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정약용의 또 다른 멘토, 정약전

히메스타 2016. 8. 2. 10:08

실학사상의 집대성자로 추앙받는 정약용(, 1762~1836). 그에게는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친 두 명의 멘토(Mentor)가 있었다. 한 명은 일찍이 정약용을 인재로 알아보고 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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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임을 주었던 조선의 제 22대왕 정조였고, 다른 한 명은 정약용의 형이자 지기()였던 정약전(, 1758~1816)이었다. 정약용은 특히 둘째 형인 정약전을 어린 시절부터 잘 따랐고, 유배 생활 중에도 그에게 심적으로 많은 의지를 하며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는 정약용이 정약전을 떠나보낸 뒤, 애통해하며 쓴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외로운 천지 사이에 우리 손암(, 정약전) 선생만이 나의 지기()였는데, 이제는 잃어버렸으니, 앞으로는 비록 터득하는 바가 있더라도 어느 곳에 입을 열어 함께 말할 사람이 있겠느냐.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면 차라리 진작에 죽는 것만 못하다. 아내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자식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형제 종족들이 모두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처지에 나를 알아주던 우리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슬프지 않으랴.- 정약용, [다산시문집()] 제21권 <기이아()> 병자() 6월 17일

정약용에게 있어 아내보다 자식보다 그리고 다른 형제와 친척들보다도 더 특별했던 존재였던 정약전. [자산어보()1)]의 저자로도 널리 알려진 정약전의 삶을 통해 두 형제의 특별하고도 애틋했던 인연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정약전은 누구인가

정약전은 1758년(영조 34) 3월 1일 경기도 광주 마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자는 천전(), 호는 손암(), 연경재(), 또는 매심()이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이었고,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윤두서()의 손녀였다. 정재원은 부인이 두 명이었는데, 약전은 둘째 부인인 윤씨의 3남 1녀 중 큰 아들로 1758년(영조 34)에 태어났다. 이복형으로 정약현(), 두 동생은 약용()과 약종()이고 누이는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의 아내가 되었다.

정약전은 1776년(영조 52)에 호조좌랑이 된 부친을 따라 서울로 오게 되었는데 이때 이윤하, 이승훈, 김원성과 교유하기 시작했고, 성호 이익()의 학문을 이어받은 권철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약전은 네 살 아래의 동생인 정약용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그래서인지 정약용의 문집에는 정약전에 관한 기록이 곳곳에 보인다.

공은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았고 자란 뒤에는 더욱 기걸()하였다. 서울의 젊은 사류들과 교유하며 견문을 넓히고 뜻을 고상히 가졌다. … 성옹() 이익()의 학문을 전수 받아 주자()를 쫓고 도학()의 근원을 찾아 공자()에까지 거슬러 가서 읍양()하며 학문을 강론하고 탁마()하여 서로 더불어 덕을 쌓고 학업을 닦았다.- 정약용, [다산시문집] 제15권,<선중씨묘지명()>

정약전은 특히 서양의 학문과 사상에 심취한 이벽(), 이승훈 등 남인 인사들과 교유하고 특별히 친밀하게 지냈는데, 이들을 통해 서양의 역수학()을 접하고 나아가 천주교에 마음이 끌려 이를 신봉하기까지 하였다. 1777년(정조 1)부터는 권철신을 중심으로 서학(西)을 공부하는 강학회()가 경기도 여주 주어사()에서 열렸는데, 여기에 정약전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러한 학통의 계승은 정약전은 물론이고, 정약용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하는 동기를 제공하였다.

정약전은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790년 증광문과에 응시,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전적ㆍ병조좌랑의 관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1798년에는 왕의 명령을 받아 영남인물고()2)를 편찬했다.

