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은 현대 민주정치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이다. 그러나 현대의 정치사에서 여론의 도마 위에 항상 오르는 것은 여당과 야당 간의 치열한 정쟁이다. 국익이나 민생보다는 당리당략에 치우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1575년(선조 8) 동인과 서인의 분당(分黨)이 시작된 이래로 조선 후기 내내 치열한 당쟁(黨爭)이 전개되었다. 당쟁은 조선시대 정치사를 특징짓는 용어로 이해되기도 한다. 당쟁에 관한 관심은 조선시대 당대에도 매우 높았으며, 특히 조선 후기에는 당쟁에 관한 입장을 정리한 여러 당론서(黨論書)들이 편찬되었다. 당쟁에 관한 책 중에서도 비교적 당색(黨色)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당쟁을 정리한 책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바로 19세기의 학자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 저술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이다. 이건창의 생애와 [당의통략]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본다.
전형적인 소론 가문, 양명학을 입다
이건창의 자는 봉조(鳳藻), 호는 영재(寧齋), 당호는 명미당(明美堂), 본관은 전주(全州)로 조선 2대 왕인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이다. 이건창은 1852년에 태어나 1898년 사망하기까지 전통과 근대의 갈림길에 섰던 19세기 후반의 조선시대를 살아갔다.
이건창의 가계도. [전주이씨 덕천군파보]를 참고하여 중요 인물을 선별하여 정리하였다.
이건창의 5대조 이광명(李匡明)의 백부인 이진유(李眞儒, 1669~1730)는 경종 때 소론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1721년 <신축소(辛丑疏)>를 올린 인물 중 한 명으로, 김창집ㆍ이이명ㆍ이건명ㆍ조태채 등 노론 4대신을 ‘4흉(凶)’으로 몰아 축출하였다. 이진유는 노론의 지원을 업고 왕위에 오른 영조의 즉위 후 신축소가 빌미가 되어 유배의 길에 올랐다. 1727년 소론이 집권한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이후 1728년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결국 장살(杖殺, 매로 쳐서 죽이는 형벌)되고 말았다.
이광명은 영조의 즉위 전에 소론계의 위기를 직감하고 스승인 정제두(鄭齊斗,1649~1736)를 따라 강화도로 이주하였는데, 이때부터 이건창의 가문은 강화도에 정착해 살면서 정제두의 영향으로 양명학을 가학(家學)으로 삼게 되었다. 4대조인 이충익(李忠翊, 1744~1816)은 정제두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유학 이외에 노장(老莊)과 선불(禪佛)에 해박하였고 해서와 초서를 잘 썼다.
조부인 이시원(李是遠, 1790~1866)은 1866년 병인양요로 강화도가 함락되자 동생 이지원과 함께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기려 강화도에서 별시를 실시하였으며 여기에서 이건창이 급제하게 되었으니, 그로서는 조부의 후광을 입은 셈이 된다. 이처럼 이건창 가문은 전형적인 소론 가문이었으며, 학문적으로는 양명학에 심취하여 강화학파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건창, 19세기 말의 지식인이자 문장가
인천 강화군 화도읍 사기리에 위치한 이건창 생가.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다. 이건창은 조부 이시원의 개성유수 재직 시절 개성 관아에서 태어났으나, 대부분의 생애는 강화에서 보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이건창은 1852년 조부 이시원이 개성유수로 재직할 때 개성 관아에서 태어났으나 대부분의 생애는 강화에서 보냈다. [매천야록]에서는 이시원을 언급하면서, ‘그 집안이 중간에 신임당화(辛壬黨禍)에 연루되어 벼슬길이 막히자 강화도 사기리로 물러가 살았다’고 하여 조부 때부터 강화도에 정착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건창은 1866년 별시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두 차례 청에 다녀오기도 하였으며, 특히 여러 차례 암행어사의 임무를 맡아 지방에서 관리들의 비행을 논핵한 일은 그의 강직한 성품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본래 개화파인 강위(姜瑋, 1820~1884)를 스승으로 삼아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졌었지만, 1866년 조부의 죽음 이후에 척양(斥洋)을 지향하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는 관직에 제수되어도 나아가지 않았다. 1898년 조선의 멸망을 목전에 두고 졸하였다. 이건창은 1884년과 1888년 각각 모친상과 부친상을 당해 강화도에 내려가 복상(服喪)을 하였는데 이때에 여러 저술 작업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의통략]은 주로 이 시기에 저술된 것으로, 이건창은 [당의통략]을 통해 조선시대 당쟁의 역사를 정리하는 한편 소론 가문의 입장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모친상과 부친상을 지내고 관직에 다시 돌아온 이건창은 1890년 한성부 소윤이 되었다. 