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증(尹拯, 1629∼1714)은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를 그렇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은 노론과 소론의 분화였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 1610∼1669)에서 비롯된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의 이런저런 갈등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고, 조선 후기의 정치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윤증은 송시열과 함께 조선 후기 ‘산림(山林)’의 전형적 삶을 보여주었다고 말할 만하다. 송시열은 드물게 관직에 나아갔지만, 그는 평생 벼슬하지 않았고 거의 모든 시간을 충청도 일대에서 머물렀다.
역사에 굵은 글씨로 기록된 인물들의 삶을 짧은 지식과 얕은 생각으로 재단하거나 평가하는 것은 무척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다. 어떤 책에서 한 사람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것은 가까운 이의 배신이라는 대목을 읽었다. 그때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솔직한 사과라고 그 책은 말했다. 깊이 공감되는 부분이었다. 윤증과 송시열이 주고받은 상처의 크기와 그 당부(當否)를 가리는 것은 이 글의 범위는 물론 필자의 능력을 크게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이미 수많은 글에서 그 논쟁의 과정과 영향을 자세히 서술했지만, 그것을 다시 한번 간략하되 차분하게 되짚어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출생과 성장
윤증은 자가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명재라는 호는 큰아버지 윤순거(尹舜擧)가 지어준 것이다.
본관은 파평으로, 고려시대부터 유서 깊은 명문이다. 시조는 고려 태조를 도와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에 책봉된 윤신달(尹莘達)이며 ‘동북9성 개척’으로 유명한 윤관(尹瓘. ?∼1111)과 그의 아들 윤언이(尹彦頤)에 와서 명문으로 위상을 굳혔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그의 가문은 윤곤(尹坤, 좌명공신·이조판서)ㆍ윤희제(尹希齊, 판한성부사)ㆍ윤배(尹培, 홍문관 교리)ㆍ윤사은(尹師殷, 곡성〔谷城〕현감)ㆍ윤탁(尹倬, 한성부좌윤·동지성균관사)ㆍ윤선지(尹先智, 충청도 병마절도사)ㆍ윤돈(尹暾, 좌승지에 추증)ㆍ윤창세(尹昌世, 이조참판에 추증)를 거치면서 일정한 지위를 유지했다.
윤증의 조부 윤황(尹煌)은 대사간을 지내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은 비중 있는 인물이었으며,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사위였다. 아버지는 앞서 말한대로 윤선거이고 어머니는 공주(公州) 이씨(생원 이장백〔李長白〕의 딸)다.
윤증은 1629년(인조 7) 5월 28일에 한양 정선방(貞善坊, 지금 종로 3가 일대)의 외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그의 자질을 보여주는 일화가 몇 개 있다. 7세 무렵 할머니인 성씨 부인(성혼의 딸)이 손자들에게 가묘(家廟)에 참배하도록 했는데, 끝나자마자 다른 아이들은 웃고 떠들어댔지만 윤증은 두 손을 단정히 모으고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성씨 부인은 남편 윤황에게 “이 아이는 특별하다”고 말했다. 10세 무렵에는 <거미를 읊다〔詠蜘蟵〕>라는 시를 지었는데, “거미가 매달려 그물을 치니 / 가로지른 다음엔 위로 아래로 / 잠자리에게 부탁하노니 / 조심해 처마 밑엔 가지 말기를(蜘蟵結網罟, 橫截下與上, 爲語蜻蜓子, 愼勿簷前向)”이라는 내용이었다. 좌의정을 지낸 조익(趙翼, 1579∼1655)은 그 시를 보고 “이 아이가 뜻을 채워나가면 어짊을 다 쓸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높아지는 명망
윤증의 초상. 보물 제 1495호. 충남 공주시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소재.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윤증의 외형적인 삶의 방향은 매우 일찍 결정되었다. 병자호란 때 생환한 아버지 윤선거의 행동 때문이었다. 1642년(인조 20) 윤선거는 충청도 금산(錦山)에 정착했고, 윤증도 과거와 벼슬을 포기하고 아버지와 함께 거처했다. 13세의 어린 나이였다.
