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삶은 거대하고 복잡한 운명의 드라마일 것이다. 모든 인간의 탄생과 종말은 적어도 그 개인에게는 우주의 시작과 멸망만큼 절대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이처럼 모든 운명은 복잡하고 난해하고 절대적이지만, 그것의 현실적 의미는 상당한 차이를 갖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차이를 결정하는 핵심적 요인은 그 개인의 현실적 지위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도 깊은 자연의 원리와 비슷하게, 개인의 현실적 지위가 높고 중요할수록 그에게 다가오는 운명은 거대하고 복잡하다.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은 조선의 제4대 국왕으로 순조롭게 등극할 것이 자명했지만, 자신의 거듭된 실책과 부왕(父王)의 냉엄한 결정으로 그런 엄청난 행운을 박탈당한 비운의 인물이었다.
순조로운 성장과 왕세자 책봉
양녕대군이라는 개인 뿐 아니라 조선이라는 신생의 국가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준 인물은 태종(太宗, 1367~1422, 재위 1400. 11~1418. 8)이었다. 그는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과 업적을 보여준 국왕의 한 사람이었다. 새 왕조의 건국과 제1ㆍ2차 왕자의 난으로 대표되는 냉혹한 권력투쟁을 거쳐 집권한 그는 18년 동안 재위하면서 국가의 중요한 기틀을 마련했다.
태종은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1420)와의 사이에서 4남 4녀를 두었고, 효빈(孝嬪) 김씨 등 18명의 후궁에게서도 8남 13녀라는 많은 자녀를 얻었다(그밖에도 일찍 사망한 2녀가 있었다). 이런 비빈과 자녀의 숫자는 그의 호색을 보여주는 객관적 증거지만, 전근대의 국왕은 개인적 욕망을 해소하는데 현실적 제약을 거의 받지 않았을 것을 생각하면 현재의 기준에 비추어 그것을 통치의 성패나 인격의 수준과 연관시키려는 시도는 무의미할 것이다.
양녕대군은 이런 많은 자녀 중에서 정비의 장남으로 태어나는 큰 행운을 누렸다. 1394년(태조 3)에 태어났을 때 아버지 이방원(李芳遠)은 정안대군(靖安大君)이었지만, 6년 뒤 조선의 제3대 국왕으로 등극했다. 양녕대군에게 이런 변화는 수많은 왕자군(王子君)에서 독존의 지위를 예약하는 엄청난 행운의 도래였다.
기록되지 않은 사소한 실행(失行) 은 분명히 있었겠지만, 적어도 공식적으로 양녕대군은 이때부터 20세 무렵까지 매우 순조로운 성장과정을 거쳤다. 그는 10세 때 이제(李禔)라는 이름을 하사받았고(1402년[태종 2] 3월 8일), 한 달 뒤 원자에 책봉되었으며(4월 18일), 다시 넉 달 뒤에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8월 6일). 세자의 나이가 다소 어렸지만 이처럼 신속하게 후계구도를 결정한 데는 그 사안의 중대성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던 태종의 판단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 시점을 전후로 양녕대군은 능력과 행실에서 두드러진 결함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13세 때 전 총제(摠制) 김한로(金漢老)의 딸과 혼인했고(1407년[태종 7] 7월 13일), 같은 해 9월 25일에는 정조(正朝)를 하례하는 진표사(進表使)로 임명되어 명의 수도에 파견되었다. 이듬해 4월 2일에 귀국하는 긴 여정 속에서 그는 국제질서의 동향과 적지 않은 문화적 충격을 체험했을 것이다. 그는 내정에도 부분적으로 참여했는데, 재이(災異)로 태종이 집무하지 않을 때는 주요한 국무를 대신들과 의논해 결정했으며(1409년 1월 8일) 태종이 편찮았을 때는 문소전(文昭殿)의 삭제(朔祭)를 대행하고 조계(朝啓)에 참석하기도 했다(1409년 8월 1일).
이처럼 양녕대군은 아버지의 냉철하고 과감한 정치적 결단에 힘입어 차기의 권좌를 예약하는 커다란 행운을 선사 받았다. 그리고 그 자신 또한 왕세자로서 수준 이상의 능력을 보이면서 그런 행운은 곧 현실화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성인으로 접어들면서 그는 점차 부왕의 기대에 어긋나는 실행을 저질렀고, 그런 현상이 반복되면서 냉철한 그의 부왕은 다시 한번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양녕대군 개인은 물론 조선의 국운에 관련된 거대한 의미를 가진 결단이었다.