늘 함께했던 형제

정약전은 정약용과 때로는 학문을 논하고 때로는 산수를 유람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1778년(정조 2) 겨울, 아버지가 화순현감으로 있을 때, 두 형제는 함께 동림사()에 머무르며 독서를 하였다. 그곳에서 40일 동안 정약전은 [상서()]를 읽었고, 정약용은 [맹자()]를 읽었다. 이때, 정약용은 [맹자]에 나오는 은미한 말과 오묘한 뜻을 정약전에게 물으며 깨달음을 얻었다. 이렇게 공부하는 동안 정약용은 정약전에게, “중이 중노릇을 하는 이유를 내가 지금 알았습니다. 부모 형제 처자의 즐거움이 없고, 술 마시고 고기 먹고 음탕한 소리와 아름다운 여색()의 즐거움이 없는데, 저들은 어찌하여 고통스럽게 중노릇을 합니까. 진실로 그와 바꿀 수 있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형제가 학문을 한 지 이미 여러 해 되었는데, 일찍이 동림사에서 맛본 것 같은 즐거움이 또 있었습니까3)?”라 하였고, 정약전도 맞장구를 쳐주었다.

1782년(정조 6) 가을에는 두 형제가 봉은사()에서 15일 동안 머무르며 경의과()를 익혔다. 정약용은 이때 “우리의 아름다운 아가위꽃이 안팎의 집안 간에 서로 비치어 너그럽게 대하고 격려도 하니 가슴속에 정성이 일어나누나4)”하고 시를 지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아가위꽃[]’은 [시경]에 나온 말로5), 우애 있는 형제를 뜻한다. 정약용은 자신과 형 정약전의 관계를 아가위꽃에 빗대어 표현했던 것이다.

정약전은 1783년(정조 7)에 진사가 되었지만, 대과()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며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1789년에는 이미 벼슬길에 나선 정약용의 설득 탓인지 생각을 바꾸어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임금을 섬길 길이 없다”며 공부에 집중하여 1790년(정조 14) 증광별시에 응시하였고, 병과로 급제하였다6). 이후 성균관 전적을 거쳐 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이때, 정조는 “정약전의 준걸한 풍채가 정약용의 아름다운 자태보다 낫다”하며 총애하였다7).

정약용과 정약전은 차례로 벼슬에 나아가 함께 관리 생활을 하면서 깊은 신뢰를 이어갔다. 형제는 벼슬생활 중에도 여유를 갖고 즐거운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1797년(정조 21) 여름, 당시 승정원에서 좌부승지로 일했던 정약용은 고향이 그리웠다. 조정의 승인 없이 도성 밖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약용은 이를 어기고 근무지를 이탈하여 고향으로 달려갔다8). 정약용은 고향에서 정약전을 비롯한 형제들과 배를 타고 나가 물고기를 잡아 끓여 먹기도 하고, 천진암()에 가서 노닐기도 했다.

강에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았는데, 크고 작은 고기가 모두 50여 마리나 되어 조그만 배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물 위에 뜬 부분이 겨우 몇 치에 불과했다. 배를 옮겨 남자주()에 정박시키고 즐겁게 한바탕 배불리 먹었다. … 한편으로 길을 가면서 한편으로 새 소리를 듣고 서로 돌아보며 매우 즐거워하였다. 절에 도착한 뒤에는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읊으면서 날을 보내곤 하다가 3일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이때에 지은 시가 모두 20여 수나 되었고, 먹은 산나물도 냉이ㆍ고사리ㆍ두릅 등 모두 56종이나 되었다.- 정약용, [다산시문집] 제3권,<단오일배이형유천진암(>

벼슬살이의 고단함을 피해 고향에서 고기도 잡고 산나물을 뜯으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형제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함께 공부하고 함께 벼슬에 올랐으며 함께 노니는 등 서로에게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가까운 벗으로 지냈다.