윤증은 18세 때인 1647년(인조 25) 10월에 안동 권씨와 혼인했다. 장인은 저명한 예학자이자 한성부 좌윤을 지낸 탄옹(炭翁) 권시(權諰, 1604∼1672)였다. 윤증의 주요한 스승은 권시를 비롯해 김집(1574∼1656)ㆍ유계(兪棨, 1606∼1664)ㆍ송시열ㆍ송준길(宋浚吉, 1606∼1672) 등 당대의 명사들이었다. 이것은 그의 자질 뿐만 아니라 아버지 윤선거의 위상과 평판을 보여주는 지표일 것이다.
스승 중에서 유계는 윤증의 대책(對策)을 보고 “양한(兩漢: 전한과 후한)의 문장이자 정주(程朱: 정자와 주자)의 의논”이라고 격찬했다. 윤증은 김집을 정성껏 모셨으며, 그가 별세하자 기일에는 항상 소식(素食)하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제사에 반드시 참석했다. 송준길과는 1652년(효종 3) 1월에 회덕(懷德)으로 찾아가 사제 관계를 맺었다.
윤증의 삶과 가장 큰 관련을 가진 인물인 송시열과 만난 것은 28세 때인 1657년(효종 8)이었다. 그는 김집의 권유로 회덕으로 가서 22세 연상의 송시열을 스승으로 섬겼다.
윤증은 일찍이 과거와 벼슬을 포기했지만, 이미 20대 후반 무렵 상당한 명망을 얻었다. 그는 1658년(효종 9)에 학문과 행실이 뛰어난 선비를 천거하라는 왕명으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천거되었다. [명재연보]에 따르면 “이때부터 윤증의 명망과 실덕(實德)이 점차 높아졌다.”그뒤 윤증의 일생은 징소(徵召: 벼슬을 권유하면서 부름)와 사직의 과정이었다고 말할 만했다. 그는 85세의 노령으로 별세할 때까지 공조좌랑ㆍ사헌부 지평ㆍ세자시강원 진선ㆍ사헌부 장령ㆍ집의ㆍ호조참의ㆍ대사헌ㆍ찬선ㆍ이조참판ㆍ우참찬ㆍ이조판서ㆍ좌참찬ㆍ좌찬성ㆍ우의정 등 수많은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한번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뒤 40대 중반까지 윤증의 삶은 일반적인 모습으로 이어졌다. 두 아들 행교(行敎, 1661년 5월)와 충교(忠敎, 1664년 10월)를 얻었고, 부친(1669년 4월)과 장인(1672년 1월)을 여의었다. 스승 유계(1664년)와 송준길(1672년)이 별세하기도 했다.
윤증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갈등이 촉발된 것은 44세 때인 1673년(현종 14)이었다. ‘회니시비(懷尼是非)’라는 그 문제는 결국 노ㆍ소분당이라는 거대한 사건으로 이어졌다.
‘회니시비’의 전개
널리 알려졌듯이 ‘회니시비(懷尼是非)’는 송시열과 윤증이 살던 지명인 회덕(懷德, 지금 대전시 대덕구 일대)과 이성(尼城, 지금 충남 논산시 일대)에서 따온 명칭이다. 그 발단은 1673년 11월, 윤증이 송시열에게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墓碣銘: 묘비에 새겨진 죽은 이의 행적과 인적 사항에 대한 글)을 부탁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근본적 원인은 좀 더 깊은 곳에 있었다. 그것은 윤휴(尹鑴, 1617~1680)를 둘러싼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찍이 윤휴가 주자의 주석과 다른 견해를 제시하자 송시열은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했고, 윤휴와 친분을 유지하던 윤선거에게도 그와 절교할 것을 요구했다. 송시열의 증언에 따르면, 1665년(현종 6) 산사에서 만났을 때 “윤휴는 흑(黑)이고 음(陰)이며 소인(小人)”이라는 자신의 견해에 윤선거도 동조했다([명재연보]).
그러나 윤휴를 보는 송시열과 윤선거의 시각은 그 뒤에도 일치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윤선거가 별세하기 직전에 쓴 ‘기유의서(己酉擬書)’는 그런 측면을 보여준다. 실제로 보내지는 않았지만, 윤휴와 허목을 너무 배척해서는 안된다는 그 편지의 생각은 이런저런 경로를 거쳐 송시열에게 알려졌을 것이다.
이런 사정은 당시에 대체로 감지되었던 것 같다. 처음에 윤증이 송시열에게 묘갈명을 부탁하려고 하자 지인들은 말렸다. 그러나 윤증은 “평소에 서로 의견이 다 맞지는 않았어도 부친의 마음은 늘 간격이 없으셨다”면서 강행했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결국 어긋났다.
