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하나의 놀이라면 이것이 그 놀이의 규칙이다. 당신에게는 육체가 주어질 것이다. 좋든 싫든 당신은 그 육체를 이번 생 동안 갖고 다닐 것이다.”체리 카터 스코트, <삶이 하나의 놀이라면> 중 부분. 류시화 옮김,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오래된 미래, 2005.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는 이 시의 첫 부분대로 우리의 몸은 우리가 삶을 마칠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다. 내 몸의 어떤 부분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거나 불편해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 몸은 대단히 민감하고 때로는 매우 연약하다. 작은 상처가 나거나 체온이 조금만 바뀌어도 우리는 상당히 불편해 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푹 자고 일어나 몸이 개운할 때면 마음도 활력으로 가득하다. 이처럼 몸은 우리의 마음을 포함한 모든 것이 담겨있는 섬세한 그릇이다. 이런저런 변화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건강하고 안정된 몸과 마음을 가꾸고 유지하는 것은 그래서 인간의 오랜 바람이자 목표가 되어 왔다.
의학은 그런 목표를 이루려는 의지와 도전의 과학적 결정(結晶)이다. 유사 이래 세상의 수많은 뛰어난 지성은 인간의 몸과 마음을 탐구해 다양한 비밀을 밝혀왔다. 수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차이를 보인 것처럼 동양과 서양은 의학에서도 서로 다른 경로로 발전했다. 우리나라의 고유한 의학인 한의학(韓醫學)은 동양의학에서 독특하고 뛰어난 성취를 이뤘다고 평가된다.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 1837~1900)는 허준(許浚)과 함께 한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이름을 잘 모르더라도 ‘태양인’이나 ‘태음인’ 같은 단어는 익숙할 것이다. 20세기로 접어들던 무렵 이제마는 체질에 따라 치료법을 달리 적용하는 ‘사상의학(四象醫學)’을 창시해 한의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그의 학설은 지금까지도 가치를 인정받으며 계승되고 있다.
출생과 성장
조선시대에 의원의 신분은 양반이 아닌 중인이었고, 의과(醫科)는 문과나 무과가 아닌 잡과의 한 과목이었다. 이런 불리한 조건 때문에 그들에 관련된 기록은 그리 풍부하게 남아 있지 않다. 한의학에 큰 발자취를 남긴 허준도 그렇고, 이 글에서 다룰 이제마도 마찬가지다. 이제마에 관련된 전기적 기록은 근현대의 저명한 국학자인 이능화(李能和, 1869~1943)가 쓴 짧은 전기가 거의 유일하며(<이제마>, 이훈구 외, [조선 명인전], 조선일보사 출판부, 1939. 1988년 재간행), 그밖에 [동무유고(東武遺稿)] 등에 편린이 조금씩 남아 있을 뿐이다.
이제마는 헌종 3년(1837) 3월 19일 함경도 함주군(지금의 함흥) 평서면(平西面)에서 진사 이반오(李攀五)와 주모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다.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그는 서자(庶子)가 되었다. 일화에 따르면 ‘제마’라는 다소 독특한 이름은 어머니가 그를 본가로 데려왔을 때 할아버지가 제주도 망아지를 받는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진사라는 아버지의 지위가 보여주듯이(할아버지도 진사였다) 그의 집안은 함흥에서 상당히 학식 있는 가문이었다. 이제마는 어렸을 때 큰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워 영특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이능화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10세 무렵 문리를 깨쳐 독서에 몰두했으며, 특히 [주역]을 탐독해 몇 년 만에 그 이치를 통달했다. 20세 무렵에는 조선을 거쳐 만주까지 두루 유람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의주의 부호 홍씨 집에 유숙하면서 거기 소장된 수많은 도서를 읽어 지식을 넓혔다.
그러나 그에게는 서자라는 커다란 신분적 장벽이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문반이 아닌 무반으로 입신하려고 생각했고 무과를 준비했다. ‘동무’라는 호는 그런 의지를 담은 것이었다. 뒤에서 보듯이 실제로 그의 주요한 현실적 출세는 무반의 경력에서 이룬 것이었다.
그가 의학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 자신의 질병을 치료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식도 협착증ㆍ구토증과 손발이 마비되는 신경염 등 질병이 많았는데, 여러 의원에게 치료를 받아도 효험이 없자 스스로 의학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상의 전환
이제마의 삶에서 중요한 전기는 서른 살 무렵에 찾아왔다. 그는 함경도 정평(定平)으로 가다가 어느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가게 되었는데, 그 집 벽지에 글이 씌어진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무심코 읽어보다가 그 내용에 깜짝 놀랐다. 그 글은 그 집 주인의 돌아가신 아버지인 운암(芸菴) 한석지(韓錫地, 1709~1791)가 쓴 [명선록(明善錄)]의 일부였다. 한석지는 정조 때의 학자로 현실과 동떨어진 이념에 치우치던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학문과 실천의 결합을 중시한 양명학을 받아들인 인물이었다. 특히 “성현이 되는 것은 오직 배움에 달렸다(夫作聖作賢, 專在於學矣)”는 한석지의 사상은 서자라는 불리한 조건을 갖고 있던 이제마에게 큰 각성과 용기를 주었다.
