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서원에 배향된 안향,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서 닦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기초사전>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있다. 출발은 백운동서원이었다.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유학자 안향(安珦, 1243~1306)의 사묘(祠廟)를 세웠다. 이듬해에는 풍기군 학사(學舍)를 그곳으로 옮겼다. 안향의 본관지 순흥에서 안향을 기리고자 한 것. 이로써 백운동서원이 이룩되었다. (순흥부는 1457년 순흥부사 이보흠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사사당한 뒤 폐지되어 풍기군에 합쳐짐)
명종 5년(1550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했다. 명종에게 친필 편액을 내려 받고 서책과 전답을 지원받으며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소수’는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서 닦는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이다. 이 ‘소수’라는 말에 안향의 업적과 정신이 집약되어 있다. 소수서원에는 1318년 충숙왕이 원나라 화공에게 그리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국보 111호 안향 초상화가 있다. 지금 전해지는 것은 원나라 화공이 그린 것을 그대로 모사한 것이다. [고려사] 열전은 안향을 이렇게 평한다.
‘사람됨이 장중하고 조용하면서 착실하여 많은 이들이 존경했다. 계획을 잘 세우고 판단력도 뛰어나 동료들이 그를 순순히 따랐다. 늘 인재 양성과 학문 부흥을 자신의 중대한 임무로 여겼다. 손님 대접을 좋아하고 남에게 자기 것을 내어주기를 좋아했다. 문장은 맑으면서도 힘이 있었고 사람을 판단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한국 성리학 역사의 출발점에 서다
1289년 11월 안향은 당시 세자였던 충선왕을 수행하여 원나라의 수도 연경을 방문했다. 주자(朱子)의 저서를 필사하고 공자의 초상을 모사하여 1290년(충렬왕 16년) 봄에 귀국했다. 이에 따라 1290년을 한국 성리학 역사의 출발점으로 잡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안향의 유고문집 [회헌실기](晦軒實記)에는 ‘유국자제생문’(諭國子諸生文)’이 실려 있다. 국학 생도들에게 학문에 힘쓸 것을 권하는 이 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단, [회헌실기]의 사료적 가치와 ‘유국자제생문’의 진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내가 일찍이 중국에서 주회암(朱晦菴, 주자)의 저술을 보니 성인의 도를 밝히고 불교를 배척하는 공이 공자에 짝할 만하였다. 공자의 도를 배우려면 회암을 배우는 것보다 우선할 것이 없다. 학생들은 새로 들어온 (주자의) 서적을 읽기에 힘써 게으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년에는 항상 회암 선생(주자)의 진영(眞影)을 걸어놓고 경모하여 자신의 호를 회헌(晦軒)이라 하였다.’[고려사] 열전 ‘안향’
물론 어느 한 년도를 딱 집어서 한국 성리학 역사의 출발점이라 말하는 게 무리일 수도 있다. 물건도 아닌 사상의 수용이 정확한 시작점을 지닌다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사실 1290년과 안향 이전에도 기초적이나마 고려의 유학자들이 성리학에 관해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1298년부터 연경에 10년 간 머무르며 성리학을 공부한 뒤 서적을 갖고 귀국한 백이정(白頤正)의 역할도 중요했다. 백이정은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과 성리학을 연구하며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정리하자면 안향, 백이정, 권보, 우탁, 이제현 등으로 이어지는 13세기말~14세기 중반이 성리학 초기 수용기였다. 충목왕 즉위년(1344년)에는 성리학의 핵심 텍스트인 사서(四書)가 과거 시험과목으로 채택되었다. 초기 성리학의 맥은 다시 이곡, 이색 부자(父子)와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등으로 이어져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이루었다. 안향은 이러한 흐름의 선구자였다. 백이정의 일생을 정리한 행장에는 그가 권보, 우탁 등과 함께 안향 문하에 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제현(1287~1367)은 안향을 그 시대 유학의 으뜸이자 대표 격이라 언급했다. 안향은 이미 자신의 시대에 높은 평가와 존경을 받았다.
교육과 학문 진흥을 위한 안향의 뜻과 노력
‘재상의 임무 가운데 인재를 양성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지금 양현고가 비어 인재를 기를 길이 없다. 육품 이상은 은 한 근씩을 내고, 칠품 이하는 등급에 따라 포(布)를 내게 하자. 그 늘어나는 이식(利息)으로 섬학전(贍學錢, 교육기금)을 조성하자.’[고려사] 열전 ‘안향’
1304년(충렬왕 30년) 안향은 재부(宰府)와 중추원에 위와 같이 건의했다. 이를 보고받은 왕은 왕실 재산과 곡식을 내어 도왔다. 양현고는 1119년(예종 14) 관학(官學) 진흥을 위해 설치한 장학재단이다. 그러나 양현고를 확충하려는 안향의 뜻은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컨대 대신 고세(高世)는 자신이 무인(武人)이라는 이유를 들며 반발했다. 재산을 내야 하는 일에 모든 대신들이 흔쾌히 동참했을 법하지 않다. 이에 안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자(孔子)의 가르침은 만세의 규범이다.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들이 어버이에게 효도하며 아우가 형을 공경하는 것은 누구의 가르침인가? ‘무인인 내가 무엇하러 돈을 내어 문인 생도들을 가르치는 데 보태느냐’ 한다면, 이는 공자를 무시하는 것이니 가당한 일인가?’
