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적부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과 중봉(重峯) 조헌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비록 뒷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분들의 말을 끄는 마부가 되어 모시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가졌다……. 중봉은 질정관(質正官)의 신분으로 연경에 들어갔다. 조선에 돌아와서는 왕께 [동환봉사(東還封事)]를 올려, 중국의 문물을 보고서 우리 조선의 처지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남의 훌륭한 점을 발견하고서 자신도 그와 같이 되고자 노력하는, 적극적이고도 간절한 정성을 담았다.박제가, [북학의]
위의 글은 조선후기 북학파를 대표하는 학자 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그의 저술 [북학의(北學議)]에 쓴 서문으로, 조헌(趙憲, 1544~1592)에 대한 존경심이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조선후기 북학을 시대정신으로 강조했던 박제가가 자신보다 200년을 앞서 살았던 인물 조헌을 이처럼 높이 평가한 까닭은 무엇일까?
자수성가한 관료, 조헌
대개 조헌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병장으로 알려져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헌은 옥천에 내려와 있었지만, 위기에 빠진 조국의 상황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그는 즉시 휘하의 문인들을 소집하여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왜적들과 맞섰다. 그리하여 청주성을 수복하는 데 성공했고, 여세를 몰아 왜적을 추적하였다. 그러나 1592년 8월 금산전투에서 칠백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전사했고, 이러한 까닭에 조헌은 ‘의병장’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깊이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조헌이 이이와 성혼의 문인으로, 서인의 핵심 정치가인 점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조헌은 선조대 붕당정치가 처음 시작될 무렵 서인의 중심인물이었으며, 여러 차례의 상소문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적극 개진한 관료이자 정치가였다. 특히 중국 명나라를 다녀온 후에 올린 상소문을 통해 토지제도와 교육제도, 군제(軍制)의 개혁, 공물 제도의 변통, 서얼 차별의 폐지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점에서는 경세가로 칭할 만하다.
조헌은 1544년(중종 39) 6월 28일 경기도 김포현 감정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황해도 배천(白川)이며, 자는 여식(汝式), 호는 후율(後栗) 또는 도원(陶原)이라 하였다. 널리 알려진 중봉(重峯)이란 호는 만년에 지은 것이다. 배천 조씨의 시조는 고려 현종 때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조지린(趙之遴)이며, 조선에 들어와서 5대조 환(環)이 숨은 선비로 세종에게 알려져 경기도사(京畿都事)에 제수된 후 나주목사를 지냈다. 조부 세우(世佑)는 조광조의 문인으로, 통진(通津)에서 김포 감정리로 세거지(世居地)를 옮겼다. 조부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초가삼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한다. 부친은 응지(應祉), 어머니는 용성(龍城) 차씨(車氏) 차순달의 딸이었다.
조헌은 10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인 김씨 밑에서 성장하여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18세에는 영월 신씨(辛氏) 신세성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처가도 별다른 명문가는 아니었다. 22세인 1565년 성균관에 진학하였는데, 이때 성균관 유생들이 보우(普雨)의 불교 진흥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리자 이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함경도 최북단인 온성도호부 훈도에 제수되었다가,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 9등으로 합격해 교서관 부정자에 임명되어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정주, 파주, 홍주 등 지방의 교수(敎授)직을 역임하였다. 1572년(선조 5)에 교서관 정자(正字)에 임명되면서 중앙의 관직에 진출했고, 이듬해 교서관 저작(著作)에 승진되었다.
1574년 유희춘이 석강(夕講)에서 당시 교서관 중에 오직 조헌만이 [강목(綱目)]을 교정할 수 있다고 말한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해 조헌의 학문적 수준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때 조헌은 궁중의 향실(香室)에서 봉향(封香)하는 관행을 폐지할 것을 아뢴 <논향축소(論香祝疏)>를 올렸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 무렵 그는 평생 가장 존경하게 되는 스승인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을 만나 두류산(頭流山) 등지를 유람하며 의기를 투합했다. 또한 천민 출신의 학자 서기(徐起)와도 만나 우의를 다졌는데, 조헌이 서기, 이지함이 함께 유람한 상황은 [동패낙송] 등의 야사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든 것은 ‘상소’로 통한다
[조천일기(朝天日記)]는 조헌이 선조7년(1574) 명나라에 질정관으로 파견되었을 때 남긴 기록이다. 현재 충남 금산군 칠백의총 관리소에 소장되어 있으며, 조헌 관련 유품들과 함께 보물 제1007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조헌의 생애에 큰 전기를 마련해 준 사건은 1574년(선조 7)에 성절사의 질정관1)(質正官)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온 것이다. 조헌은 명나라 사행의 경험을 [조천일기(朝天日記)]라는 기록을 남기는 한편, 귀국 직후 명나라의 문물제도 중 본받을 만한 것 8개를 든 <질정관회환후선상팔조소(質正官回還後上八先條疏)>를 올렸다.