의학의 연마
이제마 초상.
한석지의 사상에서 큰 감화를 받은 이제마는 학문과 의술의 연마에 더욱 매진했다. 전근대의 학문은 세분되지 않고 종합화된 경향이 짙었는데(내의원〔內醫院〕의 최고 책임자를 대부분 삼정승이 겸임한 것은 그런 측면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이제마의 사상의학 또한 [주역]을 중심으로 한 유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고 평가된다. 그의 학문과 관련해서는 전라남도 장성에서 독창적인 성리학이론으로 제자들을 기르고 있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에게 수학한 경력이 눈에 띈다.
이제마가 의학을 연구한 과정은 자세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이능화에 따르면 고종 31년(1894) 여름 서울에 있는 자신의 집에 유숙하면서 매일 남산에 올라 솔잎을 뜯어 씹으며 약리를 연구했다고 한다. 이때 그의 나이(57세)나 필생의 역작인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을 집필했다는 사실 등으로 볼 때 그의 의술은 이미 완성된 단계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는 눈병을 심하게 앓던 이능화에게 “소양인의 위열병(胃熱病)으로 보통의 방법으로는 나을 수 없으니 어서 석고와 활석(滑石. 전기절연제ㆍ도료ㆍ도자기 등에 쓰이는 규산염〔硅酸鹽〕 광물의 하나)을 조제해 먹으라”고 처방해 완쾌시키는 뛰어난 의술을 폈다. 이능화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질병이 많았지만 서른 이후부터 매우 건강한 것은 그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썼다. 그밖에 함흥 출신의 천도교 지도자이자 3ㆍ1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최린(崔麟, 1878~1958)도 이제마에게서 사상의학을 배웠다는 사실도 덧붙일만 하다.
무반의 경력
앞서 말했듯이 이제마의 삶에서 의학과 함께 중요한 부분은 무반의 경력이었다. 그것은 그의 세속적 출세에 더욱 크게 기여했다. 이제마는 49세(고종 23〔1886〕)의 늦은 나이로 무과에 급제해 무위장(武衛將)이 되었고 6년 뒤에는 진해현감(종6품)에 임명되었다(고종 29년〔1892〕. 55세). 시점은 정확하지 않지만 상당한 무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고종 건양 1년(1896) 봄 강원도 소모군관(召募軍官) 최문환(崔文煥)이 모반을 일으키자 출병해 진압했고, 그 공로로 이듬해 함경남도 고원(高原)군수(종4품)에 임명되었다.
인술의 보급과 타계
그러나 이제마의 본업은 역시 의학이었다. 그는 1년 뒤 고원군수를 사직하고 고향 함흥으로 돌아와 만세교(萬歲橋)라는 다리 부근에 보원국(保元局)이라는 한약방을 열어 가난한 사람은 무료로 치료해 주고 그 밖의 사람에게는 좁쌀 한 되만 사례로 받으면서 인술(仁術)을 폈다.
한의학은 물론 동양의학의 역사에 새로운 지평을 연 이제마의 삶은 20세기가 시작된 해에 끝났다. 그는 1900년에 자신이 평생 탐구한 몸의 굴레를 벗었다. 그러나 그의 의학은 오히려 그 뒤부터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넓혀나갔다. 제자들은 그의 고향인 율동(栗洞)의 이름을 딴 율동계를 조직해 그를 기리고 대표적인 저술인 [동의수세보원]을 간행했다. 20세기의 첫머리에 조선의 먼 변방 함흥에서 시작된 새로운 의학의 작은 맥박은 한 세기를 거치면서 거대한 동맥으로 성장했다.
주요한 저술
이제마의 주요 저술은 [격치고(格致藁)](1892)와 [동의수세보원](1894)으로 지적된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격치고]는 본격적인 의학보다는 그것의 바탕이 되는 철학이라고 말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는 저작이다. 55세 때 쓴 그 글에서 그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물체(物)ㆍ몸(身)ㆍ마음(心)ㆍ일(事)의 네 영역으로 나누고 “물체는 몸에 깃들고 몸은 마음에 깃들며, 마음은 일에 깃든다”고 지적하면서 각 존재가 서로 뗄 수 없이 연관되어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설명했다.
이런 사상(四象)철학은 그 뒤 그의 대표적 저작인 [동의수세보원]에서 구체적인 의학적 표현을 얻었다. 그가 만년에 연 한약방의 이름에도 쓰인 그 제목은 ‘세상 사람들이 천수를 누리고 원기를 보존[壽世保元]’하게 하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1893년 7월 13일에 이 책을 쓰기 시작해 잠시도 멈추지 않고 집필한 끝에 1894년 4월 13일에 완성했다([동의수세보원] 권4,<사상인변증론(四象人辨證論)>). 한의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이 획기적인 저작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인 1901년 6월 함흥군 율동계에서 김영관(金永寬) 등 문인 7명의 주도로 간행되었다.
