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총애를 받은 집현전 학사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은 1417년(태종 17)에 출생하여 1456년(세조 2) 단종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순절한 조선 초기 문신이다. 순천이 본관인 박팽년의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으로 회덕 출신이며, 부친은 판서를 지낸 박중림(朴仲林)이다.
박팽년은 세종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성삼문(成三問)과 더불어 일찍이 집현전(集賢殿)에 발탁되어 임금에게 총애를 받았다. 17세인 1432년(세종 14)에 생원이 되고 2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447년(세종 29)에는 중시에 합격하여 호당(湖當: 학문이 뛰어난 사람에게 준 사가독서)에 선발되었다.
박팽년은 과묵한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성품은 침착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소학(小學)] 책에 나오는 예절대로 실천하여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서 의관을 벗지 않아 사람들이 존경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 하나가 있다. 명의 천순(天順) 황제가 오랑캐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박팽년은 침실에서 자지 않고 항상 밖에서 짚자리를 깔고 잤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천자가 오랑캐 나라에 잡혀 있으니 내가 비록 배신(陪臣)이기는 하나, 차마 마음 편하게 자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어찌 보면 고지식한 사람이라 평가할 수 있으나, 이러한 충절심이 있었기 때문에 훗날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갖추어 집대성이라 불리다
박팽년은 집현전의 유망한 젊은 학자들 가운데서도 학문과 문장·글씨가 모두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집현전 출신인 신숙주ㆍ최항ㆍ이석형ㆍ정인지ㆍ성삼문ㆍ유성원ㆍ이개ㆍ하위지 등 쟁쟁하게 이름을 날렸던 인물들 가운데서도 최고의 평가를 받은 것이다. 성삼문은 문체는 호방하나 시에는 재주가 짧고, 하위지는 대책(對策)과 소장(疏章)에는 능했으나 시를 알지 못하고, 유성원은 타고난 재주가 숙성하였으나 견문이 넓지 못하고, 이개는 맑고 영리하여 발군의 재주가 있으며 시도 뛰어나게 맑았으나 모든 사람들이 박팽년을 추앙하여 모든 것을 갖추었다는 의미로 집대성(集大成)이라 하였다. 시를 비롯하여 경학ㆍ문장ㆍ필법 등 모든 면에서 가장 탁월했던 박팽년이었지만, 참화(慘禍)를 입어서 저술이 전하지 않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박팽년은 문종으로부터 어린 단종을 부탁받았던 고명 신하 중의 한 사람이다. 문종은 병환이 나자 어느 날 밤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들여 무릎에 단종을 앉히고 손으로 그 등을 어루만지면서 “내가 이 아이를 경들에게 부탁한다.” 하고, 술을 내려 주었다. 문종이 어탑(御榻:왕의 의자)에서 내려와 편히 앉아서 먼저 술잔을 들어 권하니, 성삼문ㆍ박팽년ㆍ신숙주 등이 모두 술에 취해 쓰러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문종이 내시에게 명하여 방문 위의 인방나무를 뜯어다가 들것을 만들어 차례로 메고 나가 입직청(入直廳)에 나란히 눕혀 놓았다. 그날 밤에 많은 눈이 왔는데, 이튿날 아침에 술이 깨니, 좋은 향기가 방 안에 가득하고, 온몸에는 담비털 갖옷이 덮여 있었다. 문종이 손수 덮어준 것이었다. 그들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임금의 특별한 은혜에 보답하기로 서로 맹세하였다. 그러나 이들 중 박팽년과 성삼문은 목숨으로 단종을 지키고자 했으나, 신숙주는 세조의 편이 되었다.
단종의 복위를 꿈꾸다
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단종은 박팽년을 몹시 아꼈다. “팽년은 학문을 정밀히 연구하여 강의 할 때마다 이치를 밝히는 것이 많으니 당상관이 될 수 있겠다” 칭찬하고 일약 부제학으로 발탁하였다. 1455년(단종 2)에 세조가 선위(禪位)를 받자, 박팽년은 세상이 바뀌지 않음을 알고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몸을 던져 죽으려 했다. 이때 성삼문이 말리며 “지금 왕위는 비록 옮겨 갔지만 아직 상왕(上王, 단종)이 계시니, 우리들이 죽지 않아야 장차 뒷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한다면 그때 죽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니, 오늘의 죽음은 국가에 무익할 뿐이다.”하니, 박팽년이 울분을 참고 성삼문의 말을 따랐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박팽년은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지방으로 내려 갔다. 그는 조정에 보고할 때 ‘신(臣)’이라 지칭하지 않고 단지 ‘아무 관직의 아무개’라고만 적었다.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었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눈치 채지 못하였다.
이듬 해 형조참판이 되어 다시 중앙으로 복귀한 박팽년은 성삼문과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 및 유응부,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질, 권자신 등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였다. 그때 마침 명나라 사신이 오게 되어 세조가 단종과 함께 사신을 청하여 창덕궁(昌德宮)에서 연회를 베풀려고 하였다. 박팽년은 “성승 및 유응부를 별운검(別雲劍)으로 삼아 연회를 베푸는 날에 거사하고, 성문을 닫아 측근을 제거하고 상왕을 다시 세우자.”하였다.
