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戰國)시대부터 송(宋)나라 때까지 중국 역대의 명문(名文)을 뽑아놓은 책 [고문진보(古文眞寶)]. [고문진보]에서도 그 문장이 가장 많이 실린 인물이 당나라 유학자인 한유(韓愈, 768~824)이다. 특히 [고문진보]에 실린 한유의 문장은 서문(序文)이 큰 비중을 차지하여 가히 서문 전문가라 할 만하다.
조선시대 한유에 비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을 들 수가 있다. 서거정은 세조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하면서 성종대까지 국가의 편찬 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오랜 기간 대제학을 지냈으며, [경국대전], [삼국사절요], [동문선] 등 주요 책의 서문을 작성한 ‘서문 전문가’였다. 그의 명문들은 [사가집(四佳集)]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조선전기 최고의 문장가 서거정을 만나 본다.
당대 최고의 학맥과 문장을 흡수하다
선비 중에 입덕(立德)ㆍ입공(立功)ㆍ입언(立言), 즉 삼불후(三不朽)의 아름다움을 겸비한 자가 드물지만 영원히 전해질 훌륭한 일이 되는데, 하물며 말(言)은 학문의 모범이 되고 공(功)은 관직의 일정한 직무를 지킨 데에 있으며 덕(德)은 인망에 부응하는 달성(達成) 서공(徐公, 서거정) 같은 분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니 그 영원히 전할 것에다 무엇을 더할 것이 있겠는가?- [국조인물고] 권12, 경재(卿宰) 서거정(徐居正)
덕(德)ㆍ공(功)ㆍ언(言)을 겸비했다고 평가되는 서거정. 조선시대에 서거정만큼 영화로운 삶을 산 지식인은 드물 것이다. 그는 네 번 현과(賢科)에 올라 여섯 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 있었으며, 오랜 기간 대제학으로 있으면서 당대 문단을 주도했다. 실록의 그의 졸기에는 “대제학과 지성균관사를 겸임하였는데, 대개 문형(文衡)을 맡은 것으로서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 손에서 나왔다1).”고 하여,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문형임을 기술하였다. 서거정은 과거 시험을 23차례 주관하며 많은 인재를 뽑았고, 육조(六曹) 판서ㆍ사헌부 대사헌(大司憲)ㆍ한성부 판윤(判尹)ㆍ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등 고위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 ‘’
- [성종실록] 1488년(성종 19) 12월 24일.
서거정의 본관은 달성(達成)이고, 자(字)는 강중(剛中)이며, 호는 사가정(四佳亭)ㆍ정정정(亭亭亭)이다. ‘거정(居正)’은 [춘추]의 <공양전(公羊傳)>에 “군자대거정(君子大居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항시 정도(正道)를 지키며 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자(字) ‘강중’은 [주역(周易)]에서 따온 용어이다.
서거정의 할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지낸 서의(徐義)였고, 아버지는 목사(牧使) 서미성(徐彌性)이었다. 어머니는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의 딸로, 서거정이 권근의 외손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권근은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고려말 이색의 문하에 있었던 정몽주(鄭夢周)ㆍ이숭인(李崇仁)ㆍ정도전(鄭道傳)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는 태조와 태종을 도와서 새 왕조의 문물을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권근은 초대 대제학을 역임하였는데, 대제학이라는 직책은 과거 시험을 주관하는 자리로서 선비들은 그가 선호하는 문예사조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초기 문인들은 권근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거정의 가계도.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를 참조하였다.
서거정은 또한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였던 이계전(李季甸. 1404~1459)에게서도 수학했다. 이계전은 이색의 손자이자 권근의 외손자이기도 했으며, 대제학까지 역임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서거정은 자형(姉兄)인 최항(崔恒)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서거정은 최항에 대해 “처음에 공[최항]이 우리 집안사람이 되었을 때에 나는 나이가 아직 어렸었다. 내가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은 것을 가엾이 여겨 자상하게 일러주고 타일러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었는데, 내가 처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자 집현전에서 10년을 외람되이 동료로 지냈고, 또 관각(館閣, 예문관)에서 수십여 년을 상관으로 모셨다.”라고 했다. 