율정()에서의 이별

1784년(정조 8) 4월 15일은 정약전과 정약용에게 있어서는 운명적인 날이었다. 이날 두 형제가 사돈 이벽(, 1754~1785, 맏형 정약현의 처남)에게 천주교 교리를 듣고 그에 심취하게 됐기 때문이다. 당시 큰형수의 제삿날이어서 정약전과 정약용은 고향으로 내려갔고, 이벽도 누나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마현을 방문했다. 제사가 끝나고 그들은 함께 한강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향했는데, 두미협()쯤에서 두 형제는 이벽에게 천주교 교리를 들었다9). 그들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수표교()에 살던 이벽의 집으로 따라가, [천주실의()]와 [칠극()] 등 몇 권의 천주교 교리서를 빌려 읽으면서 천주교 신앙에 깊이 쏠리게 되었다.

후에 두 형제는 천주교와 거리를 두게 되었으나, 반대파들은 한때 천주교에 몸담았던 그들의 행적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정약전과 정약용을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결국 1801년(순조 1)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가 천주교 금압령을 내렸다. 스승 권철신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들이 사형을 당했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각각 신지도()와 장기현()으로 유배되었다10). 이것이 바로 신유박해()이다.

신유박해로 많은 천주교도가 처형되거나 귀양을 가자, 천주교도였던 황사영(, 큰형 정약현의 사위)은 탄압의 실태와 그 대책을 적은 편지를 북경에 있던 프랑스 주교에게 보냈다. 이 편지에서 황사영은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프랑스 함대를 파견해 조선 정부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을 적었다. 그러나 이 백서()가 탄로 나면서 황사영은 처형당하였고, 두 형제는 더 험한 곳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이배()되었던 것이다11). 정약전과 정약용은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귀양길을 떠났으나, 나주()의 성북() 율정점()에 이르러 손을 잡고 서로 헤어져 각기 배소()로 갔다. 그들은 알았을까? 이것이 그들의 영원한 이별이었다는 것을. 그래서인지 이때 남긴 정약용의 시는 우리에게 더 애틋함을 느끼게 해준다.

제일 미운 것은 율정점의 문 앞길이 두 갈래로 난 것이네
원래 한 뿌리에서 태어났는데 낙화처럼 뿔뿔이 흩날리다니
천지를 넓게 볼 양이면 모두가 한 집안이건만
좀스레 내 꼴 내 몸만 살피자니 슬픈 생각 언제나 끝이 없지.





- 정약용, [다산시문집] 제5권,<봉간손암()>

불후의 명작, [자산어보]

정약전의 [자산어보].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전문 서적이라 할 만큼 치밀한 고증이 돋보이는 책이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각자 저술에 힘썼고, 자주 편지로 문안하였다. 먼저,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직접 해양 생물을 관찰하고 정리하여 [자산어보]를 저술했다. 이 책에는 각종 수산 동식물에 대한 명칭ㆍ분포ㆍ형태ㆍ습성ㆍ이용 사실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자산어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전문 서적이라 할 만큼 치밀한 고증이 돋보인다.

정약전은 서문에서 “나는 섬사람들을 널리 만나보았다. 그 목적은 어보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 말이 다르므로 어느 말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섬 안에 장덕순, 즉 창대라는 사람이 있었다. (중략) 성격이 조용하고 정밀하여, 대체로 초목과 어조 가운데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을 모두 세밀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직을 이해하고 있었다. (중략) 이 분을 맞아 함께 묵으면서 물고기의 연구를 계속했다.”고 하여 [자산어보]의 저술에는 장덕순 등 흑산도 주민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현재 흑산도 사리에 소재한 사촌서당은 정약전이 유배 생활을 하면서 [자산어보]를 집필한 곳이다. 사촌서당은 현재 유배문화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저술할 무렵 정약용에게 편지를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약용은 그림보다 글로 쓰는 게 좋겠다고 조언을 해주었다12). 그리고 정약전은 바다에서 생활을 하는 와중에 정약용에게 조수()가 발생하는 까닭은 달에 있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13). 정약용도 유배지 강진에서 자신이 지은 책을 정약전에게 보내 충고를 구했다. 정약전은 동생이 보내준 책을 읽고, 같은 기질로 같은 학문을 닦았기에 생각하는 안목도 비슷한 것 같다고 했다. “그 새로운 뜻을 밝힌 것이 내가 생각해 낸 것과 판에 박은 듯 똑같아서, 곧바로 자네의 손을 잡고 내 아우야! 내 아우야! 등을 두드려 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네14).”라고 하면서, 기특한 동생의 등을 두드려주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는 아쉬움을 표현하였다. 정약전은 정약용의 많은 저술에 대해 일일이 답을 해주었는데, 정약용은 형의 조언을 따르면 의심났던 글과 서로 맞지 않던 수()가 모두 신기하게 들어맞아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유배지에서도 변치 않은 형제의 정