탈선과 항명, 그리고 폐출
널리 알려졌듯이, 양녕대군의 탈선은 주로 여색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 문제는 태종 후반부터 불거졌는데, 1416년(태종 16) 9월 선공부정(繕工副正) 구종수(具宗秀)와 악공(樂工) 이오방(李五方) 등은 여색을 밝히고 사냥을 좋아하는 세자에게 미녀와 매(鷹子)를 바쳤다가 탄로나 유배에 처해졌다.
그를 폐출로 몰고 간 결정적인 사건은 이듬해에 일어났다. 그것은 어리(於里)라는 여인과의 염사(艶事)였다. 그녀는 전 중추(中樞) 곽선(郭璇)의 첩이었는데, 세자가 그녀와 간통했다는 사실이 발각된 것이었다(1417년 2월 15일). 태종은 대노했고 세자를 장인 김한로의 집으로 쫓아보냈다(2월 17일). 세자는 즉시 개과천선하겠다는 긴 맹세의 글을 종묘와 부왕에게 올렸다. 태종은 세자가 허물을 뉘우친다면서 그날로 환궁하라고 용서했다(2월 22일). 연루된 구종수와 이오방 등은 참수되었다.
세자가 이때 진정으로 반성하고 동일한 과오를 반복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국 조선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같은 문제를 다시 일으켰고, 이번에는 결정적인 과오를 저질렀다. 그것은 항명이었다.
이듬해 세자는 어리를 다시 불러들였고, 이번에는 아이까지 갖게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1418년 5월 10일). 태종은 다시 분노했고, 세자의 출궁과 알현 금지를 명령했다. 장인 김한로도 직첩(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을 빼앗기고 죽산(竹山, 지금 경기도 안성)에 부처(付處)되었다.
양녕대군을 폐위로 몰고 간 결정적인 사건은 이때 발생했다. 앞서의 맹세문은 당시의 대표적 문장가였던 변계량(卞季良)이 대신 작성했지만, 이때 세자는 자신에게 내린 부왕의 처벌이 부당하다는 반론을 직접 작성해 올렸다(5월 30일). “이 첩 하나를 금지하다가는 잃는 것이 많고 얻는 것은 적을 것이며, 이제부터는 조금이라도 새 사람이 되어 부왕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요지였다.
“이 말은 모두 나를 욕하는 것”이라는 태종의 개탄대로, 이것은 중대한 항명이었다. 태종은 그 글을 영의정 유정현(柳廷顯), 좌의정 박은(朴訔) 등에게 보이면서 심정을 토로했다. “세자는 그동안 여러 번 불효했지만, 집안의 부끄러움을 바깥에 드러낼 수 없어서 항상 그 잘못을 덮어두려고 했다. 직접 그 잘못을 지적해 그가 뉘우치고 깨닫기를 바랐지만, 이제 도리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싫어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숨기겠는가?”
세자를 교체해야겠다는 태종의 결심은 이 시점에서 거의 굳어졌다고 판단된다. 국왕의 심중을 파악한 의정부ㆍ삼공신ㆍ육조ㆍ삼군도총제부ㆍ각사 등 거의 모든 주요 신하들은 폐세자를 주청했다(6월 2일). 태종은 양녕대군의 아들 중에서 왕세손을 선정하려고 했지만 영의정 유정현 등은 어진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택현〔擇賢〕)고 주장했다. 이튿날 태종은 결국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충녕대군을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했다(6월 3일). 태종의 많은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세종을 후사로 결정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듯이, 이것은 그야말로 조선의 운명을 결정한 중대한 선택이었다.
대부분의 사건은 순간적으로 발생하지만, 그 원인과 조짐은 상당히 일찍부터 형성되고 감지된다. 태종은 셋째 아들의 출중한 능력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고 높이 평가해 왔다. 양녕대군의 첫 탈선이 발각되기 직전의 사례는 그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1416년 2월 8일 태종은 충녕대군을 대동하고 충청도 서산(瑞山)으로 행차했다. 그때 큰비를 만났는데 충녕대군은 [시경]의 ‘빈풍(豳風)’을 인용해 그 의미를 해석했다. 국왕은 크게 기뻐하면서 “충녕은 용맹하지 못한 것 같지만 판단하기 어려운 중대한 일을 결단하는 데는 견줄 사람이 없다”고 격찬했다.
최고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수많은 국무의 개별적 무게를 정확히 가늠해 인력과 재원을 효과적으로 투입하는 판단력이라면, 태종이 보기에 세종은 그런 능력을 가장 탁월하게 보유한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 뒤 세종의 위업이 보여주듯이, 태종의 판단력은 정확했다.
