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능력과 덕망을 겸비한 조선 중기의 명신 - 이덕형

히메스타 2016. 11. 28. 12:48

 

한음() 이덕형(, 1561∼1613)은 오성() 이항복(, 1556~1618)과 함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명신이다. 두 사람은 능력과 경력도 뛰어났지만, 널리 알려져 있듯이, 막역한 친구였다. 이항복이 다섯 살 위여서 지금으로 보면 선후배 사이에 가깝지만, 10대 후반부터 그들은 나이를 잊고 사귀었다. 그 우정은 지금까지 회자되는 수많은 일화를 낳았다. 이덕형은 왜란을 극복하고 당쟁을 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가문과 출세

조선 중기의 문신인 한음 이덕형 선생의 초상화로, 현재 ‘한음영당’에 보존되어 있다. 충남 당진시 송악면 소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8호.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이덕형의 본관은 광주()로 자는 명보(), 호는 한음()이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정2품) 이민성()이고 어머니는 문화 유씨(유예선()의 딸)였다.

그는 1561년(명종 16) 2월 12일 서울 남부() 성명방(- 지금의 을지로·충무로·남대문로 일대)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율곡 이이도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났듯이, 당시는 남귀여가혼(- 남자가 결혼한 뒤 처가에서 일정 기간 사는 혼인 풍습)의 영향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는데, 이덕형도 그런 사례였다.

그의 가계에서 주목할 만한 사항은 그가 영의정 이산해(, 1539~1609)의 사위였다는 것이다. 이덕형은 16세 때인 1577년(선조 10) 이산해의 삼촌토정() 이지함(, 1517~1578)의 추천으로 영의정의 사위가 되었다.

흥미롭게 오성 이항복도 도원수 권율의 사위였다. 절친했던 두 사람은 당대의 명사를 장인으로 모시는 영광도 공유한 것이다. 늘 그렇듯이 결혼에는 가문이나 그 밖의 조건도 무시할 수 없지만, 사람 자체가 가장 중요할 것이다. 한 시대를 대표한 중신답게 이산해와 권율은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었다.

이덕형과 이항복은 기지와 해학으로 유쾌하고 장난스러운 일화들을 양산했다. 주로 구전설화로 전해지는 그 이야기들 중에는 스승을 놀린 것이 재미있다. 두 소년이 서당에서 같이 공부할 때 스승이 졸자 불이 났다고 외쳐 놀라게 해 깨웠다. 무안해진 스승은 "잔 것이 아니라 공자님을 만나고 온 것"이라고 변명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두 소년이 졸기 시작했다. 스승이 꾸짖으려고 하자 두 소년은 자신들도 공자님을 뵙고 왔다고 말했다. 스승이 "그럼 공자님이 뭐라고 하셨느냐"고 묻자 그들은 "공자님은 스승님을 뵌 적이 없답니다"라고 대꾸해 스승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그뒤 이덕형은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1580년(선조 13) 19세의 어린 나이로 별시 문과에 급제했다. 그 시험에서는 이항복, 그리고 뒤에 병조참판을 지낸 이정립(, 1556~1595)도 함께 급제했는데, 그 해의 간지()를 따서 그들을 ‘경진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덕형은 순조롭고 화려한 출세를 구가했다. 그는 이조정랑(정5품)·직제학·부제학·대사간(이상 정3품)·대사헌(종2품)·대제학(정2품) 등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이 시기의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사항이지만, 이덕형의 삶에서도 주요한 분수령은 임진왜란과 당쟁이었다. 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덕형은 31세의 이조참판 겸 대제학이었다(1591년 12월 25일에 임명됨)

외교적 활약

임진왜란에서 이덕형이 세운 주요한 공로는 외교 분야에 집중되었다. 왜란 발발 직후 그는 명에 청원사(使)로 가서 그 사행의 이름대로 원군을 요청하는데 성공했다. 이듬해(1593) 1월 이덕형은 이여송()의 명군과 함께 평양을 수복했다.