- 질정관은 명나라 북경에 가는 신의 수행원으로 특별히 문관 1명을 차출하여, 사행에서의 의문점을 해결하도록 하였다. 처음 조천관(朝天官)이라 하였다가 질정관으로 바꾸었다.
조헌이 올린 상소문의 주요 내용은 중국을 따라 국가의 문묘(文廟) 제도를 개선할 것, 중앙과 지방의 관리 임용 제도를 개선할 것, 사치 풍조를 금하여 계층이 모두 평등하게 입게 할 것, 중국의 물자 절약을 본받을 것, 관리들의 번잡한 예를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예로 개선할 것, 스승과 생도가 서로 대하는 예절과 삭망(朔望)에 알성하는 규례를 중국 제도대로 할 것, 중국처럼 마을마다 향약소를 두어 백성을 교화시킬 것, 군령을 엄하게 하여 군사가 백성의 물건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고, 중국의 장수 기르는 제도를 본받아 문무를 겸비한 장수를 길러낼 것 등 8개 분야에 걸친 것이었다.2)
- [중봉집] 권 3. <질정관와환후선상팔조소(質正官回還後先上八條疏)> 및 [선조실록] 권 8, 선조 7년 11월 1일 기사 참조.
대부분 중국의 제도를 모델로 하여 폐단을 고치자는 것으로, 여기에는 지나치게 중국을 숭배하는 분위기도 엿보인다. 중국 청나라 문물 숭배주의자인 박제가가 조헌을 높이 평가한 것에는 이처럼 서로 공통되는 요소가 있다. 조헌은 "가정(嘉靖) 연간에 천년 동안 잘못되어 오던 것을 한번 바로잡았으나, 우리나라는 비루한 습속을 오래도록 지켜오고 있으니 아마도 의논하여 고쳐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선조는 “천백 리 풍속은 서로 다른 것인데, 만약 풍기(風氣)와 습속이 다른 것을 헤아리지 않고 억지로 본받아 행하려고 하면 끝내 소요만 일으킬 뿐, 일이 성사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조헌의 상소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조헌은 <팔조소>와 <십육조소> 두 개의 상소를 준비하였는데,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보다 근본적인 폐단에 관해 저술한 <십육조소>는 올리지 않았다. <십육조소>에서는 중국의 풍습에 따라 왕릉을 간소하게 할 것, 제사 때에 물자를 아끼고 근검절약할 것, 왕이 경연 강의를 독실하게 수강할 것, 인재는 문벌을 논하지 말고 뽑으며 재가(再嫁)를 막지 말고 서얼(庶孼)을 등용할 것, 하급 관원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모든 관원은 물론 말단의 일을 맡은 사람들까지 급여를 지급할 것, 세금을 장부에 맞게 징수하고 진상을 줄여 민생 안정을 위해 노력할 것, 노비를 줄여 병사로 선발하고 20년 내에 백만의 정예병을 갖출 것, 군대의 부패를 없애고 군사훈련을 강화할 것, 군수물자를 충분히 준비할 것 등을 제시하였다.3) 이 중 서얼도 학장(學長)으로 삼아 급료를 주자는 것과 재가 자녀의 차별 철폐와 서얼 폐지 주장은 신분제에 대한 진보적인 개혁안이었다.
- [중봉집] 권 4. <의상십육조소(擬上十六條疏)>.