소윤으로 재임할 때는 화폐를 교환하는 것을 충분한 토의 끝에 시행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으며, 외국인에게 부동산을 판 사람에 대해 가중처벌을 하여 열강의 침탈이 가속화되던 시절 조선의 재산권을 지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1893년 함흥에 소요가 일어나자 안핵사(按覈使)로 파견돼 관찰사의 죄상을 가려내어 그를 파면시키는 등 이건창은 지방관으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1894년의 갑오경장 이후로는 각부의 협판(協辦)과 특진관(特進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96년 해주부(海州府)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계속 관직을 사용하는 상소문을 올린 끝에 고군산도(古群山島)로 유배되었다가 2개월 후에 풀려났다. 그 뒤 고향인 강화에 내려가서 서울과는 발길을 끊고 지내다 2년 뒤에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건창은 황현, 김택영 등 19세기말의 지식인들과 두터운 교분을 유지하여 한말 3대 문장가로 꼽히기도 한다. 황현의 문집인 [매천야록]에는 이건창과 그의 집안에 관한 내용이 다수 기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당의통략] 이외에 [명미당집(明義堂集)] 20권과 [독역수기(讀易隨記)] 1권이 있다.
[당의통략]의 저술 동기와 구성
이건창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당의통략]은 강화도에서 탄생하였다. 이건창은 1884년부터 1890년까지 연이은 부모상으로 인해 고향인 강화도에서 몇 년 간 머물고 있었는데, 마침 그의 집안에는 조부 이시원의 [국조문헌]과, 같은 집안의 선조인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 등의 기록들이 전해오고 있었다. 이건창은 조부 이시원의 건강이 악화되자 그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널리 알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이에 집안의 여러 기록들 중에서 당쟁에 관련된 내용을 중심으로 [당의통략]을 정리하였다. [당의통략]의 <자서(自序)>에서 이건창은 당론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이 역사서의 주요한 기반임을 서술하고 있다.
당의(黨議)를 먼저 한 것은 이유가 있다. 우리 국조의 당폐(黨弊)란 역대에 보지 못하던 것이어서, 목릉(穆陵, 선조를 칭함) 을해(乙亥, 1575년)로부터 원릉(元陵, 영조를 칭함) 을해(1755년)에 이르기까지 180년 동안에 공사 간의 문자를 기재한 것이 십에 칠, 팔은 다른 일이 아니고 모두 남의 시비, 득실, 사정(邪正), 충역(忠逆)을 의논할 것 없이 대체로 당론에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날에 정사(正史)를 쓰는 이는 반드시 먼저 당의를 간략하게 추려 옛날 사마천의 글과 반고의 뜻을 모방하여 별도로 한 부를 만들어 놓은 뒤라야 그 다른 일이 정리되어 문란해지지 않을 것이다.
재종제(再從弟, 육촌 아우) 이건방(李建芳)은 발문에서, ‘선생께서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당화(黨禍)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오래되고 지극히 말하기 어렵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원론(原論)에서 자세히 말했다. … 또 피차에 써놓은 글들은 각각 한 쪽의 편견에서 나왔으니, 양편을 두루 참작하여 공변된 마음과 공변된 눈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면 그 올바른 사실을 알 수 없게 된다. … 공사 간에 간수해 둔 글들이 백 가지 종류가 넘으니 이런 글들을 어떻게 줄마다 찾고 글자마다 세어서 졸지에 그 사실을 알 수가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선생이 이 글을 저술한 뜻이다.’라고 하여 이건창이 그때까지 전해지는 문헌들의 내용을 축약하고 정리하여 [당의통략]을 저술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그는 ‘선생은 당에 관계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지나치고, 남들이 나에게 사사로운 마음이 있다고 의심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 편을 깎고 저 편을 두둔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라 하여 이건창이 최대한 객관적 입장에서 책을 저술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서는 ‘여기서 볼 때 선생 같은 공평한 마음으로도 오히려 이러한 의심을 면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선생께서도 역시 당중(黨中)의 사람인 까닭이다.’라 하여 이건창이 소론이라는 당색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밝히고 있다.