결국 고세도 안향의 말을 듣고 기금 조성에 참여했다. 안향은 기금 일부를 박사(博士) 김문정에게 주어 중국 강남 지방으로 보냈다. 그는 공자를 비롯한 그의 제자 72현의 상(像)을 그려오고, 제기와 악기, 경서와 역사서, 그 밖의 사상서까지 구해오게 했다. 안향이 섬학전 조성을 추진한 1304년에 공자를 기리며 모시는 대성전(大成殿)이 개경 국학에 새로 건립됐다. 안향은 교육과 학문의 인프라 구축에 노력함으로써 소수서원의 ‘소수’, 즉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서 닦는다’는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다.
안향이 이해한 유교와 성리학, 일상생활에서의 윤리 실천
소수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안향의 초상화, 고려 중기 원나라 화가가 그린 것을 모사한 것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기초사전>
안향은 주자를 경모하고 성리학을 유교의 정통으로 깊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성리학에 관해 그가 쓴 별도의 논저나 글은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성리학을 어떤 것으로 이해했을까? 추정해볼 수는 있다. 첫 번째 단서는 ‘유국자제생문’의 다음 대목이다.
‘성인(聖人)의 도는 다만 일상생활에서 윤리를 실천하는 것뿐이다. 자식이 효도하고 신하가 충성하고, 예로 집안을 다스리고 신의로 벗을 사귀고, 자기 자신을 경(敬)으로 닦고, 모든 일을 반드시 정성으로 할 따름이다.’
일상생활에서 윤리를 실천하는 것. 이것은 유교의 핵심이자 주자가 특히 [소학](小學)에서 강조한 사항이다. 안향이 주안점을 둔 것은 인간 심성(心性)이나 이기(理氣), 태극(太極)에 관한 학설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의 구체적인 도덕 실천이었다. 이는 당시 원나라 유교의 대세였던 허노재(許魯齋, 1209~1281), 즉 허형(許衡)의 학문 세계가 지닌 특징이기도 했다.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접한 안향이 허형에게 영향을 받은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불교는 어떠한가. 부모를 버리고 집을 나가 윤리를 파괴하니 이적(夷狄)의 무리와도 같다. 근래 병과(兵戈)에 시달린 나머지 학교가 피폐해지고 선비는 학문을 모르니, 배운다는 게 고작 불서(佛書)나 즐겨 읽고 그 허무공적(虛無空寂)한 뜻을 따르니 가슴 아프기 짝이 없다.’
역시 ‘유국자제생문’의 한 대목이다. 안향 이전의 고려 유학자 대다수는 불교를 강하게 배척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고려는 엄연한 불교국가가 아니던가. 유교야말로 인간이 따라야 할 사실상 유일하게 올바른 가르침이며, 그 밖의 것들은 헛된 학문(虛學)에 불과하다는 강력한 유교 정통주의. 이는 성리학의 큰 특징이다.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안향을 한국 성리학 역사의 첫머리에 놓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재상인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직을 끝으로 은퇴한 안향이 1306년 세상을 떠났을 때, 국학과 사학 12도의 생도들이 소복을 입고 길에 나와 그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
성리학 초기 수용자들의 특징
안향을 비롯한 성리학 초기 수용자들 대부분은 과거 급제자들이었다. 타고난 신분이 아니라 갈고 닦은 학문 실력으로 관계에 진출한 것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귀족 세도가문 출신이 아니었다. 무신정권 붕괴(1270) 이후 새로이 떠오르는 가문 출신이었다. 본관도 대부분 충청, 전라, 경상 등 삼남(三南)에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중소지주가 많은 가운데 대지주도 있었다.
안향의 아버지 안부(安孚)는 오늘날 경북 영주시에 속한 순흥 지역의 아전이었다. 안부는 잡과에 해당하는 의업(醫業)에 급제하여 중앙 관계에 진출했다. 그 전까지는 중앙 관계에 진출한 적이 없는 가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우리가 고려 말 신진사대부라 일컫는 세력과 매우 비슷하다. 음서(蔭敍)와 과거, 중앙 귀족세가와 지방 신흥가문, 대지주 계층과 중소지주 계층의 대비다. 성리학 초기 수용자들은 고려 말의 개혁과 조선 왕조 개창의 주도 세력인 신진사대부와 연속성을 지닌다.
세도가문의 권력 남용, 관리의 부정부패, 토지 겸병(兼倂)과 양민 수탈, 조세 문란. 당시의 고려 사회는 무신정권기와 원나라 간섭기를 거치면서 많은 문제가 이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 유학자들의 성리학 수용은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고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 토대를 찾으려는 움직임으로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사대부의 나라’이자 ‘성리학의 왕국’ 조선을 사상적으로 예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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