조헌은 스승인 성혼의 편지를 가져온 가노(家奴)를 반가운 친구같이 대하고, 음식을 차려 겸상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또 도망간 자신의 가노에 대한 추쇄에도 인간적인 대우로 그를 감동시킨 일이 있었다.4) 조헌이 가장 존경한 스승 이지함이 하층민들과 격의 없이 지낸 성향이 그에게도 이어진 것이다. 서기는 이지함의 제자로 천민 출신이었지만, 조헌과 긴밀하게 교유했다. 이지함은 또 농업이 근본이고 수공업이나 수산업은 말업(末業)이지만, 근본과 말업이 서로 견제하고 보충하여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강조한 바 있는데, 조헌이 상소문을 통해 올린 염철 중시론은 이지함의 사상과 일치한다. 조헌의 개혁론은 후에 실학파로 지칭되는 유형원ㆍ홍대용ㆍ박지원ㆍ박제가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는 지적도 많다. 특히 박제가에게 깊은 영향을 주어서 박제가가 그의 저서 [북학의]에서 조헌을 존숭하고 조헌을 계승하려 한 점은 이 글의 맨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 [중봉집] 부록 권 4. <유사(遺事)>.
당쟁기 서인의 핵심으로 활약하다
1574년 11월 명나라에서 귀국한 후, 조헌은 교서관 박사, 호조와 예조의 좌랑,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등의 벼슬을 역임하면서 중견 관료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과 개혁적 성향 때문인지 그의 관료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577년(선조 10)에 통진 현감으로 있을 때, 조헌은 내노(內奴)의 작폐를 다스리다 장살(杖殺, 형별로 매를 쳐서 사람들 죽임)시킨 사건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부평에 유배되었다. 1580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전라감사 때 올린 상소에서는 연산군 때의 공안(貢案)을 혁파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86년(선조 19) 명나라의 학제를 본받아 계수제독관(界首提督官)이 신설되자, 조헌은 공주(公州)로 부임하였다. 이때 선조가 구언교서를 내렸고 이에 응하여 조헌은 장문의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을 통하여 자신의 입장을 조목조목 밝히는 조헌의 ‘상소 본능’이 다시금 발동된 것이다. 조헌은 첫머리에서, “지금 조가(朝家)의 거조는 참언(讒言, 거짓으로 꾸며 남을 헐뜻어 윗사람에게 고하여 바치는 말)이 기승을 부려 형벌이 자행되고, 어진 이를 추대하고 유능한 자에게 양보하는 뜻이 전혀 없으며, 관리들 사이에도 학문이 끊어지고 교양이 부족하여 효제(孝悌)의 정신을 흥기시켜 배반함이 없게 하는 풍속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에 삼강(三綱)은 매몰되고 의리가 분명치 못하여 이설(異說)을 주장하는 무리들이 세상에 날뛰고, 임금을 버리고 어버이를 뒤로 여기는 설이 기탄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고 하여 당시의 위기적 상황을 지적한 후, 붕당의 시비가 끊이지 않고, 민생이 고통을 받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
이 상소문은 [선조실록](선조 19년 10월 20일)에는 “공주 교수(敎授) 조헌이 소를 올려 이이ㆍ성혼의 학술의 바름과 나라에 충성한 정성을 극력 진술하고, 시인(時人)이 나라를 그르치고 어진 이를 방해하는 것을 배척하였는데, 내용이 몹시 길었다.”는 정도로 간략히 기록하고 있으나, [선조수정실록]의 권 20, 1586년(선조 19) 10월 1일의 기록에는 긴 전문이 거의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선조수정실록]이 서인이 중심이 되어 기술된 기록물이라는 점도 있지만, 그만큼 이 상소문이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575년 본격적으로 동인과 서인의 분당(分黨)이 시작된 후, 당쟁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이는 당이 나뉘어 서로 공격하는 것을 보합(保合)하기 위하여 애썼으나, 1584년 이이가 사망하면서 동인의 세력은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동인이 이이와 성혼을 조정에서 비판하자 조헌은 구언 상소라는 기회를 적극 활용하여 스승을 변호하였다. 서인 당인으로서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준 것이다. “공주 교수 조헌, 생원 이귀는 이이ㆍ성혼의 문인이니 자주 소를 올려 스승을 변호하고 억울함을 호소하였다.”는 기록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5)
- [당의통략(黨議通略)] <선조조(宣祖朝)>, 公州敎授趙憲生員李貴李珥成渾門人也 累疏訟師伸寃.