서거정이 1444년(세종 26) 문과에 합격했을 때 최항은 대제학을 맡고 있었고, 1467년(세조 13) 서거정이 대제학에 올랐을 때 최항이 영의정으로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최항이 서거정의 든든한 후견인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서거정은 자신의 능력과 더불어 최고의 학문과 문벌을 자랑하던 권근ㆍ이계전ㆍ최항 등과 혈연ㆍ학연으로 연결되면서 최고의 문장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서거정은 이들에게 도움을 받은 정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나의 외조 권근은 도덕과 문장이 백세의 모범이 될 만하여 일찍이 예문응교(藝文應敎)를 역임하고 마침내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그의 아들 권제(權踶)는 선업을 잘 이었고, 권제는 이계전에게 전하였으니, 이계전은 바로 권근의 외손이요, 그가 다시 최항(崔恒)에게 전하였으니, 그는 또한 권근의 외손서(外孫壻)인 것이다. 내가 무능한 사람으로 잠시 빈자리를 채워서 영성을 이었는데, 비록 불초하지만 역시 권근의 외손이다. 한집안에서 팔십에서 구십 년 동안에 아버지를 비롯하여 아들 그리고 외손 세 사람이 서로 이어 예문응교가 되었다가 끝내 문병(文柄)을 손에 쥐고 일품의 관직에 오른 경우는 천고에 드문 일이니, 이는 실로 우리 외조의 적선(積善)으로 인한 경복(慶福)과 시례(詩禮)를 가르치신 은택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서거정, [사가집] 권 31, 시류(詩類) <贈蔡應教壽>
위의 기록은 서거정의 집안이 문(文)으로 크게 번성하여 왔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세조와의 인연과 득의의 시절
서거정은 세조(世祖, 재위: 1455~1468)가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있던 시절부터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1452년(문종 2) 겨울, 그는 사은사(謝恩使) 수양대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중국에 갔다. 이때 경사(京師: 명나라의 서울)에 관복과 고명(誥命)을 하사한 것에 대해 사은하러 가는 길이었다. 비록 서거정은 가던 도중 모친상을 당하여 되돌아왔지만, 수양대군의 큰 신뢰를 얻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수양대군은 서거정의 노모(老母)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고 비밀에 부쳐 알지 못하게 했는데, 서거정이 노모에 대한 불길한 꿈을 꾸고 몹시 슬퍼하였다고 한다. 이에 세조는 감탄하며 “서거정의 효성은 하늘을 감동시킬 만하다.”고 이야기했고, 세조가 즉위한 이후에도 당시의 꿈을 일컬으며 “내가 그대를 등용한 것은 비단 재주 때문만은 아니다.”하며 그를 가상하게 여겼다.
이러한 인연에서였는지 1455년(세조 1) 6월에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이후, 당시 사명(辭命: 왕명을 전달하는 외교문서)의 대부분을 서거정에게 찬술하게 하였다. 그리고 세조는 서거정에게 공조참의ㆍ예조참의ㆍ이조참의ㆍ형조참판ㆍ예조참판ㆍ형조판서ㆍ성균관지사ㆍ예문관대제학 등 주요 관직을 연이어 제수하였다. 서거정은 이처럼 세조의 신임 아래에서 관직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서거정의 스승 이계전이 세조의 왕위찬탈 때 협력한 공으로 공신록(功臣錄)에 이름을 올린 사실과 서거정이 함께 교유하며 여가를 보냈던 인물들이 권람ㆍ한명회ㆍ신숙주와 같은 권신(權臣)들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상황을 잘 말해준다. 특히 한명회와는 어릴 때부터 함께 유학(遊學)했고 그 교분이 매우 가까웠다고 전한다2).
- [연산군일기] 1501년(연산군 7) 9월 17일(임진).
서거정의 필적. ‘천사사한진적(天使詞翰眞蹟)’이라 쓰여 있는 이 서첩에는 1476년(성종 7)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기순(祁順)과 그를 맞이했던 서거정의 글씨가 함께 실려있다. 보물 제1622호. 경기 용인시 기흥구 경기도박물관 소장.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서거정이 조선초기에 수행한 역할은 대단했다.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6명의 왕 아래에서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학자로서, 그의 학풍과 사상은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는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대규모 편찬 사업의 기획과 실무에 능하였다. 서거정이 국가적 요구에 의해 편찬한 것으로는 [경국대전(經國大典)]ㆍ[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ㆍ[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ㆍ[동문선(東文選)]ㆍ[동국통감(東國通鑑)]ㆍ[오행총괄(五行摠括)] 등이 대표적인데, 법전ㆍ역사ㆍ지리ㆍ문학 등의 분야에 걸쳐서 총 9종으로 그 분량은 수백 권에 달한다. 개인 저술로는 [동인시화(東人詩話)]ㆍ[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ㆍ[필원잡기(筆苑雜記)]ㆍ[사가집(四佳集)] 등 많은 저작이 있다.
특히 서거정이 각종 서책의 서문을 작성한 것이 눈에 띈다. [사가집] 권4~권6까지 실려 있는 서문만도 70편 이상이다. 국가에서 편찬한 책들의 서문을 도맡아 썼다는 데서 그만큼 그에게 그 편찬물에 대한 책임감이 부여되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국가 기록물의 서문을 쓰는 자는 국가에서 그 책을 만든 의도를 명확하게 간파하고 있어야 했을 것이고, 서거정은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서문 전문가’로 발탁된 것으로 파악된다.