사상의학의 세계
사상의학은 물론 동양의학 자체를 거의 알지 못하지만, 이런저런 자료에 기대 그 개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포괄적으로 말해서 한국ㆍ중국ㆍ일본에서 발달한 동양의학은 인체와 자연의 기(氣)를 중시하는 의술이다. ‘음양오행’이라는 단어에 집약되었듯이, 그 기는 일단 음양으로 크게 나뉘고 다시 오행(목ㆍ화ㆍ토ㆍ금ㆍ수)으로 세분된다. 이런 논리에 따라 이제마 이전까지 동양의학은 인체의 주요 구성을 ‘오장육부(五臟六腑)’로 파악해 왔다.
그러나 ‘사상의학’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듯 이제마는 오행이 아니라 사상(四象)이라는 새로운 체계에 입각해 의학을 구축했다. 그는 인체를 ‘사장사부(四臟四腑)’로 파악하면서 그동안 환자의 병증에만 치중한 치료에서 벗어나 환자의 체질을 일차적으로 중시하는 새로운 의학을 주창했다. 즉 그는 수많은 개별적 증상보다 환자의 체질이 더욱 중요하므로 증상이 같더라도 체질이 다르면 다른 방법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모든 병은 심화(心火)를 끓이는 데서 생긴다”면서 감정의 동요를 가장 중요한 병인(病因)으로 지적했다. 그는 “옛날 의사들은 사랑과 미움, 기쁨과 분노 등이 치우쳐 병이 되는 것은 모르고, 음식 때문에 비위(脾胃)가 손상되거나 추위ㆍ더위ㆍ습기의 침범 때문에 병이 생기는 것으로만 알았다. 일을 할 때 적절하게 응변(應變)해 지나치게 심화(心火)를 태우지 않으면 오래 살지 못할 리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제마가 보기에 심화를 일으키는 요인은 ‘주(酒)ㆍ색(色)ㆍ재(財)ㆍ권(權)’이었다. 그는 “이 네 가지는 옛부터 경계해온 것으로 사람의 수명이 여기에 달려있다”면서 “교만하고 사치스러우면 반드시 사치와 여색을 탐하고, 게으르면 반드시 술과 식탐을 내며, 속이 좁고 급하면 반드시 권세와 총애를 제멋대로 휘두르고, 탐욕스러우면 반드시 돈과 재물에 욕심을 낸다”고 지적했다([동의수세보원] 권4, <광제설(廣濟說)>).
이런 진단에 따른 근본적인 처방은 수양(修養) 즉 감정의 통제였다. 그는 “의(醫)는 착하게 생각하는 것[善思]이고, 약(藥)은 공경하게 행동하는 것[敬行]”이라면서 “착하게 생각하면 피가 순환되고, 공경하게 행동하면 기운이 순조롭게 된다”고 지적했다.
조금 공허하게도 들리는 이런 기본적 논리는 정교하고 실제적인 진단과 처방으로 이어졌다. 그는 많은 환자를 진찰한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의 체질을 태음(太陰)ㆍ소양(少陽)ㆍ태양(太陽)ㆍ소음(少陰)으로 나눴다. 이 분류의 기본적 특징은 태양인은 폐가 크고 간이 작으며(肺大肝小), 태음인은 간이 크고 폐가 작으며(肝大肺小), 소양인은 비장이 크고 신장이 작으며(脾大腎小), 소음인은 신장이 크고 비장이 작다(腎大脾小)는 것이었다.
이제마는 1만 명을 기준으로 보면 태음인은 5천 명, 소양인은 3천 명, 소음인은 2천 명 정도며, 태양인은 3~10명 정도로 아주 적다고 파악했다([동의수세보원] 권1, <사단론> 등). 이제마는 자신을 태양인으로 진단했으며 질병이 생기면 건시(乾柹)와 메밀국수〔蕎麥麪〕를 먹어 쾌차했다고 한다(이능화, <이제마>).
모든 일이 그렇듯 물론 사상의학도 완전히 독창적인 의학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주역]의 영향을 받았으며, 동양 의학의 고전인 [황제내경(黃帝內經)]에서도 사람을 25개의 유형으로 나눈 바 있다. 그러나 이제마는 자신의 사상의학과 기존 한의학의 핵심적 차이를 이렇게 지적했다.
장중경(張仲景, 150~219. 중국 후한 말엽의 명의)이 말한 태양병ㆍ소양병ㆍ양명병(陽明病. 팔다리에 열이 많아 갈증이 나는 등의 질병)ㆍ태음병ㆍ소음병ㆍ궐음병(厥陰病. 한증〔寒證〕과 열증〔熱證〕이 뒤섞여 나타나는 질병)은 질병의 증세(病證)를 기준으로 나눈 것이지만, 내가 분류한 태양인ㆍ소양인ㆍ태음인ㆍ소음인은 사람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것은 아마 모든 사람의 바람일 것이다.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인간의 수명이 1백 세를 바라본다는 사실은 그 꿈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가끔 오래된 사진을 보면 푸르고 빛나는 시절의 부모님이 계신다. 물론 나 자신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역사에 남은 명의의 삶을 거칠게나마 살펴보면서 그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몸과 마음의 변화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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