정약용은 정약전과 떨어져 있으면서, 형의 건강을 염려하기도 했다. 육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형이 걱정되었던 정약용은 1811년(순조 11) 겨울, 형에게 개고기를 먹을 것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는 개를 잡는 방법은 물론 개고기 요리법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호마(, 들깨) 한 말을 부쳐드리니 볶아서 가루로 만드십시오. 채소밭에 파가 있고 방에 식초가 있으면 이제 개를 잡을 차례입니다. 또 삶는 법을 말씀드리면, 우선 티끌이 묻지 않도록 달아매어 껍질을 벗기고 창자나 밥통은 씻어도 그 나머지는 절대로 씻지 말고 곧장 가마솥에 넣어서 바로 맑은 물로 삶습니다. 그리고는 일단 꺼내놓고 식초ㆍ장ㆍ기름ㆍ파 등으로 양념을 하여 더러는 다시 볶고 더러는 다시 삶는데 이렇게 해야 훌륭한 맛이 나게 됩니다.- 정약용, [다산시문집] 제20권, 상중씨()> ()

이 개고기 요리법은 정약용이 박제가()에게 배운 것이었다. 이를 형에게 알리고 들깨까지 보내주는 정약용의 모습에서 누구보다도 형을 아끼고 생각했던 그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1814년(순조 14) 여름, 정약용은 유배에 풀려날 수 있을 것 같다며 흑산도로 가 형을 뵙겠다는 사연을 전해왔다. 이에 정약전은 “나의 아우로 하여금 나를 보기 위하여 험한 바다를 건너게 할 수 없으니 내가 우이보()에 가서 기다릴 것이다15).”하고, 뭍에서 가까운 우이도로 가려 했다. 그러자 흑산도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서 정약전을 꼼짝도 못하게 붙잡았다. 이에 정약전은 은밀히 우이도 사람에게 배를 가지고 오게 하여 안개 낀 밤을 타 그곳으로 떠났다. 이튿날 아침, 정약전이 떠난 것을 알아챈 흑산도 사람들은 배를 급히 몰아 뒤쫓아 와서 그를 다시 흑산도로 데리고 갔다. 이 사연을 들은 정약용은 “요즘 세상에 그 고을 수령이 서울로 올라갔다가 다시 그 고을에 올 때는 백성들이 모두 길을 막고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말은 들었거니와 귀양살이하는 사람이 다른 섬으로 옮겨 가려 하자 본도()의 백성들이 길을 막고 더 머물게 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16).”라며 형의 덕망이 큼을 언급하였다.

1년의 세월이 흐른 뒤, 정약전은 흑산도 사람들에게 형제간의 정의()로 애걸하여 겨우 우이도로 갔으나, 형제의 만남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우를 다시 만나지 못하고, 정약전은 1816년(순조 16) 우이도에서 눈을 감았다.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그리워하고 존경했던 두 형제. 이들이 유배지에서의 슬픔을 학문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마음으로 의지하고 격려하는 서로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형제이면서도 평생을 신뢰하는 벗이자 서로의 멘토로 살았던 정약전과 정약용. 그들 형제의 삶과 저술은 조선후기 지성사를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