[당의통략]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자서(自序)>로 이건창이 스스로 서술의 경위를 밝히는 글이다.
두 번째 부분은 본격적인 당쟁을 다룬 것으로서 1575년(선조 8)의 동서분당(東西分黨)에서 시작하여, 1755년(영조 31)의 [천의소감(闡義昭監)1)]의 편찬까지를 담고 있다. 당쟁의 역사는 왕대별로 소제목을 붙이는 형식으로 정리되어 있다. <선조조(宣祖朝~부광해조(附光海朝)>, <인조조~효종조>, <현종조>, <숙종조>, <경종조>, <영종조>로 분류한 다음, 각 시기별 당쟁 관련 사건을 기사본말체 형식으로 서술하였다.
1. 1721년(경종 1)부터 1755년(영조 31)까지의 영조의 집권 의리(執權義理)를 천명한 책.
세 번째 부분은 <원론(原論)>으로서 먼저 중국 역대의 당에 대해 논한 다음, 조선 당쟁의 원인을 설명하였다. 이건창이 당쟁의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도학(道學)이 너무 중(重)함, 명의(名義)가 너무 준엄함, 문사가 너무 자잘함, 형옥이 너무 엄밀함, 대각(臺閣)이 너무 준엄함, 관직이 너무 청정함, 문벌이 너무 성대함, 승평(昇平, 태평시대)이 너무 오래됨의 여덟 가지였다. 이어서 본래 유학의 여덟 가지 덕목이 중용의 도를 얻지 못하고 너무 지나친 데에서 당쟁이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마지막 네 번째 부분은 종제인 이건방의 발문으로서 이건창과 [당의통략]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소론의 정치의식을 최대한 배제하고 객관적 서술 지향
이건창의 [당의통략]. 비슷한 시기의 당론서들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객관적 시각에서 서술하려 한 흔적이 엿보인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당의통략]은 최대한 당쟁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려 하였지만, 소론의 핵심 가문 출신인 저자의 ‘소론적인’ 시각이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소론을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건창은 소론에 대해 ‘착한 선비’라든지 ‘맑은 의론을 주도하고 일에 대해 용감히 말했다’고 표현하는 등 긍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반해 노론과 노론의 영수 송시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특히 ‘당당하던 대의가 어찌 홀로 송씨의 사사로운 물건이 되겠습니까’로 끝나는 최창대의 상소로 이를 마무리 한 부분에는 소론의 정치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당의통략]에 소론적인 입장이 존재하고 있다 해도, 비슷한 시기에 저술된 다른 당론서들과 비교해 볼 때 비교적 객관성을 갖추고 있다. 저술에 기본이 된 자료는 이긍익의 [연려실기술]과 이시원의 [국조문헌]으로, [연려실기술]은 주제에 따라 원자료를 배열하는 형식으로 저자의 주관적인 해설과 의견을 배제한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저술로 평가를 받는다. 이시원이 모은 자료로 알려진 [국조문헌] 또한 이긍익이 <자서>에서 ‘부군께서 평생 고심하고 부지런히 힘쓴 것을 모두 기록한 것 뿐이요, 별도의 창작은 없다’고 밝힌 것처럼, 있는 사실을 토대로 기록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 두 자료를 기본으로 하여 저술한 [당의통략] 역시 기록의 객관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건창은 [당의통략]의 <원론>에서 ‘나는 한쪽 당을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직접 그 자신이 객관성을 토대로 저술하고 있음을 밝혔다. 실제 책의 곳곳에서는 소론을 비판한 내용들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숙종조>에 등장하는, 박세채의 탕평론을 다룬 부분에서는 ‘소론 또한 화합하지 않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특히 임금에게 건의하여 올리는 것이 사사건건 노론과 상반되자 노론도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품었다. 