윤증은 묘갈명을 의뢰하면서 참고 자료로 박세채가 지은 [행장]과 ‘기유의서’를 보냈다. 그 편지는 송시열이 보기에 불편한 내용이었지만, 윤증은 아버지가 간절하게 책선(責善)한 뜻을 끝내 묻어버릴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의 과정과 결말은 잘 알려져 있다. 송시열은 ‘기유의서’를 읽고 불쾌하게 생각했고, [연보]에서 윤휴가 윤선거의 영전에 제문을 보낸 사실을 보고는 절교의 진위를 의심했다. 송시열이 작성해 보낸 묘갈명에는 그런 감정이 역력히 묻어 있었다.
송시열은 윤선거의 생몰년과 관력을 간단히 적고 “나는 공에게 견주면 뽕나무벌레와 고니 이상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는 사람이어서, 그 내면의 깊은 부분을 엿보기에 부족하다. 더구나 덕을 서술하는 글을 쓰려니 더욱 아득해 어떻게 말을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전제한 뒤 박세채의 행장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진실한 현석(박세채의 호)이 참으로 잘 선양했기에 나는 따로 서술하지 않고 그대로 따라 이 묘갈명을 지었다(允矣玄石, 極其揄揚, 我述不作, 揭此銘章)”고 썼다.
윤증은 당혹했고, 그 뒤 거듭 송시열에게 개정을 부탁했지만(1676년〔숙종 2〕과 1678년)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것으로 그 대체가 결정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관계를 완전히 확정하는 사건이 다시 한번 발생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의서’였다.
신유의서의 작성
당쟁의 새로운 국면은 환국이었다. 첫 번째 환국은 1680년(숙종 6)에 서인이 집권한 경신환국이었다. 그때 윤증은 51세였고, 송시열은 73세였다. 환국이 일어난 뒤 서인의 주요 대신인 김수항(金壽恒)ㆍ민정중(閔鼎重) 등은 윤증이 선비들의 큰 추앙을 받고 있으니 조정으로 불러 경연에 참석케 하라고 추천했다. 윤증도 송시열이 해배(解配)되어 회덕으로 돌아오자 찾아가 만났다. 이런 일들은 두 사람의 결별과 노ㆍ소의 분당이 아직 완전히 확정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환국 이후 두 사람(과 그들이 주도한 당파)은 남인을 처리하는 정치적 문제에서 이견을 보였다. 송시열은 대의를 철저히 따라 엄격한 처벌을 고수한 반면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와 비슷하게, 온건하고 절충적인 대응을 선호했다. 이런 정치적 판단의 기저에는 주자학을 철저히 신봉하는 송시열과 양명학도 인정하는 윤증의 학문적 차이도 자리잡고 있었다.
이듬해 윤증은 송시열에게 보내는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신유년에 작성했고 역시 보내지는 않았기 때문에 ‘신유의서’라고 불리는 편지다. [명재연보]에 실린 그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송시열을 지칭하면서―인용자) 주부자(朱夫子)가 경계한 “왕도와 패술을 함께 쓰고 의리와 사리를 아울러 행사한다(王覇竝用, 義利雙行)”는 평가를 면하지 못할 듯합니다. 근년 이래로 마음 속의 의심이 날로 더욱 커지기에 감히 한번 생각을 다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삼가 살펴보건대 문하의 기질은 강덕(剛德)은 많지만 그 쓰임이 천리(天理)에 순수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이 덕의 병통이 되니, 참으로 “사욕을 이기기 어려움”이라고 말할 만합니다. 사욕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그 병통을 바로잡아 그 덕을 온전히 하지 못하니,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이 병통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명재연보]는 “이 편지의 대의는 윤선거가 기유의서에서 충고하고 경계한 뜻을 거듭한 것으로 원인을 기질의 병통으로 보느냐 본원적인 문제로 보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 편지는 박세채의 만류로 결국 부치지 않았다. [명재연보]에 따르면 윤증은 매우 안타깝고 답답했지만 세도에 허물을 끼친다는 말에 공감해 결국 편지를 부치는 것을 그만두었으며, 그렇게 결정한 뒤에는 그 편지를 깊이 감춰두고 자손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편지는 3년 뒤 송시열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684년(숙종 10) 송시열의 손자 송순석(宋淳錫)이 박세채의 집에서 몰래 베껴 조부에게 드린 것이다. 송시열의 답장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데, 마지막 구절은 날카로운 여운을 남긴다(역시 [명재연보]에서 인용).