모의 결의는 하였으나, 마침 그날 세조가 운검을 그만두도록 하였고, 세자 또한 병 때문에 따라 나오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응부가 거사를 강행하려 하자, 박팽년과 성삼문이 “지금 세자가 본궁에 있고, 공의 운검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만약 여기서 거사하였다가 혹시 세자가 변고를 듣고 경복궁에서 군사를 일으킨다면 성패를 알 수 없게 될 것이니, 다른 날을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라며 말렸다. 그러나 유응부는 “일이란 신속해야 하는데 만약 지체한다면 누설될까 두렵소. 지금 세자가 비록 오지 않았지만 측근들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오늘 만약 이들을 모두 죽이고 상왕을 호위하여 호령한다면 이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가 될 것이오. 이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것이오.” 하였다. 그러나 박팽년과 성삼문이 “만전의 계책이 아닙니다.”고 하며 강하게 반대하여 그만두게 되었다.
거사가 훗날로 미뤄진 것은 불행이었다. 거사에 참여하기로 한 김질이 자신의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에게 달려가 “오늘 세자가 나오지 않았고, 특히 운검을 그만두도록 한 것은 하늘의 뜻이니, 먼저 고발하여 우리만이라도 요행히 살아나는 편이 낫겠습니다.”하였다. 이들의 고발을 들은 세조는 김질과 정창손을 용서하고 박팽년 등 모의자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당대의 난신, 후세의 충신
박팽년은 옥에서 상왕인 단종의 복위 모의를 자복(自服)했다. 평소 그의 재주를 높이 산 세조가 조용하게 다가가 “네가 마음을 바꿔 나를 섬긴다면 목숨만은 구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구슬렸다. 이 말을 들은 박팽년은 아무 말없이 웃고는 그저 ‘나으리’라고 부를 뿐이었다. 약이 오른 세조가 “네가 일전에 이미 신하라고 말한 바 있으니 지금 아니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라고 하자 “저는 상왕의 신하이지, 어찌 나으리의 신하가 되겠습니까. 충청도 관찰사로 있던 1년 동안에 장계와 문서에 스스로 신하라고 일컬은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하였다. 사람을 시켜 그 내용을 살펴보게 했더니, 과연 신하라는 글자가 하나도 없었다.
세조의 신하가 아니므로 그는 반역자가 아니었다. 죽기 전 그는 주위 사람을 돌아보며 “나를 난신(亂臣)이라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를 본 김명중(金命重)이 “어찌하여 이러한 화를 스스로 자처하십니까?” 하니, “마음이 평안하지 않아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어린 단종을 지켜달라는 문종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킨 것이었다.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이시랴
한번은 옥중에서 고문을 당할 때 세조가 사육신들에게 술을 따르며 옛날 태종이 정몽주에게 불러준 ‘하여가’를 읊어 시험하였다. 성삼문은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로 답하였고, 박팽년과 이개는 모두 스스로 단가(短歌)를 지어서 답하였다. 박팽년의 충절을 느낄 수 있는 유명한 두 작품이 있다.
가마귀 눈비 마자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오랴
님 향한 일편 단심이야 변할 줄이 이시랴
금이 아름다운 물에서 난다고 해서 물마다 금이 나는 것은 아니며,
옥이 곤강(崑崗)에서 나온다고 해서 산마다 옥이 나는 것이 아니며,
아무리 여자가 사랑하는 지아비를 따른다고 하지만 임마다 좇을 수는 없는 것이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분별없이 여러 임금을 섬길 수는 없다는 것이 박팽년의 생각이었다. 결국 굴복하지 않는 사육신의 충절을 본 세조 또한 이들을 가리켜 “당대의 난신(亂臣)이요, 후세의 충신이다”고 말했다.
세조의 회유를 끝내 거절한박팽년은 옥중에서 죽었다. 그를 이어 아우인 박대년(朴大年)과 아들 박헌(朴憲) 등이 모두 죽었고, 그의 아내는 관비(官婢)가 되어 수절하며 평생을 마쳤다.
여종의 딸과 바꾸어 목숨을 구한 박팽년의 손자
박팽년이 죽을 때 아들 박순의 아내인 이씨가 임신 중이었다. 조정에서는 친정인 대구로 내려간 이씨가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했다. 박팽년의 여종 또한 그 무렵 임신 중이었는데 이 여종이 이씨에게 말하기를 “마님께서 딸을 낳으시면 다행이겠으나, 아들을 낳는다면 쇤네가 낳은 아기로 죽음을 대신하겠습니다.”하였다. 이씨가 해산을 하니 아들이었다. 딸을 낳은 여종이 맞바꾸고는 이름을 박비(朴婢)라 짓고 길렀다. 박비가 장성한 뒤에 경상감사로 온 이모부 이극균(李克均)을 만나게 되었다. 박비를 본 이극균은 눈물을 흘리며, “네가 이미 장성하였는데, 왜 자수하지 않고 끝내 조정에 숨기는가.”하며, 자수를 권했다. 성종이 특별히 용서하고 이름을 비에서 일산(壹珊)으로 고치게 했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이 일을 자신의 저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기록하며 “평소 긴 수염을 늘어뜨리며 높은 관(冠)을 쓰고 대장부로 자처하다가도 어려움에 다다라서는 이 여종만도 못한 자가 그 얼마나 많았던가? 내가 여기에 절실히 느껴지는 바가 있어 그녀의 알려지지 않은 덕을 드러내는 것이다.”하였다.
박팽년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뒤 복관(復官)된 것은 숙종대인 1691년(숙종 17)에 와서이다. 1758년(영조 34)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정(忠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등과한 뒤 집현전 정자부터 중추원부사에 이르기까지 21년의 관료 생활을 하는 동안 박팽년은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학자의 한 사람으로, 그리고 정국의 핵심에 선 정치가의 한 사람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짧은 생을 마감하여 모든 역량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명분과 의리, 도덕성을 몸소 실천한 최고의 충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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