서거정은 [경국대전]의 서문에서 “지금부터 자자손손 이어서 훌륭한 군주가 나와 모두들 이 [경국대전]을 준수하며 어기지도 않고 잊지도 않는다면, 우리 국가의 문명(文明)의 정치가 어찌 오직 주나라보다 융성할 뿐이겠는가. 억년 만년 무궁한 왕업이 응당 더욱 장구하게 이어질 것이다3).”하며 조선 최초의 법전을 잘 따를 것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그는 역사서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삼국사절요]의 서문에서는 예로부터 천하와 국가를 다스린 자는 모두 사서(史書)를 남겼다고 하며, 군주의 어리석음과 명철함ㆍ국세의 강성함과 쇠약함ㆍ국운의 길고 짧음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국여지승람]의 서문에서는 우리나라가 단군이 처음 나라를 세우고, 기자(箕子)가 봉토를 받은 이래로 삼국ㆍ고려시대에 넓은 강역을 차지했음을 자랑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에서 서거정의 역사 전통과 영토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 서거정, [사가집] 권 4, 序 <經國大典序>.
[동문선]의 서문에서 서거정은 우리나라의 문장은 삼국시대에 시작하여 고려 때에 융성하였고, 조선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문장이라는 것은 ‘도를 꿰는 도구[貫道之器]’라고 표현하였다.4) 그가 문장을 중시하였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특히 당나라 한유(韓愈)의 문장을 본받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술 곳곳에서 한유의 문장을 인용한 부분을 쉽게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 스스로도 “훌륭한 문장으로는 당(唐)나라의 한유(韓愈)ㆍ유종원(柳宗元)과 송나라의 구양수(歐陽脩)ㆍ소식(蘇軾) 만한 이가 없습니다5).”라고 하면서 한유를 칭송하였다. 또, 권별(權鼈)이 “서거정의 시는 한유ㆍ육방옹(陸放翁)의 체를 전적으로 모방하였으며, 손만 쓰면 시가 되어 아름답고 화려하여 적수가 없었다6).”라고 평가한 부분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서거정, [사가집] 권 4, 序 <東文選序>.
- [성종실록] 1475년(성종 6) 5월 7일(을묘).
- 권별, [海東雜錄] 권 4, 本朝 徐居正.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평가
서거정은 1488년(성종 19) 향년 69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때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았다. 서거정은 이듬해 3월에 광주(廣州) 서쪽 방이동(芳桋洞)에 묻혔고, 후에 대구 향현사(鄕賢祠-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서거정이 조선 건국 초기에 담당했던 역할은 실로 중요했다. 그는 꾸준히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 등이 모두 문형(文衡)을 맡았던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가 남긴 저술은 법전ㆍ역사ㆍ지리ㆍ문학 등 방대한 양이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며 영화로운 삶을 살았던 서거정에 대해서 실록의 졸기에서도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서거정이 다양한 학설에 능통하고 문장이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서거정은 온량간정(溫良簡正: 온화하고 무던하며 간소하고 바름)하고 모든 글을 널리 보았고 겸하여 풍수(風水)와 성명(星命)의 학설에도 통하였으며, 석씨의 글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문장을 함에 있어서는 고인(古人)의 과구(科臼: 규범)에 빠지지 아니하고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어서, [사가집] 30권이 세상에 행한다. [동국통감]ㆍ[여지승람]ㆍ[역대연표]ㆍ[동인시화]ㆍ[태평한화]ㆍ[필원잡기]는 모두 그가 찬집(撰集)한 것이다. 정자를 중원(中園)에 짓고는 못을 파고 연(蓮)을 심어서 ‘정정정(亭亭亭)’이라고 이름하고, 좌우에 도서를 쌓아 놓고 담박한 생활을 하였다. 서거정은 한때 사문(斯文)의 종장(宗匠)이 되었고, 문장을 함에 있어 시를 더욱 잘하여 저술에 뜻을 독실히 하여 늙을 때까지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성종실록] 1488년(성종 19) 12월 24일(계축)
그러나 실록의 졸기 뒷부분에는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기술되어 있다.
조정에서는 가장 선진(先進)인데, 명망이 자기보다 뒤에 있는 자가 종종 정승의 자리에 뛰어오르면, 서거정이 치우친 마음이 없지 아니하였다. 서거정에게 명하여 후생(後生)들과 더불어 같이 시문을 지어 올리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서거정이 불평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자격이 없을지라도 사문(斯文)의 맹주로 있은 지 30여 년인데, 입에 젖내 나는 소생(小生)과 더불어 재주 겨루기를 마음으로 달게 여기겠는가? 조정이 여기에 체통을 잃었다.”하였다. 서거정은 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하는 양(量)이 없고, 또 일찍이 후생을 장려해 기른 것이 없으니, 세상에서 이로써 작게 여겼다.- [성종실록] 1488년(성종 19) 12월 24일(계축)
[성종실록]을 편찬한 사관(史官)들은 서거정의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다. 그가 생전에 혁혁한 공을 이루었지만, 속이 좁고 후진 양성에 적극적이지 못했다는 비판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의 일부는 수용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훈구파가 점차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16세기 사림파의 시대가 열리는 상황도 자리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서거정은 훈구파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사림파의 시각에서는 부정적인 요소가 많은 인물이었다. 그가 중심이 되어 편찬한 역사서ㆍ지리지 등이 사림파 인사의 참여하에 개찬되었던 현실도 조선초기 최고의 문장가 서거정의 입지를 좁혀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전기 서거정이 완성한 문장 능력은, 체제의 정비와 문화 발전에 든든한 자양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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