직선적인 기질의 조헌, 선조와의 불편한 관계
조선 중기 서인의 돌격형 관료이자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조헌의 묘소. 조헌은 임진왜란 때 옥천에서 의병을 모아 청주성을 탈환하는 등 왜적을 공격하는 데 앞장서다 금산에서 700여 명의 군사로 수만의 왜적과 싸우던 중 전사하였다. 충북 옥천군 안남면 소재, 충청북도 기념물 제14호.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
옥천 조헌 신도비. 조헌의 생애와 최후 격전지였던 금산전투에 대해 자세히 적고 있다. 인조 27년(1649)에 세운 것으로 좌의정 김상헌이 글을 짓고, 이조판서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충북 옥천군 안남면 소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3호.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
이 무렵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여러 도주(島主)를 죽이고 사신을 보내자, 조헌은 일본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요구하는 <청절왜사소請絕倭使疏)>를 선조에게 올렸다. 그러나 거듭되는 조헌의 상소에 지친 선조는 조헌을 파직시켰다. 조헌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상소를 통하여 토지제도와 군제를 개혁하고 일본과 외교를 단절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오히려 미운 털만 더 박혔다. [당의통략]에는 “조헌이 귀향지로부터 돌아와서 호남유생 양산숙과 번갈아 상소함이 마치 정암수의 말과 같았다. 상이 원래 조헌을 미워하였으므로, ‘조헌이 아직도 두려움을 모르는 구나. 다시 마천령을 넘고 싶은가.’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인의 돌격대장 역할을 해서인지, 선조나 동인 쪽에서는 조헌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선조는 조헌을 간귀(奸鬼)라고까지 표현했고, 동인들은 인요(人妖), 흉험(凶險), 교사(巧詐), 사독(邪毒), 괴귀(怪鬼) 등 모욕적인 말로 그를 매도했다. 심지어 이름을 얻기 위해 죽었다(銘名而死)고까지 비아냥거리거나, 조 아무개는 일개 충신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그의 학문은 취할 바 없다고 까지하였다.6) 조헌과 함께 서인의 입장에 있었던 이정구(李廷龜, 1564~1635)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조헌을 평가하였다.
- 이기용, <중봉 조헌의 개혁사상과 의병활동>, [한국사상과 문화] 15, 2002.
중봉 조공(趙公)이 생존하였을 때에 세상에서 공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공이 의기가 북받친 고지식한 위인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말하였고, 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광인(狂人)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다. 생각컨대 공은 평소에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비록 자기를 미치광이라 하여도 마음에 불안해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의(義)에 부당한 사실을 보면 그를 도외시하였기 때문에 공을 아는 사람은 진정 적었고 원수같이 미워하는 사람은 더욱 많았다. 국가가 평안하고 조정의 실정이 심하지 않았는데도 공은 홀로 궐문 앞에서 항언(抗言)하여 국가의 위기와 존망의 화근이 조석지간(朝夕之間)에 있다고 하였다.[중봉집] 권수, <항의신편서(抗義新編序)>
조헌의 스승인 이이는 “여식(汝式, 조헌의 자)이 매양 요(堯)ㆍ순(舜)의 정치를 당장에 회복할 수 있다고 여기나 요란함을 면치 못하니, 그는 단련되고 통달하기를 기다려야 크게 쓸 수 있다.”고 하여, 조헌의 성급한 기질을 지적하였다.
조헌은 당시의 현실을 위기로 인식하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혁 정책이 하루 빨리 제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모델로 명나라의 선진적인 제도를 제시했다. 선조를 비롯한 당대의 인물들은 조헌의 주장이 학문적으로 성숙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것으로 현실성이 떨어짐을 지적했지만, 박제가 등 후대의 실학자들은 그를 시대를 앞서간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 과단하고 직선적인 기질과 정치적으로 타협하지 않는 성향 등은 관료로서의 조헌을 성공시키지 못했지만, 임진왜란이라는 시대적 상황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그의 직선적인 성향을 적극 발휘하게 하였다.
선조와의 갈등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충북 옥천에 내려와 후학을 가르치며 지내던 시절,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헌은 1,600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의병단을 구성하고, 왜적에 당당히 맞섰다. 6월 청주성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우고 근왕(勤王)하려던 도중, 조헌은 8월의 금산전투에서 칠백 명의 의병과 함께 전사하였다. 사후에 1604년(선조 37)에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1609년(광해군 1년)에 그의 사당에 ‘표충(表忠)’이라는 편액이 하사되었다. 1754년(영조 30)에는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文廟)에까지 배향되었다.
어쩐지 조헌의 기질과 행동하는 지식인의 성향은 타협과 절충을 중시하는 ‘관료’보다는, 직선적이고 돌격적인 ‘의병장’이 어울려 보인다. 그의 기질과 맞아서일까? 관료 조헌보다는 의병장 조헌의 이름은 현재까지도 그를 널리 기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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