자네가 지적한 것은 모두 나의 실제 병통이지만, “의리와 사리를 아울러 행사하고 왕도와 패술을 함께 쓴다”는 대목은 더욱 지나치게 나를 인정해 관대하게 말한 것임을 알겠네. 그러나 편지를 읽은 뒤로는 마치 침으로 몸을 찌르는 것만 같네. 비유하자면 환자가 고질병이 악화되어 죽으려 할 때 갑자기 휼륭한 의원이 신단(神丹)의 묘약을 처방해 주어 살 길을 찾게 된 것과 같네. 그 훌륭한 의원의 본심이 과연 환자를 사랑하는 뜻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은혜는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같은 해 여름 최신(崔愼)이라는 인물이 신유의서를 근거로 윤증이 스승을 배반했다고 비판했고, 김수항ㆍ민정중 등 대신들도 윤증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송시열을 헐뜯었으니 다시는 유현을 대우하는 예의를 적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숙종은 윤허했다.
[명재연보]에 따르면 “이때부터 시의(時議)가 시끄럽게 일어나, 위로는 대신(大臣)과 삼사(三司)부터 아래로는 향곡(鄕曲)의 어리석은 유생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뜻을 받들고 눈치를 살펴 무리 지어 비난하고 헐뜯었다.”고 기록했다.
신유의서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윤증은 55세, 송시열은 77세였다. 당시 조선 정치의 중심에 있던 두 사람의 결별로 당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별세와 그에 대한 평가
논산명재고택. 윤증이 지었다고 전하는 집으로, 후대에 수리를 통해 지금까지 양호한 보존상태로 전해져 온다. 중요민속문화재 제 190호. 충남 논산시 노성면 소재.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이 사건이 일어난 5년 뒤 송시열은 기사환국(1689년)으로 사사되었지만, 윤증은 30년을 더 살았다. 노년의 삶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1700년(숙종 26) 희빈 장씨가 사사될 위험에 처하자 상소를 올려 동궁(뒤의 경종)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윤증은 1714년(숙종 40) 1월 24일에 85세의 긴 삶을 마쳤다. 위독해지자 그는 상을 치를 때 중국(청)의 물품을 사용하지 말고, 묘표(墓表)에는 관직이나 재호(齋號)ㆍ‘선생’이라는 표현 대신 ‘징사(徵士)’라고만 쓰라고 당부했다. 평생 동안 징소의 은혜를 입은 것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숙종은 “유림은 도덕을 숭상하고 / 소자도 일찍이 흠앙했네 평생 한 번 만나 보지 못했기에 / 사후에 한이 더욱 깊어지네(儒林尊道德, 小子亦甞欽. 平生不識面, 沒後恨彌深)”라는 추모시를 내렸다. 그러나 2년 뒤 병신처분(1716년. 숙종 42)으로 윤증을 내쳤다. 소론이 지지한 경종이 즉위한 뒤 관작이 회복되고 문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짐으로써 윤증의 명예는 곧 회복되었다.(1722년. 경종 2).
윤증과 관련해 추가로 언급할 만한 사항은 그의 처신과 종가일 것이다. 그는 지나친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면서 후손들에게 양잠을 금지했다. 이런 태도는 고결한 선비정신의 실천으로 높이 평가된다. 이런 적선(積善)의 결과 그의 집안은 동학과 한국전쟁 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종택(충남 논산시 노성면 소재. 중요민속자료 제190호)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되며, 큰아버지 윤순거가 세운 교육시설인 종학당(宗學堂, 충남 논산시 노성면 소재. 시도유형문화재 152호)은 47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바람직한 현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학연과 혈연ㆍ지연이 아직도 강고하게 남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당쟁은 아직도 민감한 현재적 주제다. 당쟁의 핵심적 국면을 형성한 윤증과 송시열의 관계는 더욱 그렇다. 윤증을 다룬 이 글에서는 그의 문집인 [명재유고]에 실린 [명재연보]를 주로 이용했으며, 송시열과 관련된 자료와 면밀히 대조하지는 않았다. 그런 측면을 감안하고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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