이덕형은 임란 동안 형조·병조(3회)·이조판서(2회)의 요직을 역임했다. 특히 군무를 총괄하는 병조판서를 세 번이나 맡았다는 사실은 전란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그의 능력을 보여준다.

특기할만한 다른 일로는 1597년 2월 이순신()이 하옥되자 그를 적극적으로 변호했다는 사실이다. 임란이 종결될 때까지도 이덕형은 아직 37세의 젊은 대신이었다.

당쟁의 여파와 사망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당쟁은 격화되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광해군을 지지한 북인()은 왕위계승과 관련된 분쟁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무리수에 가까운 이런 조처는 당연히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고, 신하들은 당파에 따라 찬반의 양론으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덕형은 남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광해군의 즉위에 중요한 공로를 세웠다. 임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세워 국본()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광해군이 후사로 책봉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 뒤 1608년 선조가 붕어하자 진주사(使)로 명에 파견되어 책봉 칙서를 받아온 것도 중요한 성과였다. 다섯 달이나 걸린 사행이었다는 사실은 그 임무의 지난함을 알려준다.

이덕형 묘소.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소재. 경기도 기념물 제89호.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북인과 밀접하게 보이는 이런 행보는 장인이 북인의 거두인 이산해였다는 사실과도 무관치 않지만, 그보다는 이덕형이, 당파를 초월하지는 않았지만, 당색에서 상당히 자유로웠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서인인 이항복과의 우정도 그런 자세의 결과였을 것이다.

이덕형은 불과 37세의 나이로 정승의 반열에 올랐고(1598년(선조 31) 4월 우의정, 같은 해 10월 좌의정) 4년 뒤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다(1602년). 그동안에도 훈련도감 도제조(1600년)와 충청·전라·경상·강원 4도의 도체찰사(使)를 역임했다(1601년). 41세의 영의정은 조선 역사 전체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그 뒤에도 이덕형은 두 번이나 더 영의정을 역임했고(1609년(광해군 1) 9월, 1612년 9월) 익사형난공신()과 한원()부원군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덕형은 당쟁의 여파 속에서 최후를 맞았다. 1613년(광해군 5) 여름 인목대비를 폐출하려는 시도가 일어나자 그는 이항복과 함께 강력히 반대했고, 탄핵을 받자 즉시 용진(, 지금의 양평군)으로 낙향했다. 그때 이항복도 같은 사건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망우리에 동강정사()를 짓고 동강노인()이라고 자칭하면서 지냈다.

9월에는 삭탈관직의 명령이 떨어졌다. 한 달 뒤인 10월 9일 그는 용진에서 세상을 떠났다. 52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그 날 [광해군일기]의 졸기는 그의 타계를 이렇게 기렸다.

전 영의정 이덕형이 세상을 떠났다. …… 이덕형은 일찍부터 재상이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문학()과 덕기()는 이항복과 대등했지만, 관직은 이덕형이 가장 앞서 38세에 이미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임진왜란 이후 두드러진 공로를 많이 세워 중국과 일본 사람 모두 그의 명성에 복종했다. 사람됨이 솔직하고 까다롭지 않았으며 부드러우면서도 곧았다. 또 당론()을 좋아하지 않았다. ……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멀고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고 애석해 했다(1613년(광해군 5) 10월 9일).

실록의 평가대로 이덕형은 30대의 나이에 재상에 올라 영의정을 세 번이나 역임하는 화려한 경력을 성취했다. 인재는 위기 속에서 더욱 빛나듯이, 그것은 임란과 당쟁의 격동 속에서 이룬 성취였다.

개인의 삶도 그렇지만, 어떤 갈등이나 분쟁은 없을 수 없고 없는 것이 반드시 좋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발전은 평온과 안정 속에서도 이뤄지지만, 갈등과 대립을 거치면서 형성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의 당쟁도 그런 시각에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의 많은 인물들이 당쟁에 자신의 재능을 소모하고, 그런 과정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은 분명히 안타까운 일이다. 이덕형과 그의 벗 이항복은 국난을 극복하고 당쟁의 초기 국면을 통과하면서 많은 업적과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대표적인 명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