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 교수가 쓴 '사다리 걷어차기'는 가난한 나라는 왜 여전히 가난할 수밖에 없으며, 부자 국가들은 국제 규제에 저촉되는 선에서 가난한 국가들을 어떻게 조직적으로 착취하는지 잘 설명해 주고 있다."(비정부기구단체 옥스팜)
"장하준 교수는 새로운 경제 개발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이다."(캐나다 작가협회)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는 세계에서 가장 바쁜 한국인 중 한 명이다. 세계무역은 공평하지 않으며 신자유주의 폐해가 글로벌 경제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것이라는 그의 경고가 현실화되자 세계 경제학계는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가 경제 부흥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해 오던 개발도상국가들에 그의 훈수는 경제 체질 개선의 보약이 되고 있다. 현실을 직시하고 각국에 맞는 다양한 경제 개발 모델을 수립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수많은 개발도상국가들이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요즘 멕시코·베트남·브라질 등 수많은 개발도상국가들을 돌아다니며 바쁘게 보내고 있다. 관련 학계에서는 장 교수를 한국인 중 노벨경제학상에 가장 근접해 있는 경제학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장 교수는 "미국과 영국 등 이번 글로벌 경제 위기의 진원지가 된 나라에서는 실업률, 소비자 신뢰지수 등이 계속 악화되고 있다"면서 "대공황 때와 마찬가지로 거품이 꺼지면서 경기가 또다시 하강 곡선을 그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전망했다. 2010년 우리 경제에 대해 장 교수는 "이번 위기는 경제의 과도한 금융화가 주원인이기 때문에 한국은 금융업보다 제조업을 집중 육성하는 등 경제 체질을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번 신년 인터뷰는 장 교수가 지난 2009년 12월 신한금융투자 포럼 기조연설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진행됐으며 추가 질문은 e메일로 나눴다. 장 교수는 장재식 전 국회의원(14~16대, 산업자원부 장관)의 아들이며 장하석 런던대 과학철학과 교수가 동생이다. 장하진 전 여성부장관,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학장과는 사촌지간이다.
글로벌 경제 위기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이번 위기 원인은 지나친 규제 완화와 개방을 통해 우리가 도저히 다룰 수 없는 복잡한 시스템이 만들어졌다는데 있습니다. 금융 혁신(financial innovation)이라는 이름 아래 금융 당국은 물론이고 금융상품을 평가하는 신용평가 기관, 그리고 감독자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한 파생상품이 계속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고장이 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특히 2000년에 정보기술(IT) 거품이 꺼지면서 이를 '돌려 막기' 하느라 미국이 지나치게 낮은 이자율을 유지한 것이 문제를 더 키웠다고 봅니다.
글로벌 경제에 대한 더블 딥 논란이 거셉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계경제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정말 알기 힘듭니다. 가능성은 낮지만 여러 가지가 잘 맞아 들어가면 완만하게 회복이 계속될 수 있죠. 하지만 자산 시장에 끼어 있는 거품이 급격히 꺼지면 더블 딥으로 갈 수 있고 상황에 따라선 자칫 1990년대 일본처럼 장기 불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번 기회에 파생상품, 신용평가 기관, 금융회사 보너스 등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지 않으면 이 같은 사태는 5년, 10년 후 또 찾아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서둘러 규제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2010년 한국 경제에 대해선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단기적으로 한국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빠르게 회복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이번 위기는 애당초 우리 내부 문제였다기보다 외부 충격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죠. 우리가 잘못해서 급속한 위기에 빠진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특별히 잘해서 빨리 탈출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세계경제가 재추락한다면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경제 악화 속도가 더 빠를 공산이 큽니다.