특히 냉혹하고 노회한 국왕이었던 태종의 진의를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세자가 자신에게 도전하지만 않았다면 그를 폐출하는 극한적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역사의 수많은 선례와 현실 정치의 냉혹한 논리에 비추어, 그런 결정은 폐세자의 목숨을 박탈하고 나아가 다시 살육이 난무하는 왕실의 분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록은 폐세자를 결정할 때 “태종이 통곡해 흐느끼다가 목이 메었다”고 적었다. 국왕은 그만큼 고뇌했지만, 양녕대군의 행동은 단순히 여색에 관련된 실행을 넘어 국왕에 대한 도전으로 번졌다. 사적으로는 지극히 가까운 부자 관계지만 궁극적으로는 군신의 논리가 적용되는 왕실의 질서를 고려할 때 태종에게 그것은 묵과할 수 없는 범죄였을 것이다.
폐세자의 남은 삶
양녕대군과 부인 양성부부인(陽城府夫人) 김씨의 합장묘. 서울 동작구 상도동 소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1호.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폐출된 양녕대군은 즉시 강화(江華)로 거처가 옮겨졌다(6월 22일). 51세로 아직 노쇠했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태종은 새로 임명된 세자에게 곧바로 전위(全委)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8월 8일). 그때부터 붕어할 때까지 4년 동안, 태종은 국무의 핵심인 인사와 군정(軍政)을 장악하면서 새로운 국왕이 안정적으로 왕권을 정착시킬 수 있도록 도왔다.
그 뒤 양녕대군은 주로 경기도 이천(利川)에서 거주했다. 정치적 분란의 가능성을 우려한 신하들은 그에게 조금만 잘못이 있어도 격렬하게 탄핵했다. 실제적인 위험의 가능성도 있었다. 1424년 3월 청주(淸州) 호장(戶長) 박광(朴光)과 같은 해 10월 갑사(甲士) 지영우(池英雨)는 “양녕대군이 즉위하면 백성들이 자애로운 덕을 받게 될 것”이라거나 “그가 병권을 장악하려고 한다”는 등의 난언을 퍼트려 처벌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세종은 그런 탄핵이나 난언에 휘둘리지 않았고, 1년에 한 번 정도 그를 불러 우애를 나눴다(예컨대 1432년〔세종 14〕 4월, 1433년 12월, 1434년 1월, 1435년 9월 등). 1438년 1월에는 양녕대군을 서울에서 살도록 했다(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서울과 이천을 오가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이런 사실들은 세종의 인격적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면일 것이다.
자신의 실행으로 권력에서 배제되었지만, 양녕대군은 정치적 관심이 적지 않은 인물이었다고 판단된다. 특히 그는 세조의 집권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1453년(단종 1)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났을 때 양녕대군은 종친의 가장 어른이라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세조의 강력한 정적인 안평대군 (安平大君)의 사사를 강력히 주청해 관철시켰다(10월 17일).
6개월 뒤 양녕대군은 단종 의 사사라는 훨씬 중요한 문제에 개입했다. 그는 영의정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단종과 금성대군 (錦城大君)ㆍ송현수 (宋玄壽) 등의 처단을 강력히 주청했고, 역시 윤허를 얻어냈다. 이런 문제들은 그의 개입이 없었어도 결국은 관철될 사안들이었다. 그러나 종친을 대표한 양녕대군의 적극적인 발언은 그것의 실현을 촉진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뒤 등극한 세조가 양녕대군을 후대한 것은 당연했다. 만년에 양녕대군은 치료차 온천에 자주 갔는데, 그때마다 세조는 관찰사와 환관 등을 보내 극진히 수행케 했다. 또한 양녕대군이 죽음을 앞두고 병고에 시달리자 그의 서자인 이순(李諄)과 이심(李諶)을 승진시켜 기쁘게 해주기도 했다(1462년〔세조 8〕 6월 24일).
양녕대군은 1462년 9월 7일 서울의 자택에서 파란 많은 삶을 마쳤다. 68세의 장수한 나이였고,세 살 아래로 53세에 붕어한 세종보다 12년이나 오래 살았다. 그 날 그의 졸기에 기록된 사평(史評)의 한 부분은 음미할 만하다.
“그는 성품이 어리석고 곧았으며, 살림을 돌보지 않고 활쏘기와 사냥을 즐겼다. 세종의 우애가 지극했고, 그 또한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아 시종(始終)을 보전할 수 있었다.”
끝으로 그의 독특하고 파란 많은 삶은 현대에 여러 문학작품으로 재구성되었다는 사실도 부기(附記)할만하다. 대표적으로 김동인([광공자(狂公子)]), 조흔파([양녕대군]), 박종화([양녕대군]) 등이 그를 다룬 소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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