혹자가 남구만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금 조금 뜻을 굽히고 노론의 한두 가지 일을 따르면, 노론과 소론이 다시 합해져 국사(國事)에 다행함이 될 것이다”하였다. 남구만은 견고히 따르지 않았다.’고 하여 소론의 불통(不通)을 지적하였다. 또한 <경종조> 중에서는 소론 가문의 일원인 이진유(李眞儒)가 연관된 임인옥(壬寅獄)을 거론하면서, ‘전후의 피고는 다 김창집, 이이명의 집 아들과 조카, 빈객들인데 조정 의논이 ‘연명 차자’와 삼급수(三級手)의 음모를 연결된 것이라 하여 국문한 공초(供招)와 대간의 의논이 서로 섞인 것이 많고 공사가 서로 가까워 증거가 매우 명백하지 못했다’고 하여 노론을 공격한 소론 측의 옥사가 정당치 못했음을 서술하였다. 이처럼 이건창은 자신의 당이라 해서 무조건 소론을 미화하고 정당화하지 않았으며, 노론에게 당쟁의 모든 책임을 지우지 않는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다.
[당의통략]의 객관성은 비슷한 시기의 당론서들과 비교하면 명확히 드러난다. 노론 계열인 남기제(南紀濟)가 저술한 [아아록(我我錄)]은 16세기 후반 이후 정치사의 주요 흐름에서 서인과 노론의 정당성을 드러내기 위해 저술되었다. 제목부터가 ‘우리, 우리 편의 기록’이란 편향성이 드러나 있다. 또한 ‘천하의 일이란, 이것이 선하면 저것은 악하고, 저것이 옳으면 이것은 그릇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면서 정치사를 흑백논리로 바라보고 있는데, 여기서 선한 것은 즉 자당인 노론이고 악한 것은 노론 외의 당을 뜻한다. 철저히 노론을 위한, 노론에 의한 당론서임을 알 수 있다.
남인 남하정(南夏正)이 저술한 [동소만록(桐巢漫錄)]도 크게 보면 관련된 주제에 대한 원자료를 싣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사료 선택에서 철저히 남인의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남하정은 당쟁의 기원을 서인이 동인을 공격한 기축옥사라고 규정하였으며, 1689년 기사환국 당시 남인에게 붙여진 죄인의 혐의를 변호하기 위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서인의 영수 정철을 ‘독철(毒澈)’이라고 표현하는 등 서인에 대한 반감을 여지없이 표현하였다. 위와 같이 자당의 정당성을 노골적으로 주장하고 변호하기 위해 저술했던 [아아록]이나 [동소만록]과 비교하면, [당의통략]은 소론이라는 저자의 당색이 크게 드러나지 않은 저술임이 확인된다.
이건창은 고종 시대 지방관을 역임한 시절에도 공(公)을 우선시하는 집행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인물이었고, 이러한 강직성이 [당의 통략]의 저술에도 이어졌다고 판단된다. ‘당쟁’은 조선중ㆍ후기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키워드로서, 이건창이 학자적 양심을 가지고 최대한의 사료를 참고하여 저술한 [당의통략]은 현재에도 조선시대 당쟁사 연구의 필수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자파의 정치적 입장만 주장하는 여당과 야당 간 정치적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현실 때문일까? 이건창의 객관적인 기록 정신과 [당의통략]의 가치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
'인물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약용의 또 다른 멘토, 정약전 (0) | 2016.08.02 |
---|---|
방탕한 행동을 일삼았던 원 간섭기의 고려왕, 충혜왕 (0) | 2016.08.02 |
정치적 균형과 자유로운 문학을 추구한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 (0) | 2016.07.26 |
조선말기 난세를 살다간 최고의 정치외교가, 김홍집 (0) | 2016.07.25 |
원나라의 환관이 되어 고려 국정에 간섭한 고려인, 고용보 (0) | 2016.07.22 |