘비창 교향곡’의 음악적 텍스처는 비감하고 좌절한 인간의 절절한 감정을 있는 힘껏 드러내고 있으며, 이는 죽음의 암시와도 짙게 결부된다. 그러나 이 같은 작품의 구조적인 정황들이 차이콥스키의 자살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차이콥스키가 실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여부는, 아마도 우리가 입수할 수 있는 증거들로는 확실히 입증해낼 수 없는 미스터리일 것이다.

그러나 차이콥스키의 자살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차이콥스키의 죽음이 콜레라에 의한 우연한 것일지라도, 그 자신이 언제 죽음이 다가올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고 가정하더라도, [비창 교향곡]은 차이콥스키가 그 자신의 염세적 세계관과 개인적 슬픔을 집약해 쏟아 넣은 ‘음악적 유서’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그런 유서로서의 처절함이 차이콥스키의 자살을 ‘증명’한다기보다는, 작품의 처절함이 차이콥스키 자살설의 극적 성격을 한층 강화한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한결 홀가분한 일이다. 또한 이 작곡가가 죽음의 문턱 너머로 시선을 보내 쏟아낸 그 절절한 표현은, 오늘날 수많은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인류에게도 관대한 치유의 손길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