최근 한국 내에선 영미주의 경제 모델의 한계를 지적하며 유러피언 경제·사회 시스템을 도입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유럽 나라들도 각양각색인지라 '유럽 모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북유럽형·독일형·프랑스형 등 여러 가지 모델이 있죠. 그러나 유럽 나라들에 공통적인 점이라면 복지제도와 각종 노동시장 규제를 통해 전 국민에게 일정한 생활수준과 안정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럽 국가들은 미국보다 노동시간이 10~30% 짧기 때문에 노동시간당 소득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대부분의 서유럽 나라들이 미국보다 생활수준이 높습니다. 일부에서는 유럽 경제가 활력이 떨어졌다고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는 유럽 국가들의 성장률이 미국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역사적·지리적 조건 등으로 볼 때 유럽에서 배울 점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는 4대강 사업 등 대규모 토목사업으로 내수를 진작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토목사업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단기적으로는 다른 사업에 비해 고용 창출 효과가 크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장기적인 효과입니다. 제 판단으로는 지금 한국경제 발전에 있어 필요한 정부 지출은 토목사업보다 연구·개발비 투자나 복지 확대입니다. 연구·개발비 투자는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복지국가를 만들게 되면 한국 경제의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세종시 논란이 뜨겁습니다.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어떻습니다.
경제학적으로 '집적의 이익'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정부가 규제하지 않으면 수도권에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물론 우리나라 같이 지나치게 집중되면 과밀에 따른 비용이 생기는데 시장주의 경제학자들은 '과밀 비용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수도권으로 몰려드는 것은 아직도 과밀 비용보다 집적의 이익이 더 크기 때문이 아닌가'라며 이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반대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모두 함께'가 아니라 '나만' 옮기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정부의 개입은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다만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행정수도는 경제적 효과가 미미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한국과 같이 국토가 작은 국가에서 공주·연기군 정도에 행정수도를 만들어봤자 분산 효과가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기왕 행정수도를 만들려면 전라남도나 경상남도쯤에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미국과 영국 등이 투자은행(IB)에 대해 규제하는 것과 달리 한국은 자본시장통합법 시행 이후 IB에 많은 힘을 실어주는 느낌입니다.
19세기에 생긴 투자은행이라는 것은 원래 유망한 기업에 돈을 빌려 주고 그 대가로 주식을 받아 놓았다가 그 기업이 성공하면 주식을 팔아 이익을 챙기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정부가 장려하는 투자은행 모델은 상업은행에 비해 최소한의 규제만 받고 부채비율을 3000%까지 유지해 가며 고수익·고위험 상품에 투자하는 사업 모델입니다. 만약 한국 정부가 아직도 이미 파탄이 난 '투기적 투자은행' 모델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이는 매우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축통화 변경을 놓고 말이 많습니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세계 통화 질서는 물론 세계경제 축이 어떤 변화를 보일지 궁금합니다.
2008년 위기를 계기로 달러 패권은 일단 막을 내리게 됐다고 봐야 합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세계 중앙은행 외화보유액 중 달러 비율은 2001년 71.5%에서 2009년 (6월 기준) 62.8%로 감소했습니다. 앞으로 더 내려갈 겁니다. 당장 달러에 대한 대안은 위안화가 아니라 유로화입니다. 세계 중앙은행 외화보유액에서 유로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1년 19.2%에서 2009년 27.5%로 증가했습니다. 가능성은 낮지만 다시 한 번 금융 위기가 와서 영국의 파운드화가 또 평가절하되면 영국은 파운드를 포기하고 유로화에 가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겁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기축통화의 무게중심이 급격하게 유로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더 이상 지금까지와 같은 식으로 돈을 찍어 적자를 내면서 수입을 할 처지가 되지 못해 1960~70년대에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계속 국제수지 적자에 시달릴 공산이 큽니다.
최근 아시아 위기론이 모락모락 피어오릅니다. 우리 경제에 암초가 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인플레를 이야기할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수요가 부족하기 때문이죠. 지금 아시아 나라들이 걱정할 것은 자산 시장에 끼어 있는 거품입니다. 특히 달러 캐리 트레이드로 외부 자금이 많이 유입돼 자산시장의 거품을 키우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이 때문에 브라질은 이미 외국 자본에 대한 규제책을 도입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대응책을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외부에서 투기성 자금이 밀려 들어왔다가 어떤 계기로든 한번에 빠져 나가면 큰 충격이 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약력: 1963년 서울 출생. 86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석사·박사.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부 교수(1990년~현). 유엔무역개발기구 연구주임(1995~96년).
저서: '사다리 걷어차기(2004)', '쾌도난마 한국경제(2005)', '나쁜 사마리아인들(2007)',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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